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시선] 김헌범 논설위원·제주한라대 교수

‘소리 시선(視線)’은 [제주의소리] 입장과 지향점을 녹여낸 칼럼입니다. 논설위원들이 쓰는 ‘사설(社說)’ 성격의 칼럼으로 매주 수요일 정기적으로 독자들을 찾아 갑니다. 매주 수요일 외에도 시시각각 벌어지는 주요 이슈에 대해선 비정기적으로 싣습니다.

모든 사람은 법 앞에 정말로 평등한 것일까

칼레의 시민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의미한다. 본래 19세기 왕정시대 프랑스에서 유래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불과 20년 전만해도 우리에게 생소했지만 지금은 우리 표준어사전에 공식적으로 오를 정도로 친숙한 말이 됐다. 그만큼 민주화가 정착되면서 사회상류층에 대한 민초들의 사회적 위치와 마음가짐이 달라졌음을 반영하는 지표인 것이다. 하지만 본래 엄격한 신분제의 산물이며 귀족문화를 미화하는데 사용됐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지위와 신분의 높고 낮음을 전제하는 것임을 감안하면, 이것이 민주화 시대에 부각되는 것은 아이러니일 것이다. 

19세기 후반 근대국가 격변기의 한복판을 관통하는 삶을 살았던 세계적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표방한 대표적 작품인 ‘칼레의 시민’에서 신분제적 시각을 거부하고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한 진정한 영웅을 국왕이나 귀족들이 아닌 평범한 시민들로 표현하고 있다. 서구의 전통적인 영웅이 고귀한 신분으로서 공동체를 위한 담대한 자기희생 정신과 죽음을 불사하는 초인적인 용기를 보여준다면, 로뎅의 동상에 새겨진 6인의 시민들은 모두 우리와 마찬가지로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극복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보통 사람들이다.  

왕자의 전쟁

현대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사례로 흔히 거론되는 것은 1982년 포클랜드 전쟁일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섬에 대한 영유권을 둘러싸고 영국과 아르헨티나 간에 벌어졌던 이 전쟁에서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셋째 아들인 앤드류 왕자는 헬리콥터 조종사로 참가해 전투와 수색구조의 임무를 수행했다. 당시 한국의 주력 언론들은 영국 왕자가 국가적 위기 앞에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 솔선수범한 미담으로 칭송했지만, 세계의 유수 언론들의 해석은 달랐다. 이 전쟁은 시대가 변화했어도 여전히 제국주의적 습성을 버리지 못한 영국이 자국에서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아르헨티나 근해의 작은 섬을 자국의 영토라고 우기면서 벌어진 분쟁이었다.  

국제적으로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한 전쟁이었지만, 영국왕실이 국난으로 선언하고 직접 참전을 결정한 것은 입헌군주제로 인해 국왕의 권한과 역할이 유명무실해진 상황에서 국민들에게 존재감을 부각하기 위한 것이 실제 이유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국세로 운영되는 왕실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하릴없이 밥값만 축낸다는 여론의 비판을 모면하기 위한 것이었다. 민주시대의 영국에서 노블레스는 특권은 대부분 상실하고 일반국민에 비해 도덕적 책임을 추가로 떠안고 있다. 옥스퍼드 사전에서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 약자를 배려하고 자선을 베풀어야 할 책임”으로 정의되고 있다.   

출처=오마이뉴스.
2008년 1월 22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2016년 사망)의 회고록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당시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맨 왼쪽부터), 방 회장 부인 이선영씨, 방우영 명예회장, 전두환 전 대통령. / 사진제공=오마이뉴스.

노블레스의 왕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대사를 위해 누군가 먼저 나서야 할 순간에 영국왕실이 과감히 특권을 포기하고 앞장섰던 정신만은 높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노블레스’(특권)는 있어도 ‘오블리주’(책임)는 없는 우리의 현재 상황에서 보면 특히 그렇다. 우리 헌법도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며, 사회적 특수계급제도는 인정하지 아니한다”고 명시한다. 그러나 우리사회에 실질적인 노블레스 계층이 엄연히 존재함을 심정적으로는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보통사람의 시대에 보통사람은 감히 범접하지 못하는 권력을 백두혈통만이 대를 이어 세습하는 행태는 봉건시대의 엄격한 신분제를 방불케 한다. 

국회의원은 물론 대통령이나 장관은 노블레스에는 끼지 못할 것이다. 대통령 아들이 취업문제로 곤혹을 치루거나 장관 아들이 단 며칠간의 병가문제로 시달리는 것이 단적으로 입증한다. 하지만 재벌들과 언론사 사주들의 가족들 대부분이 병역 면제를 받은 사실에는 우리 언론들이 기사로 다룬 것을 본 적이 없다. 우리사회의 진정한 노블레스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일 것이다. 노블레스의 특권은 비단 자신들의 영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지난 정권에서는 어느 재벌이 공기업의 인사에까지 개입한 정황이 드러나기도 했다. 재벌을 “왕국”이라거나 유력 언론의 사주를 “밤의 대통령”으로 부르는 것은 이제 우스개 농담이 아닌 것이다.

적폐청산의 이유

얼마 전 “S사의 눈으로 세상을 보겠습니다”라는 어느 중진 언론인의 충성 맹세문이 드러나 논란이 된 바 있다. 언론들의 생명줄인 광고 수입의 최대 원천인 노블레스에 대한 우리 언론들의 굴종적인 역학관계를 잘 보여준다. “시장(市場)은 이미 정부의 손을 떠났다”는 20년 전 어느 대통령의 한숨이 있었지만, 이제 노블레스는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언론의 손마저 떠난 것이다. 하지만 노블레스들의 성역을 만드는 것은 언론들만이 아닐 터, 정치계는 물론이고 법조계와 학계, 그리고 문화계 등 거의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다.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의식이 여론이나 지식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들에게 주입됨으로써 노블레스라는 성역이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김 모 문화일보 광고국장은 2016년 3월 “문화일보, 그동안 삼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왔습니다. 앞으로도 물론이고요. 도와주십시오. 저희는 혈맹입니다”라는 내용의 문자를 장충기 전 미래전략실 차장(사장)에게 보냈다. 출처=MBC 화면

화두(話頭)로 돌아가자. 신분사회가 아닌 민주사회이면서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회자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극한적인 경쟁 구조에서 빈부 격차와 불평등이 심화됨에도 불구하고 로댕의 조각에서 강조하는 건강한 시민정신이 특권층은 물론 우리 자신에게도 부족한 탓이 아닐까. 수천억, 수조 원을 포탈하거나 횡령한 재벌들은 모두 집행유예로 풀려나 노블레스로 숭앙받고 있는 반면에, 단 오천 원 어치의 편의점 빵을 훔쳐 먹은 어느 생계형 절도범은 실형을 받아 징역을 사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나 수많은 억울한 ‘장발장’들이 속출하는 데는 법치 대신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지배하는 재판부의 현실만이 아니라 부조리에 분노하면서도 앞에 나서지 않는 우리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을 것이다. 

진짜 ‘노블레스 오블리주’

몇 년 전 송파구 세 모녀가 생활비와 병원비로 진 빚 때문에 동반 자살하는 가슴 아픈 사건이 있었다. 그들의 주검 옆에는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쓴 유서와 함께 70만원이 들어있는 봉투가 놓여 있었다. 진정한 노블레스들은 언제까지 힘들게만 살아야 할까. / 김헌범 논설위원, 제주한라대 교수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