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주년, 한국전쟁과 제주] (9) 원로 작가 조명철이 기억하는 한국전쟁과 제주문학

한반도가 한국전쟁 폐허로부터 다시 일어선지 70년이 흘렀습니다. 물론 제주는 한반도 최남단이라는 지리적 환경으로 6.25의 직접 피해지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같은 환경은 6.25 전란 기간 동안 한국전쟁과 연관된 시설·기관들은 물론, 육지부의 피난민과 전쟁 포로들까지 대거 제주로 집중하게 하는 요인이 됐습니다. 4.3이라는 현대사의 비극을 치르고 있던 당시의 제주사회는 한국전쟁으로 유사 이래 정치·군사·외교뿐만 아니라 가장 큰 지역사회 격변까지 경험하게 됩니다. [제주의소리]가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전쟁기 육지에서 제주로 피난이 이뤄지는 과정과, 정부와 군에서 제주도를 적극 활용하면서 남긴 ‘사람과 장소’들을 재조명해보는 [70주년, 한국전쟁과 제주] 기획을 연재합니다. 전쟁의 실상과 전후의 변화상을 살펴보는 이번 기획을 통해 한국전쟁기의 제주역사는 물론 제주인들의 삶을 되돌아봄으로서 ‘항구적 평화’의 중요성을 미래세대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글] 

민족 공동체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던 한국전쟁. 엄청난 사건이었던 만큼 예상하지 못한 영향도 발생하곤 했다. 4.3으로 제주는 예술을 포함, 모든 사회 요소들이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폐허가 된 문학계에 작은 씨를 뿌린 것은 아이러니하게 한국전쟁으로 제주를 찾은 피난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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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철 전 제주문화원장은 24일 '제주의소리'와 만나 한국전쟁 이후 제주문학계의 흐름을 들려줬다. ⓒ제주의소리

조명철(86) 전 제주문화원장은 1950년대 제주 문학계를 경험하며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생존 원로 문학인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해방을 경험하고 이후 제주4.3과 전쟁통을 목도했다. 고교시절 피난민이었던 유몽 김윤국에게 가르침을 받아 문학의 꿈을 품었고,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는 목월 박영종의 시론 강의에 매료돼 문학의 꿈을 키웠다. 이후 교직 생활을 병행하며 오롯이 문학에 전념하지는 못했지만 <제주문화> 창간호 참여(1957), 한국문인협회 제주지부 창립 회원(1968), 제주수필문학회 회장(1994), 한국문인협회 제주지회 초대 지회장(1997~1998) 등 늘 문학과 함께 해왔다.

한 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8월 24일 오후 자택 인근에서 <제주의소리>와 만난 조 전 원장은 역설적이지만 전쟁 피난 예술인들의 영향으로 지역 예술 문화 발전이 가능했다고 기억했다. 특히 대표적으로 제주시는 계용묵, 서귀포는 김윤국을 꼽았다.

“계용묵 선생은 1950년 정부가 서울을 떠나면서 같이 피난길에 올랐다. 딸과 함께 제주에서 3년 남짓 머물렀는데, 따님이었던 계봉순이 내 집사람과 제주여고 동기동창이라 잘 알고 있다. 계용묵 선생은 제주에서 무근성 피난민촌에 머물렀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칠성로 동백다방으로 가서 하루 종일 차를 마시고 글을 썼다. …… 계용묵 선생의 문장력은 정말  뛰어났다. 나 역시 그 분의 수필 <구두>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그런데 글 만큼 강의는 잘 하지 못한 것으로 기억한다. 워낙 뛰어난 문인이기에 강의를 많이 할 수 있을 텐데 그렇지 않았다. 하나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1952년 신성여중에서 문학의 밤 행사가 열렸다. 그 중에서 문학 강좌를 선생이 맡았는데, 강의를 하다가 ‘시끄러워서 안하겠다’고 나가버렸다. 어쨌거나 그 분이 제주에 남긴 족적은 제주문학의 발판이 됐다.”

계용묵은 동백다방에 머무는 동안 양중해, 김종원, 고순하 등 제주의 20대 문학청년들과 종합교양지 <신문화(新文化)>(1952)를 창간하고, 문학동인지 <흑산호(黑珊瑚)>(1953)를 발간한다. 문학 지망생 모임 ‘별무리’ 역시 지도했다. 자연스레 계용묵에게 가르침을 받은 인물들은 제주 문학계의 1세대들로 활동한다.

