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주년, 한국전쟁과 제주] (11) 1950년 제주신보 기사 속 한국전쟁과 제주

한반도가 한국전쟁 폐허로부터 다시 일어선지 70년이 흘렀습니다. 물론 제주는 한반도 최남단이라는 지리적 환경으로 6.25의 직접 피해지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같은 환경은 6.25 전란 기간 동안 한국전쟁과 연관된 시설·기관들은 물론, 육지부의 피난민과 전쟁 포로들까지 대거 제주로 집중하게 하는 요인이 됐습니다. 4.3이라는 현대사의 비극을 치르고 있던 당시의 제주사회는 한국전쟁으로 유사 이래 정치·군사·외교뿐만 아니라 가장 큰 지역사회 격변까지 경험하게 됩니다. [제주의소리]가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전쟁기 육지에서 제주로 피난이 이뤄지는 과정과, 정부와 군에서 제주도를 적극 활용하면서 남긴 ‘사람과 장소’들을 재조명해보는 [70주년, 한국전쟁과 제주] 기획을 연재합니다. 전쟁의 실상과 전후의 변화상을 살펴보는 이번 기획을 통해 한국전쟁기의 제주역사는 물론 제주인들의 삶을 되돌아봄으로서 ‘항구적 평화’의 중요성을 미래세대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글] 

“저가 나가버리면 어머니와 눈 먼 누나만 남겠습니다. 가슴이 찢어질 듯 합니다. 그러나 나라냐, 집이냐는 다시 생각할 것 없겠습니다. 이 약한 몸으로 괴뢰를 하나라도 없앨 수 있다면 이런 기쁨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북한의 침략에 맞서 전쟁터로 향하는 학도병의 절실한 마음이 묻어난다. 가족을 두고 전선으로 떠나야 하는 슬픔과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겠다는 굳센 다짐이 함께 담겨있다. 이 사연은 1950년 8월 1일 <제주신보>에 소개된 ‘한중생 125명 출전 지원’ 기사에 등장한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까지, 한국전쟁 기간 동안 제주에서는 신문 <제주신보>가 전쟁 소식을 도민들에게 들려줬다. 지면에는 시시각각 달라지는 전황부터, 전쟁통 제주 안에서의 소식까지 빼곡하게 실렸다. 

다만 1950년 기록은 8월 1일부터 남아있는 것으로 보여, 전쟁 발발 직전·직후 소식은 찾아볼 수 없다. 국립중앙도서관은 1947년 1월 1일 138호부터 1948년 4월 20일 328호까지 <제주신보>를 보관해 온라인으로도 제공하고 있지만, 1949년과 1950년 기록은 보관하고 있지 않다. 제주에서는 그나마 제주도서관이 1953년 11월 3일부터 1959년 12월 31일까지 복사본을 가지고 있어 전자책으로 서비스 하고 있다.

한국전쟁 발발 시기와 가장 가까운 <제주신보> 기록은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가 2002년 ‘제주4.3사건 자료집’을 제작하면서 참고 자료로 남긴 복사 인쇄본이 사실상 유일하다. 1950년 8월 1일부터 시작하기에 6월 25일 당시 소식은 확인할 길이 막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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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8월 1일 '제주신보' 1면. ⓒ제주의소리

이와 관련해 참고할 기록이 있는데, 서울 지역에서 발행했던 <연합신문>(聯合新聞)의 1950년 6월23일자 신문이다. 당시 신문에는 짧은 기사가 등록돼 있는데 ‘제주신보에 휴간령’이라는 제목이다.

기사에는 ‘제주신보는 6월14일부로 당해도지사의 지시에 의하여 휴간을 당하였다 한다’고 보도한다. 이어 ‘그런데 등(제주)신보는 경영주의 명의 변경을 하기 위해 당국에 수속 서류를 제출한 바 있었는데, 도지사는 경영주가 적임자가 못된다는 이유로 휴간 명령을 내린 것이라 한다’고 적어 놨다. 한국전쟁을 코앞에 둔 시점을 고려할 때, 제주신보가 한국전쟁 당시 발행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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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3일자 '연합신문' 속 제주신보 관련 기사. ⓒ제주의소리

# 전황에 촉각 곤두세워

1950년 8월 1일 화요일자 <제주신보>의 1면은 미국 워싱톤D.C 발 '미증원해병사단등 / 금명간한국에 상륙'이란 제목의 기사로 시작한다.

1950년 8월은 북한의 공세가 이어지면서 낙동강 경계 방어선을 구축하는 시점으로 알려진다. <제주신보> 역시 이런 분위기를 감안하듯 '전선을 사수하라'는 미 8군사령관의 명령을 실었다.

