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54) 그리운 바다 성산포 - 17 수많은 태양 / 이생진

성산일출 ⓒ김연미
성산일출 ⓒ김연미

아침 여섯 시
어느 동쪽에도
그만한 태양은 솟는 법인데
유독 성산포에서만
해가 솟는다고 부산필거야

아침 여섯 시
태양은 수만 개
유독 성산포에서만
해가 솟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나와서 해를 보라
하나밖에 없다고 착각해 온
해를 보라

-이생진, <그리운 바다 성산포- 17 수많은 태양> 전문-

 

지인의 책장에서 오래된 시집을 발견했다. 다행히도 같은 시집이 두 권이어서, 지인은 흔쾌히 그 중 하나를 내주었다. ‘바다와 섬과 고독의 노래’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그리운 바다 성산포>, 이생진 시집이었다. 

1987년 3월 10일 초판을 발행하고 1998년 8월 16일 21쇄를 찍었다. 내게 들어온 책이 21쇄니 그 이후에 얼마나 더 이 시집이 팔렸는지는 알 수 없다. 지금과 비교하면 초대박 베스트셀러 시집이라고나 할까. 

아무 것에도 관심 없었지만 세상 모든 것에 관심이 가던 여고시절. 언니가 틀어놓은 시낭송 카세트 테이프에서는 종종 파도소리와 음악이 적절히 섞여서 ‘아침 여섯 시, 어느 동쪽에서도 그만한 태양은 솟는 법인데...’로 시작하는 여자 성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몇 개의 시가 낭송되고 나면 다른 남자 성우가 나와 똑 같은 톤의 시낭송이 이어졌다. 느리고, 부드럽고, 몽롱하고, 아늑했던 목소리...

범죄영화에 나왔던 홍콩배우들과, 미국남자들이 부르는 팝, 책받침에 찍혀 나오는 외국 연예인 사진들을 모으며 밤이면 <별이 빛나는 밤에> 라디오 프로그램으로 보내는 엽서를 쓰고 있는 언니 옆에서 나는 그리운 바다 성산포를 들었었다.

‘성산포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여자가 남자보다/ 바다에 더 가깝다’, 바다와 가까워지는 것은 어떤 것인지, 바다와 가까운 어떤 여자와 바다와 가까운 어떤 남자의 모습을 그리다 중산간 태생인 나의 근원적 바다 공포심이 불쑥 솟아올라 도리질 치기를 몇 번. 

‘성산포에서는/ 바람이 심한 날/ 제비처럼 사투리로 말 한다/ 그러다가도 해 뜨는 아침이면/ 말보다 쉬운 감탄사를 쓴다’ 그래, 해 뜨는 광경 앞에서는 감탄사 하나로 족하지. 아니 감탄사조차 필요 없을지 몰라. 언젠가 교실 창밖으로 봤던 아침 태양의 웅장함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성산포에서의 아침 해는 어떤 느낌일까를 상상하기도 했다. 

시낭송 테이프가 아이돌 CD처럼 팔리던 시절. 감수성 폭발하던 위험한 사춘기, 방향도 없이 불쑥불쑥 솟구치는 열정이 무기력증으로 다가오던 밤, 나보다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성산포의 바다와 파도소리를 들려주며 나를 다독여주던 시편들이었다. 

다시 그의 시를 읽는다. 부드럽던 성우의 목소리가 아니라, 다초점 렌즈 안경을 쓰고 나보다 더 낡아버린 시집을 읽는다. 시간은 많이 흘렀고, 성산포의 풍경도 많이 달라져 있지만 이생진 시인의 시집 <그리운 바다 성산포>는 40년 가까운 시간을 되돌려 다시 내게로 온 것이다.

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 산문집 <비오는 날의 오후>를 펴냈다.

젊은시조문학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오랫동안 하던 일을 그만두고 ‘글만 쓰면서 먹고 살수는 없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