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러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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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호의 짧은 글, 긴 생각] 첫 번째
시간이 지날수록 제주다움의 가치는 더욱 빛난다. 제주출신의 공학자, 이문호 전북대학교 초빙교수가 <제주의소리> 독자들과 만난다. 제주다움과 고향에 대한 깊은 성찰까지 필자의 제언을 ‘짧은 글, 긴 생각’ 코너를 통해 만나본다. / 편집자 주

“설러부러, 이 나이에 무슨 고시(高試) 본다고 책상에 붙박이 되 멍 살아, 다른 정년 교수네처럼 운동도 하고 맛있는 거 먹고. 돈이 어서, 논문이 어서, 이름이 어서?”

같이 늙어가는 마누라의 잔소리 성화 대목이다. 아침부터 우리 집엔 성산포 2공항을 ‘하느냐’, ‘설러부러’라고 고향 사람들이 논쟁(論爭) 하는 것과 똑같은 분위기다. 몇 십 년을 더 살려고 공부(工夫)하느냐고 이렇게 결론을 맺는 게 다반사. 허긴 창문 건너 불타는 건지산 단풍을 몇 번 더 볼 것인가? 혼자 생각하며 건지산 도서관 연구실로 간다.

그러면 제주 사투리에서 많이 쓰이는 ‘설러부러’는 어디서 온 말인가?

박경리의 소설 <토지>를 보면 경상도 지방 사투리 ‘막설(莫說)’에 대한 말이 나온다. 莫은 없음, 불가의 막. 說은 의견, 견해의 설. 이런 뜻에서 합성어로 풀이됐다. ‘말을 그만둠. 혹은 하던 일을 그만둠’이란 의미로 쓰였다.

···아, 아이새끼를 죽게 처박아둔 순악종인께 막설할라 카믄 진작 하는 기라. 새끼들이 불쌍치마는 그런 에미 있이나마나, 애새끼들보다 석이아매가 거무겉이 돼가지고 손주새끼 따문에 우는 거는 차마 못 보겄더마.
- <토지> 9권 가운데 일부.

윤흥길의 소설에도 등장한다.

“알았다, 알았어.…네가 이 어미 말 듣고 일판 꾸미는 자식이더냐.” 늘 상 하던 버릇으로 눈자위가 또 허옇게 뒤집히려는 아들을 보고 운암 댁은 황망히 ‘막설’을 했다.  
- 윤흥길의 소설 <완장> 가운데 일부.

과장의 호통으로 회람이 몰고 온 제복 소동은 비로소 ‘막설’이 되었다. 
- 윤흥길의 소설 <날개 또는 수갑> 가운데 일부.

개인적으로 막설(莫說)에 대응해서 설러불다(說風)는 ‘설(說)’과 바람(風)이 ‘불다’의 합성어로 본다. 이유인즉, 바람 많은 제주 지방의 언어는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게 경상도 지방과 다른 특징을 갖는다. 말이나 하던 일이 바람처럼 날라 간다는 뜻. 즉 ‘말을 그만둠’, ‘하던 일을 그만둠’이다. 

한 예로 가수 혜은이의 노래 <감수광>의 한 구절, ‘설릉사랑 보낸시엥 가거들랑 혼조옵서예’에서 ‘너 그 애랑 헤어졌냐?’는 ‘너 가이영 설러부런?’ 또는 ‘너 가이영 설른거가?’로 말한다. 제주 사람의 말(語)과 바람(風) 과의 관계를 볼 수있다.

다만, 한국어대사전을 보면, 제주 자연 환경인 바람이 언어 관습에 미친 영향까지는 고려가 안 되어 있다.

출처=김종성, 오마이뉴스.
바람 많은 제주 지방의 언어는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게 경상도 지방과 다른 특징을 갖는다. 말이나 하던 일이 바람처럼 날라 간다는 뜻. 출처=김종성, 오마이뉴스.

설러불지 못하고 책상에 매달리는 서생(書生). 세상 살면서 기 백번(?) 시험을 본 선수인데 나이가 들어선지 기억력이 떨어지는 거는 어쩔 수 없는 일. 그 기억이 가느다란 실마리를 붙잡고 연상(聯想)과 내 자신이 학문(硏究)에 몰입(沒入)하는 것이다. 그 기쁨이 있지 않은가?

공부를 ‘설러불지’ 못하는 이유다. 불타는 단풍의 향(香)이 설록차 잔에 타고, 바람에 날라가는 날 아침이다. 

# 이문호 교수는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서광리 출신으로 일본 동경대 전자과(1990), 전남대 전기과(1984)에서 공학박사를 각각 받고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서 포스트닥(1985) 과정을 밟았다. 이후 캐나다 Concordia대학, 호주 RMIT대학, 독일 뮌헨대학 등에서 연구교수를 지냈다. 1970년대는 제주 남양 MBC 기술부 송신소장을 역임했고 1980년부터 전북대 전자 공학부교수,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7년 이달의 과학자상, 해동 정보통신 학술대상, 한국통신학회, 대한전자공학회 논문상, 2013년 제주-전북도 문화상(학술)을 수상했고 2015년 국가연구개발 100선에 선정됐다.

현재 감귤과 커피나무 유전자 DNA 결합을 후성유전자 현상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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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호 2020-11-03 09:10:13
가시리의 설룬님 보내오니 가시는듯 도셔오소서,
제주사투리 설른님이뿌리가아난가?
1.***.***.170

이문호 2020-11-02 20:01:29
유선생님고향에는 설러불라 같은 말이 없나요.
1.***.***.170

유만형 2020-11-02 19:20:53
* 사투리란 말이 어느 순간에 고유어란 단어로 바뀌어 고품격의 언어가 되었다. 지역별로 고유 특성이 포함된 쉽고 빠르게 의사전달하는 수단과 서로간의 정감어린 마음이 스며 들어 나온 구수한 언어라고 봐야 한다. 막설=설러부러=stop=멈춤=그만둠. 그 지역에서 자라면서 어릴때 부터 수없아 많이 들어 귀에 익숙한 단어가 아니면 참으로 이해하기가 난해함 점이 없지않아 있다. 말이란 상호간의 의사 소통의 수단으로 뜻하는 바를 잘 전달하면 그 목적을 달성했다고 본다. 화려한 수식어도 필요없고 그져 시골 동네에서 속 정이 통하는 말이면 뭐라도 다 좋다. 고유어에 대한 연구가 이제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어 이 시대의 흐름을 읽을 수있다. 서울에서 쓰는 말이 표준어라고 하는데 지방화 시대에 토속어가 그 지역 특성이다.
175.***.***.119


속 마음을 감추는 아름다운 말 같기도.. 2020-11-02 15:26:30
莫은 없음, 불가의 막. 說은 의견, 그런것이라면..
심연에 잠겨있는 하고픈 말이 있지만 감추고픈.. 미련 남았어도 미처 하지 못한..
또는 붙잡고 싶으나... 매달리지 못하는 마음을 그린 말 아닐까요?
1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