[70주년, 한국전쟁과 제주] (8) 학도돌격대, 육군·해병대 주둔, 한국보육원 설치 등 한국전쟁 중심지 역할

한반도가 한국전쟁 폐허로부터 다시 일어선지 70년이 흘렀습니다. 물론 제주는 한반도 최남단이라는 지리적 환경으로 6.25의 직접 피해지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같은 환경은 6.25 전란 기간 동안 한국전쟁과 연관된 시설·기관들은 물론, 육지부의 피난민과 전쟁 포로들까지 대거 제주로 집중하게 하는 요인이 됐습니다. 4.3이라는 현대사의 비극을 치르고 있던 당시의 제주사회는 한국전쟁으로 유사 이래 정치·군사·외교뿐만 아니라 가장 큰 지역사회 격변까지 경험하게 됩니다. [제주의소리]가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전쟁기 육지에서 제주로 피난이 이뤄지는 과정과, 정부와 군에서 제주도를 적극 활용하면서 남긴 ‘사람과 장소’들을 재조명해보는 [70주년, 한국전쟁과 제주] 기획을 연재합니다. 전쟁의 실상과 전후의 변화상을 살펴보는 이번 기획을 통해 한국전쟁기의 제주역사는 물론 제주인들의 삶을 되돌아봄으로서 ‘항구적 평화’의 중요성을 미래세대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글] 

“조국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놓여 있는 이 마당에 가만히 앉아서 공부만 할 수 없으니 즉각 최전선에 나아가 북괴군과 싸우도록 해주십시오.”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눈 동족상잔의 참혹한 비극이 시작된 1950년 6월 25일.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대한민국 최남단 제주서 전장에 뛰어든 것은 어른들만이 아니었다.

제주농업중학교(이하, 제주농중)를 중심으로 제주 읍내 중학생 145명은 자발적으로 ‘학도돌격대’를 조직하고 태극기를 품고 전장으로 나섰다. 1950년 7월 초부터 학도호국대를 통해 군사훈련을 받아온 이들은 8월2일 제주도 학도돌격대를 편성했다.

당시 제주농중은 1946년 9월, 현재의 중·고등 교육과정이 통합된 6년제 학제가 운영됐다. 1950년 5월에는 6년제와 4년제가 동시에 운영되는 등 재학생들의 나이가 약 14~19세로 다양한 분포를 나타냈다.

고남화 대령 참전 당시 소지하고 있던 태극기. 사진=사이버 제주교육박물관.<br>
고남화 대령 참전 당시 소지하고 있던 태극기. 사진=사이버 제주교육박물관.

[제주의소리]가 만난 정수현 작가 증언에 따르면 학도돌격대는 전국학생총연맹 위원장을 지냈던 제주농중 졸업생 김호산을 돌격대장에 추대하고 제주농중 고남화 등으로 학생 간부를 구성했다. 이들은 출전을 위해 계엄사령관이자 해병대 사령관인 신현준 대령을 찾아가기도 했다.

광주 제5보병사단에 입대하기 위해 선박 지원과 허가를 요청하지만 신 대령으로부터 5사단이 철수 중이라 입대가 불가하니 해병대로 입대하라는 권유를 받게 된다.

학도돌격대는 해병대 입대에 앞서 △학도돌격대 독립부대를 유지해줄 것 △학생 간부가 지휘토록 할 것 △이미 군사훈련을 받았으니 바로 전장에 투입 시켜줄 것 △통일 직후 복학시켜줄 것 △교장, 교감 등 구속돼있는 선생과 학생을 석방해줄 것 등 조건을 내걸기도 했다.

신 대령이 독립부대 유지 조건을 제외한 요구를 수용하고 재차 해병대 입대를 권유하자, 학도돌격대는 출정 의지를 불태우며 해병대 지원을 결정하게 된다. 같은 해 8월16일 출정학도 환송식 이후 다음날 무운장구를 기원하는 천인침을 배에 두르고 시가행진을 펼쳤다.

당시 제주농중 학생들의 출정을 보도한 제주신보 기사다.

단기 4283년 8월 17일 출전학도장행회, 제주농중서성황

제주농교에서는 금번 OO사단 소속으로 출정하게 되는 동교출신 80여명의 학도지원병에 대한 무운장구와 그 장행을 격려하기 위한 출정학도 환송식을 지난 16일 하오 3시부터 동교 강당에서 성대히 개최하여 학교장 대리 강교감의 간곡한 격려사가 있은 다음 내빈축사에 있어 송, 손 양 씨로부터 출정학도들의 무운과 장도를 축하하는 열렬한 축사와 재학생대표의 송사에 뒤이어 학도병 대표 고남화 군으로부터 기대에 어김없이 신명을 다하겠다는 답사가 있어 일반으로 하여 더욱 마음 뜨거운 신뢰감을 갖게하였고 이어서 간소한 장행연을 배풀고 의의 깊은 동 환송식은 오후 5시 30분경에 끝마치었다 한다.

단기 4283년(1950년) 8월 17일 제주신보 기사. “출전학도장행회 제주농중서 성황”이라는 제목으로 당시 상황을 나타내고 있다. 사진=濟州高百年史 1.
단기 4283년(1950년) 8월17일 제주신보 기사. “출전학도장행회 제주농중서 성황”이라는 제목으로 당시 상황을 나타내고 있다. 사진=濟州高百年史 1.
해병 제4기로 전장에 나가는 학도병들. 어깨에 무운장구를 비는 태극기를 둘러 깃발로 환송받고 있다. 사진=사진으로 엮은 제주교육 100년.

