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충민의 보·받는 사람](2) 멩질 떡허는 날 찾아가본 제주 효돈초

‘강충민의 보·받는 사람’은 필자의 기억을 소환해 전하는 편지글입니다. 새하얀 편지봉투 앞면의 아래위로 ‘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칸에 볼펜을 꾹꾹 눌러 누군가와 나의 이름을 써 넣던 ‘우리 시대의 편지’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공유하게 할 새로운 코너입니다. 편지는 모바일 메신저나 인터넷 이메일로 소통하는 요즘엔 경험할 수 없는 공감의 통로입니다. 제주의소리를 통해 만나게 될 ‘강충민의 보·받는 사람’ 연재는 풀이 없어 밥풀을 이용해 편지봉투를 붙여본 적이 있는 세대들에게 바치는 연서(戀書)이기도 합니다.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가 그립습니다. / 편집자 글

멩질 떡허는 날 
오늘은 팔월대보름 추석 멩질입니다. 어제는 ‘멩질 떡허는 날’이었지요. 추석이나 설날 전날은 ‘멩질 떡허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멩질 떡 허는 날에는 서귀포 효돈, 고향 집에서 음식 준비를 합니다.

제주도 여느 집에서든 마찬가지로 멩질 전날, 떡허는 날은 다들 분주하겠지요. 올해 각시와 저는 음식의 양을 대폭 줄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아쉬운 마음에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 보면 도로 예전처럼 됩니다. 뭐 어쩔 수 없지요. 남으면 여기저기 나누어 먹으면 되고요. 그런게 멩질이니까요.

멩질 떡허는 날, 음식 준비를 끝내면 허리도 펴고 마을을 한 바퀴 돕니다. 새로 개설된 4차선 도로도 있지만, 예전부터 우리 효돈 사람들이 늘 이용하던, 지금도 이용하는 마을 길을 돌고 도는 재미가 참 좋습니다. 많은 길이 또 새롭게 나서 변해버린 곳도 있지만 그래도 제주 마을의 정취가 고스란히 남아있어서 옛날 기억도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몇 년 전부터 멩질 떡허는 날에는 제가 다녔던 효돈초등학교를 가봅니다. 사실 초등학교는 지금 위치만 그대로이고 나머지는 변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도 학교에 들어서면 여기 쯤에는 무엇이 있었는데... 하며 또 제 ‘쓰잘데기 없는’ 기억이 발동합니다. 생생하게 말이지요.

ⓒ제주의소리
제주에선 추석이나 설 전날을 '멩질 떡허는 날'로 부르기도 한다. 제주 차례상에 올라가는 기름떡(사진 왼쪽)과 송편. ⓒ제주의소리

이순신 장군 동상 세워준 일본하르방
초등학교 교문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습니다. 옆에는 거북선 모형도 같이 있습니다. 이 동상은 세워질 때부터 그 자리 그대로입니다. 동상 뒷 편과 옆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지만, 굳건하게 이순신 장군이 학교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 동상은 일본 하르방 즉 우리 효돈, 하효마을 출신 재일교포가 기증했습니다. 42년 전,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습니다.

우리 효돈초등학교는 일본하르방이 동상을 세워주기 전까지 동상이 없었습니다. 우리보다 학생 수가 훨씬 작은 옆 마을 토평초등학교나 보목초등학교에도 있는 동상이 우리에겐 없었습니다. 우리 학교 교가 끝부분 ‘천 여명 새싹들이 자라나는 곳 이름도 새로워라 우리 효돈교’의 가사처럼 학생 수는 많은데 그 당시 동상 하나 없는 것이 우리 또래 아이들에게는 꽤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때 동상을 세워준다는 이가 나타났습니다, 우리 학교에도 드디어 동상이 세워진다고 강문호 교장 선생님께서 조회시간에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의 자존심을 세워줄 사람은 바로 일본하르방이었습니다. 그분은 제 옆 반 김영0의 삼촌이기도 하며, 일본에서 큰돈을 벌었다고 했습니다. 동상 건립비용으로 80만원을 희사(그 때 어른들은 이 표현을 썼습니다.)했다고 마을에 이야기가 돌았습니다. 

