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시선] ‘말로만’ 그만…스스로 무겁게 받아들여야

원희룡 지사 다웠다. 누구보다 언론의 생리를 잘 알고, 이벤트에도 능한 그였다.

‘전국적으로 뜨고 싶은’ 원 지사로서는 극적인 효과를 노렸을 것이다. 날씨까지 받쳐줬다. 화창한 일요일 오전 송악산 앞. 전쟁과 학살, 개발의 상흔이 중첩돼있는 송악산은, 난개발에 마침표를 찍겠다는 선언 장소로는 제격이었다. 

송악산이 어딘가. 1980년대말 군사기지 건설 논란은 굳이 돌이킬 필요도 없다. 개발의 역사로만 봐도 30년 가까이 광풍이 잘 날 없던 대표적인 핫 플레이스였다. 바로 이곳에서 다음세대를 위해 청정 제주를 지키겠다고 약속했으니 언론의 주목을 받지않는게 이상했다.

선언문의 첫 마디부터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대권 도전자로서 ‘영역 확장’을 꾀하는 듯 했다. 어찌보면 당연한 얘기였다. 제주 자연을 ‘모든 국민’이 누릴 소중한 자산으로 규정했다. 또 청정과 공존은 제주도민이 선택한 양보할 수 없는 헌법적 가치로 승화시켰다. 

알다시피 청정과 공존은 원희룡 도정이 ‘채택’한 제주의 핵심 가치다. 사실 제주 자체의 가치는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가 다를 뿐이다. 다소 생경하게 다가온 표현들이 좀 더 일찍 나왔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뜨고 싶은 욕망이 앞섰는지 촌극도 빚어졌다. 국방부 소유인 알뜨르비행장 부지 양여 문제를 묻는 주민에게 원 지사는 그만(?) 이렇게 말해버렸다. 

“나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주면 바로 넘길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의 야욕으로 건설된 알뜨르비행장은, 지역 주민들이 노역에 강제 동원된 뼈아픈 수탈의 현장이다. 지금도 일대 주민들에겐 민감한 사안일 수 밖에 없다.  질문한 주민은 원 지사가 ‘잿밥’을 더 중시하는 것으로 여겼을 수 있다. 결국 원 지사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그럼에도 난개발과 결별을 고한 이날 원 지사의 현장 기자회견은 나름 의미가 있다고 본다. 앞으로 그런 기조를 유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설령 그게 이벤트성이 짙다고 해도 나쁘게 볼 일만은 아니다. 선출직 지자체장의 행위는 본디 정치적이다. 솔직히 과거 도정에선 도백이 개발 혹은 보전에 관한 속내를 내보이는 일 조차 없었다. 문제는 선언을 뒷받침할 구체적인 이행 방안이다.  

알맹이가 부족한게 못내 아쉬웠다. 

원칙 이상의 무엇을 내놓기가 께름칙했을 것이다. 개별 사업의 ‘운명’을 예고하자니, 정해진 법적 절차도 있고, 월권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해야 하는 정책결정권자의 고충이 느껴진다. 

이런 점에서 ‘송악 선언’은 애초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최대 개발사업이자 갈등 현안인 제2공항이 빠진 것에 대해 시민사회는 빈수레만 요란했다고 까지 혹평했다. 

구체적으로 원 지사가 언급한 개발사업은 6가지였다. 송악산(뉴오션타운), 중문 주상절리(부영호텔), 오라관광단지, 녹지국제병원(영리병원), 동물테마파크, 비자림로 확장이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뉴오션타운은 사실상 추진이 어려워졌다. 도의회 초유의 환경영향평가 부동의 때문이다. 부영호텔은 대법원이 사망선고를 내렸다. 오라단지는 자본검증에 발목이 잡혔다. 영리병원도 1심 재판부가 제주도의 손을 들어줬다. 

‘송악 선언’은 이 단계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비자림로는 오히려 강행 입장을 내비쳤다. 다만, 진전된 내용이라면 동물테마파크에 대해 신중하게 접근하겠다고 한 대목이다. 불허를 시사한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었다, 내용만 장황했다, 난개발 우려를 해소할 마침표가 없었다…. 시민단체들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했지만 미묘한 온도차가 느껴졌다. 

[그래픽이미지=김찬우 기자] ⓒ제주의소리
원희룡 제주도지사가 지난 26일 오전 11시 송악산에서 '청정제주 송악선언' 선언문을 발표하고 있다(아래). 현장에는 송악산 개발 반대 단체 회원들도 참석, 유원지 지정 해제 등을 요구하는 피켓시위를 벌였다. [그래픽이미지=김찬우 기자] ⓒ제주의소리

“이번 선언은 제주도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나름대로 짚어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전체적인 밑그림만 제시했을 뿐 선언 이행과 구체적인 방안은 담겨있지 않아 말로만 그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표명한 제주환경운동연합의 논평이 눈에 띄었다. 역시 문제는 실천인가 보다. 

유독 드러내길 좋아하는 원 지사다. 6년여 전 쫓기듯 귀향해 관덕정 광장에 설 때도 그랬다. 그 자리에서 원 지사는 “제주를 바꾸고, 그 힘으로 대한민국을 바꾸겠다”고 선언했다. 선언이 얼마나 이행됐는지는 도민 판단에 맡기겠다. 

항상 시작은 창대해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도자의 공언은 훗날 자신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송악 선언’을 원 지사 스스로 무겁게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이다. <논설주간 /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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