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은희의 예술문화이야기] 45. 제주 자연의 보편적 가치 돌아보는 세계유산축전

여전히 위협적인 코로나바이러스는 인류세의 남은 미래가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시해 주는 듯 하다. 플라이스토세, 홀로세를 거쳐 인간이 주인공을 자처하는 시대인 인류세에 접어들었다고 하나 사실은 지구를 아끼고 배려하지 않으면 인간이 주인공이 아니라 희생양이 되기도 쉽다는 교훈을 날마다 깨닫고 있다. 그뿐이랴. 갑자기 다가오는 태풍이나 몇 개월씩 산야가 불에 타고 있다는 해외의 소식은 기후위기의 징표이다. 인류세는 과연 인간을 얼마나 오래 지속가능하게 할까.

화산의 섬 제주도에서 인류세를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흥미로운 프로젝트가 막 끝났다. 제주도가 문화재청의 공모사업에 응모하여 유치한 <세계유산축전>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제주의 자연이 가진 ‘보편적 가치’를 돌아보는 축제였다. 세계유산본부가 추진하고 2018평창문화올림픽을 총연출했던 김태욱이 총감독을 맡아 제주 선흘리의 거문 오름 인근에서 전개되었다. 그리고 여러 부대행사를 통해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제주의 속살을 탐험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그 속살에 인간의 문명을 결합시키며 긴 지구의 역사 속에서 생존한 인간의 현재를 사색하게 만들었다. 

사진=양은희. ⓒ제주의소리
이승수 작가의 '태초'. 사진=양은희. ⓒ제주의소리

제주도는 태평양을 따라 발달한 ‘불의 고리’에 위치하며 플라이스토세에서 홀로세로 이어지는 동안 여러 번 분출된 용암이 형성한 화산섬이다. 고려시대에도 한라산이 화산분출을 했다는 기록이 있어서 제주도는 언젠가 다시 마그마가 솟아나올지 모르는 곳이다. 그런 제주도에서도 거문 오름 일대가 이번 축제의 장으로 선정된 것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거문 오름이 380여개의 오름, 즉 기생화산 중에서도 독특하기 때문이다. 오래전 거문 오름에서 분출된 용암이 해안가로 흘러가며 20여개의 동굴을 형성하며 화산섬의 다양한 모습을 응축해서 보여주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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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윤식 작가의 '피어오르다'. 사진=양은희. ⓒ제주의소리

<세계유산축전>은 화산이 폭발한 이후 사람들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았던 지역을 보여주기 위해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거문 오름부터 월정리 해안으로 이어지는 21km의 트래킹 코스를 새로 개척했다. 선흘리 인근의 주민들이 그 코스를 직접 다듬고 정리하여 한 명이 간신히 통과할 수 있는 길을 만든 것이다. 용암이 흘러간 지형을 따라가며 빽빽하게 찬 수풀과 잡초지, 농지가 만들어진 생태계 속에 만들어진 새 길의 이름은 ‘불의 숨길’이다. 용암이 이글거리며 흘러간 길에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리고 그 길을 다시 3개로 나누어 ‘용암의 길’, ‘동굴의 길’, 그리고 ‘돌과 새 생명의 길’이라는 이름을 붙이고서 탐방객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동안 인간의 발길을 허용하지 않았던 자연답게 등산화 없이 걸을 수 없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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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대 작가의 '환상어'. 사진=양은희. ⓒ제주의소리

이 ‘불의 숨길’ 곳곳에서 <세계유산축전>의 부대행사들이 열렸다. 필자는 그중의 하나인 <불의 숨길 아트프로젝트: 불의 기억>을 걸으며 예술가들과 함께할 수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대전에서 활동하는 기획자 유현주가 감독을 맡고, 제주와 육지에서 활동하는 작가 20명이 참가했으며, 지난 5월부터 워크샵, 현장답사 등을 거쳐 작업을 구상한 후 지난 8월부터 설치를 시작했고 드디어 9월 초 일반에 개방되었다. 

‘불의 숨길’ 21km는 아침 10시부터 저녁 6시 20분까지 점심시간을 제외하고 바지런히 걸어도 하루에 다 보기 어려운 엄청난 거리였다. 말이 길이지 사실상 곶자왈과 동굴, 빌레, 밭과 들판을 거치며 가야했기 때문에 거대한 자연 속에서 예술이라는 작은 흔적을 찾는 일종의 ‘숨은 그림 찾기’와 같았다. 인류세로 들어선 제주답게 날씨는 보슬비, 햇빛, 다시 보슬비에서 소나기까지 변화무쌍하기 그지없어서 우비를 입고 누빈 강행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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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현 작가의 '비추고 반사하다'. 사진=양은희. ⓒ제주의소리

‘용암의 길’에는 김도형, 고승현, 이승수, 김기대, 김순임, 정혜령, 서성봉, 고윤식, 부지현 작가가 작품을 설치했고, ‘동굴의 길’에는 박형필, 이연숙, 전원길, 정만영, 여상희의 작품이 설치되었으며, 마지막으로 ‘돌과 새 생명의 길’에는 하석홍, 한석경, 이응우, 여상희, 박봉기, 김도형, 강술생, 이용덕 작가의 작업이 들어섰다. 험한 장소에 재료를 나르는 일부터, 경사진 곳에서 설치를 하는 일까지 힘들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일부 작가는 다치기도 했고, 일반 전시장과 달리 많은 노동을 쏟아 부우며 몸무게가 줄기도 했다. 매일 숙소에서 출퇴근하며 고된 나날이었으나 참가자 모두 제주의 자연에 대해 경외심을 갖게 된 보람찬 시간이었다고 했다. 