학도돌격대는 청년방위훈련학교를 마쳐 육군예비역 소위로 임관했던 고남화를 제외한 대부분 1950년 8월30일 해병대 4기로 입대했다. 해병으로 참전한 이들은 9월1일 산지항을 떠나 인천상륙작전부대와 합류, 전쟁사의 큰 획을 그은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제주농중은 1907년 오현단 북쪽에 설립된 사립 의신학교로부터 출발한다. 1909년 공립제주농림학교로 개칭 인가를 받고 1910년 개교한 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제주공립간이농업학교, 제주공립농업학교 등 학제와 교명이 자주 변경돼왔다.

1940년엔 삼도리 283번지로 이설, 광복 이후인 1946년 9월엔 6년제 제주공립농업중학교로 개편됐다. 1950년 5월엔 제주농업중학교로 교명이 변경됐고 1951년 8월에는 중고 분리 원칙에 따라 제주제일중학교와 제주농업고등학교로 분리됐다. 이후 2000년 제주관광산업고등학교를 거쳐 2008년 지금의 제주고등학교가 됐다.

한국전쟁과 더불어 제주4.3의 아픈 역사 또한 제주농중에 서려있다. 광복 이후 미59군정 중대본부 설치와 육군 9연대 본부 주둔을 시작으로 △1948년 5월 11연대 △12월 2연대 △1949년 독립 제1대대 등 군 사령부가 자리하는 4.3사건 토벌의 중심기지가 된 것.

제주도교육청의 ‘4.3사건 교육계 피해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제주농중 시설은 토벌대 주둔 7회, 주민 수용소 4회, 학사운영 중단 6회, 휴교 조치 1회가 있었다. 더불어 제주도경비사령부는 우익학생 중심 진압 작전의 일환으로 학도군사훈련을 실시키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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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1동 제주국제교육원에 세워진 제주농업고등학교 이전 기념비. 국제교육원 앞으로 뻗어있는 전농로(典農路)는 영재를 배출한 제주농업고등학교의 이름을 따 개설되기도 했다. ⓒ제주의소리
1940년 5월26일 제주농업중학교 광양교지 본관. 사진=濟州高百年史 1.

학도돌격대가 창설됐던 1950년 8월 당시 제주농중은 삼도리 283번지에 있었다. 현재 제주시 삼도동 제주국제교육원부터 이도동 삼성초등학교까지 약 6만 평에 이르는 전농로 일대 넓은 부지 덕에 해병대, 육군 제5훈련소 제5교육대, 해군 제3병원, 한국보육원 등 시설이 제주농중을 거치기도 했다.

제주고 100년사에 따르면 1949년 11월~1951년 8월 제주농중 교사와 교감으로 근무한 양치종은 “6.25 당시 해병막사가 전농로 아래 제주농중 안에 설치돼 있어 시민들은 늘 훈련모습을 지켜봤다”고 증언했다.

대규모 육군 모병이 시작된 1950년 7월에는 육군 제5훈련소 제5교육대가 제주농중에 설치돼 신병을 육성, 제주사단이라 불리는 제11보병사단 자원을 배출했다. 더불어 10월31일에는 해군 제3병원이 설립돼 진해 해군병원으로 흡수되기까지 약 3년간 운영되기도 했다. 

또 1950년 12월부터 1955년 11월까지 제주농중 교실과 운동장 등 무상임대 시설에 고아들이 머물기도 했다. 딘 헤스(Dean E. Hess) 공군 대령의 총지휘를 통해 1950년 12월27일 907명의 전쟁고아가 제주농중으로 수송돼 한국보육원이 개설됐다.

벚꽃길로 유명해진 전농로 역시 1977년 도로 개설 당시 제주농고(제주농중)의 이름을 따 만들어질 정도로 제주농중은 한국전쟁 때 다양한 역할을 도맡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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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고등학교 양지원에는 6.25참전 전몰제농학도 추념비가 세워져 어린 나이 나라를 위해 혼을 불사른 그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1950년 7월 제주농업중학교 제40회 학생들 출정기념사진. 사진=濟州高百年史 1.<br>
1950년 7월 제주농업중학교 제40회 학생들 출정기념사진. 사진=濟州高百年史 1.

1994년엔 제주고등학교 양지원에 한국전쟁 당시 학생 신분으로 참전한 132명 가운데 전사한 전몰제농학도 38인의 이름을 새긴 학도병 추념비가 세워졌다. 지난해는 제주고총동창회가 같은 장소서 추모공원 준공 제막식을 개최하기도 했다.

김진옥(74회) 제주고등학교 총동창회 사무처장은 추모공원에 대해 “양지원 추모공원은 호국영웅 100인에 등재된 고 김문성 중위를 포함해 풍전등화의 조국을 구하고자 출정 산화한 38인의 제주고 학도병을 모신 곳”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후대에 애국애족의 귀감이 되는 양지원을 제주고인과 자라나는 후배들, 도민 추모와 휴식의 공간, 참신한 교육 장소와 높은 뜻을 높이 기리는 장소로 만들고자 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고 의미를 밝혔다.

한반도가 둘로 나뉘며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난 한국전쟁 당시 최남단 제주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온 제주농업중학교. 책과 연필 대신 총칼을 들고 전쟁터에 나간 학도돌격대와 전쟁으로 집을 잃은 고아를 품고 신병을 육성키도 했다.

어두운 일제강점기를 지나 제주4.3, 한국전쟁 등을 거쳐오며 대한민국의 가슴 아픈 근현대사를 목격해온 제주농중. 평화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한 몸 바친 호국영령들의 희생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곳을 기억하고, 국난 극복을 위해 힘들게 삶을 일궈온 선대의 정신을 잊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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