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동안 내 책장에 꽂혀 있던 시집
30년 동안 내 책장에 꽂혀 있던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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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詩 한 편] (55) 일생/ 이재무
30년 동안 내 책장에 꽂혀 있던 시집. ⓒ김연미
30년 동안 내 책장에 꽂혀 있던 시집. ⓒ김연미

태어나 말 배운 뒤
엄마를 반대하다가
코 밑 수염이 생겨난 뒤로
아버지를 반대하다가
신발의 문수
바꾸지 않게 된 뒤로부터
독재를 반대하다가
배 불룩 나온 뒤로부터
아내를 반대하다가
나 어느새 머리칼
하얀 중노인이 되어버렸다

-이재무, <일생> 전문-

책을 읽고 나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 제목과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작가 이름만 기억이 나는 경우가 있고, 작가의 이름도 잊고 제목도 잊었는데 내용만 또렷이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두 가지 경우의 의미를 다 파악할 필요는 없지만 내게 전자에 해당하는 경우가 이재무 시인이다. 

오래된 책들 사이에서 그의 시집을 꺼내 출간연도를 보니 1992년이다. 30년 가까운 세월을 내 책장에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있었던 것인데, 정작 나는 그런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살았다. 

일 때문에 그의 이름을 기억해 내고, 일 때문에 들른 책방에서 그의 새로 나온 시집을 발견하고 무작정 사 들었다. 중년을 넘긴 시인의 사진을 보며 집으로 돌아와 어딘지 있을 것 같은 그의 시집을 찾기 시작했다. 오래되었지만 버리지 못하는 책들 사이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하고, 그래 이거였지 하며 시집을 뽑아 들었다. 그의 이름으로 기억되는 내 젊은 날의 시간처럼 앳된 시인의 얼굴이 먼저 시선을 끌었다. 30년이라는 시간의 간극. 

누렇게 변색 되다 못해 가장자리가 검게 변한 책장을 한 장씩 넘겨본다. 

꽃과 칼이 만났다/ 칼이 꽃을 잘랐다/잘린 그 자리/ 꽃이 피었다/ 다시 칼이 꽃을 잘랐다/ 다시 꽃이 피었다/오랜 세월이 흘렀다/ 꽃의 대궁 더욱 굵어져 갔고/ 칼은 무디고 녹슬어갔다

<애증-꽃과 칼> 전문

책갈피도 없이 한쪽 귀퉁이가 접혀진 페이지에 있던 시. 우리는 매일매일 잘리는 꽃이었고, 날카로운 칼날의 아픔을 두려워하며 어서 빨리 대궁이 굵어지기를, 칼날이 무디어지고 녹슬어지기를 간절히 바랐었다. 시인의 일생 중에는 ‘신발의 문수/ 바꾸지 않게 된 뒤부터/ 독재를 반대’할 때 쓴 시편들일 것이다. 

무엇에 반대한다는 것은 현재의 자기를 무너뜨리고 미래의 나를 설계하는 것, 미래의 설계도에 맞추어 나를 더 성장시키는 것. 엄마의 세상에서 아버지의 세계로, 아버지의 세계에서 스스로 삶을 이끄는 주체가 되어 살아보자던 시간, 그 시간이 지나고 우린 스스로 설 수 있을 만큼 강해졌을까. 가족이라는 울타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사사건건 아내를 반대하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새 ‘머리칼 하얀 중노인이 되어 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시인. 

3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시인의 행적을 가늠하게 하는 시를 본다. ‘머리칼 하얀 중노인이 되어’야만 쓸 수 있는 시.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진 시인의 시세계. 그런 시편을 마주하고 밤이 깊도록 생각한다. 나는 그동안 무엇을 반대하며 살았을까...

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 산문집 <비오는 날의 오후>를 펴냈다.

젊은시조문학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오랫동안 하던 일을 그만두고 ‘글만 쓰면서 먹고 살수는 없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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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순 추천순 이 기사에 달린 댓글 1
김시현 2020-09-13 11:56:50
일상과 세월이 인생이고 노래가 된 시 멋집니다.
211.***.***.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