그 후 구령대 뒤편으로 동상이 놓일 자리를 다지는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구령대 뒤편의 커다란 구실잣밤나무의 왼쪽 가지를 쳐낸 자리에 이순신 장군의 모습이 하루 보였습니다. 그 뒤 며칠 동안 이순신 장군 동상 전체가 하얀 천으로 뒤덮였습니다. 담임선생님이 동상 제막식 때 그 흰 천을 풀어 전교생에게 다시 공개한다고 했습니다. 

동상제막식 날엔 전교생이 모였습니다. 구령대 바로 옆으로 그 고마운 일본하르방이 인자한 미소를 띄며 특별한 분만 앉는 가죽의자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 앞에 언뜻 교장실에서 봤던 것과 비슷한 탁자도 놓여있었습니다. 교장선생님께서는 일본하르방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길게 전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효돈교 어린이들은 고마운 마음을 잊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는 것으로 보답하라고 했습니다. 백합꽃이 고개를 쑥 내민 꽃다발이 전달되었습니다. 

일본하르방이 구령대로 올랐습니다. 그때 음성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일본에서도 늘 고향을 그리워했다, 그래서 고향을 위해 언젠가 도움이 될 수 있게 열심히 일했다. 지금 고향의 초등학교, 어린 후배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서 너무 기쁘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드디어 동상의 하얀 천이 벗겨졌고, 위풍당당한 이순신 장군이 우리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학교에서도 중요한 동상제막식을 위해 여러모로 많은 프로그램을 준비했습니다. 교가 제창 때에는 우리 학교 합주부가 합주복이라고 부르던 유니폼을 잘 차려입고 교가를 연주했습니다. 

제주 효돈초 교정에 세워진 이순신 동상(빨간 원 안). 효돈초 어린이들이 운동장을 함께 뛰는 모습.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 효돈초 교정에 세워진 이순신 동상(빨간 원 안). 효돈초 어린이들이 운동장을 함께 뛰는 모습.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또 운동장 한가운데, 헝겊으로 씌워진 매트를 깔고, 나무 기둥으로 만든 평균대가 놓여졌습니다. 기계체조부의 시범이었습니다. 기계체조부, 여자는 까만 팬티스타킹이 하의, 달라붙는 나일론 소재의 상의였습니다. 남자는 하얀색 면 체육복 하의, 하얀 민소매 런닝이 상의였습니다. 그렇게 체조복을 입은 기계체조부의 시범에 아이들이 더 신났습니다. 

옆 반, 현영0의 일본하르방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글 순서도 있었습니다. 그동안 우리 학교에만 동상이 없어서 아쉬웠다, 그 아쉬움을 해결해줘서 고맙다, 그 은혜에 잊지 않고 열심히 공부해서 보답하겠다... 정성껏 마음을 담은 내용이었습니다.

약 1950년부터 1990년대까지 생산됐던 일본 연필에는 국가표준 규격 품질표시를 인증하는 'JIS(Japanese Industrial Standards)' 마크가 붙어 있었다. 재일교포들이 보내준 당시의 연필엔 이 표시가 붙어 있어 이를 기억하는 이들이 제법 될테다. ⓒ제주의소리
약 1950년부터 1990년대까지 생산됐던 일본의 각종 제품에 표시된 국가표준 규격 품질 인증 'JIS(Japanese Industrial Standards)' 마크

그렇게 동상제막식은 끝났습니다. 그 날 수업은 없었습니다. 전교생은 뒷부분에 JIS(일본품질표시마크) 표시가 된 일본 연필 두 자루씩 선물로 받았습니다. 다음 날 그 받은 연필을 학교에 갖고 와서 쓰는 아이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일본 연필은 다들 아껴 썼습니다. 저 역시도요. 