사진=양은희. ⓒ제주의소리
강술생 작가의 '우후석순'. 사진=양은희. ⓒ제주의소리

그동안 자연 속에서 예술을 선보이는 전시는 종종 있었다. 특히 공주에서 열리는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는 한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사례이다. 1981년부터 공주일대에서 활동한 생태미술가들이 주도해서 만든 비엔날레이다. 이외에도 가평, 순천, 울산 등 여러 지역에서 생태를 주제로 한 프로젝트가 종종 열리곤 했다. 해외에도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자연과 대지 속으로 들어가 ‘자연’과 ‘생태’에 대한 예술적 상상력을 보여주는 작업들이 이어지고 있다. 

자연 속에서 예술을 만들 때 예술가의 태도는 기로에 서게 된다. 자연과 예술은 충돌하는가? 문명을 지키는 인간으로서 자연 속에서도 예술의 가치를 계속 유지해야할까? 아니면 인류세 이전의 지구의 시간을 존중하며 자연에 순응하는 예술을 해야 할까? 예술은 문명의 꽃이기에 그 예술에 대한 신념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의 가치를 수용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 프로젝트는 이런 고민들을 안은 작가들을 위해 두 가지 장치를 두었다. 먼저 작가들의 작업이 자연을 훼손하지 않도록 문화재청의 허락을 받은 장소에서만 설치하도록 했으며, 두 번째는 프로젝트 전시 기간이 끝나면 모든 설치물은 작가가 스스로 깨끗하게 제거해야 한다는 점을 주지시킨 것이다. 그 결과 ‘불의 숨길’ 위에 펼쳐진 작업들은 물, 돌, 나무, 동굴 등 용암이 남긴 온갖 흔적과 시간이 다듬은 지형 위에서 인간의 예의를 지키고자 애를 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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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봉 작가의 '녹색 펜스'. 사진=양은희. ⓒ제주의소리

작업들 중에는 ‘예술’의 존재감을 보이고자 금속과 아크릴, 각목과 같은 인공물을 통해 자연과 예술의 대비를 강조한 작가들도 있고 주변의 나뭇가지나, 돌과 모래를 재료로 삼아 자연에 순응한 작업들도 있다. 설치를 시작한 후 온 두 번의 태풍과 빈번하게 내리는 비에 무너져 내린 작업을 계속 보살펴야 했던 작업이 있는가 하면, 강인한 재료로 도도하게 자연의 변덕을 이겨낸 작업도 있다. 평범한 대지 위에 거대한 대나무 구조물을 살려내기도 하고, 자연의 무질서를 예술의 질서로 흡수하기도 하고, 숲속의 정령과 죽은 이들을 불러낼 것만 같은 크고 작은 설치까지 다양했다. 자연의 소리를 뚫고 숨겨진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는 소름을 돋게 만들었다. 

사진=양은희. ⓒ제주의소리
하석홍 작가의 '작업'. 사진=양은희. ⓒ제주의소리

이번 프로젝트는 수만 년간 형성된 자연에 잠시 다녀가는 인간이 만든 흔적이다. 그조차도 1개월 정도만 허용된 지극히 찰나적인 시간이다. 자연은 플라이스토세에서 홀로세로, 다시 인류세로 유구하게 흘러왔고, 앞으로 인류세가 끝난 후에도 남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번 프로젝트는 찰나적인 순간만 존재하는 인간의 모습을 닮아있다. 불꽃처럼 강렬하게 빛나다 사라지는 인간의 모습 말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 선보인 개별 작업들 중에는 다른 태도도 보인다.  자연의 모습과 속도에 맞추는 것.  

* 여기에 소개된 사진들은 모두 제주 작가의 작업들이다. 다른 작가의 작품들은 아래의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http://www.worldheritage.kr/program/program.asp?pagecode=A&fk_idx=7&search_idx=7)

필자 양은희

양은희는 제주에서 나고 자라 대학을 졸업한 후 미학, 미술사, 박물관학을 공부했으며, 뉴욕시립대(CUNY)에서 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9 인천여성미술비엔날레>, <조우: 제주도립미술관 개관 1주년 기념전>, <연접지점: 아시아가 만나다> 등의 전시를 기획했으며, 여러 미술잡지에 글을 써왔다. 뉴욕을 현대미술의 눈으로 살펴 본 『뉴욕, 아트 앤 더 시티』 (2007, 2010), 『22개 키워드로 보는 현대미술』(공저, 2017)의 저자이자 『기호학과 시각예술』(공역, 1995),『아방가르드』(1997),『개념 미술』(2007)의 번역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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