뿐만 아니라 영국 노동당 애틀리 총리의 발언(공당 한국 침략은 세계적 음모 일환)도 사진과 함께 1면에 담았다. '환영 UN정의군'이라는 하단 광고도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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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8월 1일 '제주신보' 1면 기사. ⓒ제주의소리

2면은 '폭발한 애국의 지성! / 붓을 침으로 바꿔잡자 / 한중생 125명 출전 지원'이란 기사로 채웠다. 한중생은 제주 읍내 중학생이 모인 ‘제주도 학도돌격대’로 보인다.

기사는 125명 이름을 모두 새기면서 사연까지 자세히 소개했다. 기사 첫 문장에서 ‘온 겨레가 뚫어나가야 할 위기에 놓여있는 조국’이란 표현은 당시 체감했던 위기의식을 짐작하게 만든다. 

▲조부원수 갚겠다 ▲형과 같이 싸우는 기쁨 ▲어리다고 못갑니까 ▲나타의 아들들 ▲붓을 총으로 같은 제목에서 분위기가 읽혀진다.

이 가운데 ‘조부원수 갚겠다’는 참전 용사의 할아버지가 ‘4.3사건 당시 입초섰다가 폭도의 흉기에 피살되었다. 하루 빨리 보내주길 원합니다. 나는 반드시 내손으로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야 말겠습니다. 이것이 또한 곧 나라에 바치는 충성이라고 믿습니다’라는 안타까운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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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8월 1일 '제주신보' 2면 기사.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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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도돌격대 용사들의 사연이 실려있다. ⓒ제주의소리

8월 5일자 신문에는 ‘신병 입영식 거행 / 모슬포 5일, 성내 6일’이란 기사를 실었다. 이날은 제주도민들로 꾸려진 해병대 3기생이 입대하는 날이다.

기사 제목을 보면 ‘해병대 사령부에서는 본 도민의 열성…’이라는 문장도 눈에 띈다. 이어 ‘학도 출정 지원자 성명’으로 제주농중, 제중, 서귀농중, 성산수중, 한림중 학생들의 이름을 명기했다.

학도병들의 참전 소식은 8월 17일에도 확인할 수 있다.  

'출전학도장행회 / 제주농중서 성황'의 기사에는 '제주농중에서는 금번 OO사단 소속으로 출정하게 되는 동교출신 팔십여명의 학도자원병에 대한 무운장구와 그 장행을 격려하기 위한 출정학도 환송식을 지난 16일 하오 3시부터 등교 강동에서 성대히 개최'라고 보도한다.

특히, 명단 전체를 소개하면서 '돌격대'라는 표현을 더했는데, 가족의 품을 떠나 최전선으로 향했을 학생 용사들을 생각하면 착잡한 감정이 드는 단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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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 입영 소식이 실린 1950년 8월 5일 제주신보. ⓒ제주의소리
학도병 출전 소식을 알린 1950년 8월 17일 제주신보 기사. ⓒ제주의소리

# 전쟁을 대하는 제주도민들

<제주신보>는 후방에서 아군을 응원하는 도민들의 소식도 함께 실었다. 

9월 10일자 신문에는 ‘내 몸 대신 보내자 전성에 위문품을’이란 문구가 등장했다. 이와 같은 캠페인성 문구는 이후에도 꾸준히 지면에 노출됐다.

9월 12일자 신문에는 ‘이장군수!! 호명 / 전승위해 총진군 / 군관민 연석회각 세결의표명’이란 제목의 기사가 비중 있게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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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12일 제주신보 기사. ⓒ제주의소리

# 달라진 전황, 기대감도

전세를 뒤바꾼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은 다음 날과 17일 잇달아 비중있게 소개된다.

16일 1면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한 기사는 '서울 탈환 목첩 / 아 정예OO부대 인천에 돌입 / 목하 김포 방면을 완전제압'이다.

다음 날도 ‘맥UN 총사령관 직접 지휘 / 한미 정예부대에 개가 / 남북 협격코 섬멸개시 / 남침 괴뢰 삼십만 어디로?’라는 격정적인 제목으로 시작한다. 맥아더 장군 사진도 함께 실었다.

21일 자 신문 하단 광고에는 <서울입성의 노래>가 실렸고, 10월 8일에도 <새나라 세우자>는 노래가 등장하는 등 인천상륙작전을 기점으로 이전과는 달라진 분위기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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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16일 제주신보 기사. 인천상륙작전 소식을 소개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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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17일 제주신보 기사. 맥아더 장군 사진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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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이후 제주신보에 실린 '서울입성의 노래'(왼쪽)과 '새나라의 세우자'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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