계용묵 선생(앞줄 가운데)을 모시고 고영기 박철희 강통원 김성주 김종원씨(왼쪽부터)가 기념촬영을 했다. 계용묵 특집으로 꾸며진 '제주문학'31집에 실린 사진이다. ⓒ제주의소리
계용묵 선생(앞줄 가운데)을 모시고 고영기, 박철희, 강통원, 김성주, 김종원씨(왼쪽부터)가 기념촬영을 했다. 계용묵 특집으로 꾸며진 '제주문학' 31집에 실린 사진이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계용묵은 《백치 아다다》, 《별을 헨다》, 《병풍에 그린 닭이》 등으로 한국 문학계에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렇기에 제주 피난 예술인을 대표하는 상징처럼 회자되곤 한다. 조 전 원장은 계용묵처럼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윤국 역시 서귀포에 문학의 씨를 뿌렸다는 점에서 기억해야 할 인물이라고 소개한다. 피난민으로 제주에 정착해 시인이자 교사로도 활동한 김윤국은 서귀농업중학교, 서귀농림고등학교 등에서 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친 것으로 알려진다. 여기에 채필근, 홍옥순 등 여러 인물들이 서귀포에서 문화를 전파하는 데 도움을 줬다.

1951년부터 1953년까지 제주에 머무른 계용묵에 이어 박목월, 김영삼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북의 소월, 남의 목월’이라는 세간의 평가가 있을 만큼 박목월의 명성은 상당했다. 조 전 원장은 1954년 박목월이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강사로 활동하던 시절, 강의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박목월 선생은 강의를 기가 막히게 잘한다. 나긋나긋하게 듣는 이의 정서적인 면을 북돋는 데, 낭독하는 목소리에 문학소녀들이 한 눈에 반할 만큼 매력적이었다. 릴케가 쓴 ‘문학을 지망하는 청년들에게’를 가지고 강의를 진행했는데, 국어국문학과생만 듣는 게 아니고 다른 과 학생들도 몰려들어서, 교실이 아닌 강당을 빌려야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김영삼은 평양 출신으로 1.4후퇴 때 남한으로 내려와 1955년부터 57년까지 제주에 살면서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근무했다. 그는 본업뿐만 아니라 1956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문총) 제주지부를 조직하고 종합 문학지 <제주문화>(1957)을 창간하는 등 지역 예술 역량을 집결하는데도 힘을 기울였다. 

제주문인협회도 자신들의 첫 역사를 문총 제주지부로 기록하고 있다. 협회는 첫 번째 연혁으로 “김영삼 선생의 주도로 조직한 문총 제주지부의 제주문화 동호인회 발족”이라고 강조한다.

문총 제주지부 회원이 모두 141명이었는데 문학 동호인회 회원이 78명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분과 위원장은 양중해(시), 박용후(시조), 김영돈(소설), 이기형(수필), 강통원(평론), 고영일(희곡), 이봉준(아동문학), 고영기(번역), 현용준(고전), 현평효(한글), 장주근(민속) 등이다. 

<제주문화> 창간호에는 시, 논문, 수필, 소설, 아동문학, 가곡, 콩트 등이 실려 있다. 조 전 원장도 그곳에 콩트 <말복날>을 발표한 바 있다. 다만 <제주문학>은 김영삼이 제주를 떠나면서 한 권으로 명맥이 끊겼고, 문총 제주지부는 1958년 해체한 뒤 제주문학인 협회로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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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발간한 '제주문화' 1권. 이 책은 창간호로 더이상 나오지 않았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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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성운 제주도지사를 비롯해 홍정표, 양중해, 강통원, 장주근, 김영돈, 현용준, 박용후, 김용수, 현화진 등 지역 문화계 인사들의 이름이 실려있다. '제주문화'의 목차. ⓒ제주의소리

이처럼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들은 문학뿐만 아니라 각계각층을 아우르며 제주 문화를 자극했다. 제주로 피난 온 예술인들은 계용묵, 장수철, 옥파일, 김묵, 최현식, 김영삼, 문덕수(이상 문인), 이중섭, 장리석, 홍종명, 최영림, 김창열, 이대원, 최덕규, 구대일, 옥파일(이상 미술인), 김국배, 계정식, 이성재, 이성삼, 변훈, 박재훈, 김금환, 고희준(이상 음악인), 송훈, 이배정, 가칠성, 김광빈(연극·영화인) 등이 회자된다.

조 전 원장은 “피난 예술인들은 전쟁이 일어났기에 제주에 올 수 있었다. 어려웠던 시기를 지나 제주 문학에 원초적인 영향을 준 계용묵 작가, 단체를 만든 김영삼 시인 등으로 제주 문학인들이 잇달아 성장했다. 아이러니한 역사의 운명이라고도 볼 수 있다”면서 "한국전쟁 시기 제주문학을 위해 노력한 계용묵 선생을 기억하는 공간, 예컨대 '계용묵 문학관' 같은 것이 꼭 생기면 좋겠다. 생전, 선생이 머물렀던 제주시 무근성 작은 집에 소규모라도 세운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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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철 전 원장은 계용묵 작가의 제주 행적과 영향력을 정리하는 공간이 마련되길 당부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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