멩질 때 소포 보내주던 우리 일본할망
저에게는 일본할망이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어머니의 고모이니까, 저에게는 고모할머니이지요. 멩질 때가 되기 전, 일본할망은 일본에서 소포를 보냈습니다. 태흥리 외삼촌집이나, 이모집으로 보내면, 받은 소포의 물건을 개봉해서 서로 나누어 갖는 것이었습니다. 

초등학교 1, 2학년 무렵 소포가 도착한 날 어머니를 따라 태흥리에 간 적이 몇 번 있습니다. 보낸 양이 참 많았습니다. 종류도 다양했습니다. 커다란 네슬레 가루커피가 있었고, 전지분유가 있었고, 조미료가 있었습니다. 옷가지와 신발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옷가지 중에는 무릎이 뚫려 있거나, 고무밴드가 없는 바지, 소매 부분이 다 닳아진 점퍼처럼 온전하지 못한 것도 많았습니다. 

/ 이미지 출처 = https://m.blog.naver.com/luna275/221349698731
약 1950년부터 1990년대까지 생산됐던 일본 연필에는 국가표준 규격 품질표시를 인증하는 'JIS(Japanese Industrial Standards)' 마크(빨깐 원)가 붙어 있었다. 재일교포들이 보내준 당시의 연필엔 이 표시가 붙어 있어 이를 기억하는 이들이 제법 될테다. / 이미지 출처 = https://m.blog.naver.com/luna275/221349698731

어머니는 이런 소포의 옷을 받으면 미싱으로 헤진 부분을 덧대고 박고, 고무줄을 새로 넣었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옷을 입으면 우리 남매는 마냥 좋았습니다. 일 년 해야 기껏 한두 번 새 옷 구경할까 말까 하던 시절에 일본할망이 보내온 좀 터진 것, 좀 헤진 것 이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옷을 입고 동네 올레에서 “일본 할망이 보내준 옷”이라고 자랑했습니다. 일본 전지분유를 물에 타서 마시면 달달함과 부드러움이 오래오래 입안에 남았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늘 돈 많은 일본할망을 부러워했습니다. 참 철딱서니 없었지요. 일본할망의 일본에서의 삶이 어쩌면 이곳 제주보다 더 고단했다는 건 아주 오래 뒤에 알았습니다.

일본할망도 참 고향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어머니를 비롯한 외삼촌, 이모 당신의 조카를 참 살뜰히 챙겼습니다. 멩질이 다가올 즈음이면 어김없이 소포를 보내왔고 그 소포를 받고 돌아오면서, 어머니는 태흥리에서 우리 집으로 오는 일주도로 버스에서 쉬지 않고 울었습니다. 말이 쉽지 그 고단한 일본에서의 삶 속에서, 때마다 소포를 보내는 게 보통 정성이었을까요.

이 추석에 일본할망, 일본하르방을 기억해보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일본할망,하르방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있습니다. 

그런데 일부 사례이긴 합니다만 이런 우리들의 일본할망,하르방에게 재일동포간첩, 유학생간첩단이라고 하여 참 나쁘게 했습니다.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늘 마음속에 고향을 그리워하고, 어떻게 하면 고향을 도울 수 있을까, 두고 온 가족을 도울까 하던 할망,하르방에게 못된 짓을 했습니다. 피눈물 나게요. 

부끄럽습니다. 다음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오늘은 추석입니다. 여러분이 이 편지를 받을 때면 추석날 차례를 지내놓고 수다를 떨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여유로운 거리 두기로 집에서 쉬고 있을지도요. 추석 멩질입니다. 맛있는 음식 많이 드시고, 멩질 잘 보내십서예~

2020년 10월 1일 강충민 올림

강충민 시민기자는? 

제주의소리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글을 써왔습니다. 제주참여환경연대에서 이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제주참여환경연대에서는 건강한 제주의 미래를 같이 고민하고 참여할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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