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58) 나, 떠나가야 하기에/ 박흥순

길을 떠나는 낙엽. ⓒ김연미
길을 떠나는 낙엽. ⓒ김연미

노란 봄배추 꽃에게 말하지 않겠네
청초함 사랑 했노라고
설 킨 생 살아가는 담쟁이에게도 말하지 않겠네
끈질긴 생명력 사랑 했노라고
하늘미나리에게도 말하지 않겠네
물 갈망하던 그대 사랑했노라고
늙어 휘어진 감나무에게 말하지 않겠네
그대 참으로 사랑 했었노라고
구름 머물던 향나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네
은은한 그대에게 사랑 보냈노라고
늘 푸르던 소나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네
변치 않은 그대 사랑 했노라고
먼동 물고 오던 새들에게도 말하지 못하겠네
아침 노래 진정 사랑 했노라고
그대들 거기 그대로 있기에 
떠나가는 나는, 
눈시울만 촉촉이 적신다네

-박흥순, <나, 떠나가야 하기에> 전문-

한 사람이 떠나갔다. 나는 그녀를 알지도, 이름을 기억하지도 못한다. 그녀는 B씨다. 그녀는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혼자 A씨의 칼에 찔려 쓰러졌다. 유유히 가방을 챙기고 피묻은 흉기를 들고 사무실을 나서는 A씨의 모습은 B씨인 그녀가 이 세상에서 본 마지막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사랑했던 ‘노란 봄 배추 꽃’, 아무리 걷어내도 꿋꿋하게 ‘설킨 생 살아가는 담쟁이’, 아파트 단지 그 어느 곳에 피어 있던 ‘하늘미나리’, 가을이면 노랗게 익어가던 ‘감나무’, 바이러스에 걸려 주기적으로 에프킬라를 뿌려대서야 겨우 몸을 추스르던 ‘향나무’, 아침은 물론이고 점심 저녁 나뭇가지에 앉아 보도블럭에 똥을 휘갈기던 새들... 

날마다 미소를 짓고, 날마다 낯을 붉히고, 그러면서도 날마다 얼굴을 맞대어야만 하루가 가던 이 모든 것들에게 ‘변치 않는 그대 사랑했노라고’ 그 한마디 할 새도 없이 떠나야 했던 그녀다. 

얼마 전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장의 칼에 찔려 죽은 어느 아파트 관리소장의 이야기다. 슈퍼울트라 ‘을’이었던 ‘여자 관리소장’. 

여성상위 시대는 이미 한물 간 시대고, 오히려 여자가 마음만 먹으면 잘나가는 남자를 하루아침에 꺾을 수도 있다는 시대. 하지만 직장에서야 어디 그런가. 더군다나 아직도 남자들의 세계라고 여겨지는 직업이 있고, 거기서 발을 붙이고 살아야 하는 여자소장이란 타이틀 앞에서야...

갑과 을의 차별이 종종 이슈화되고 있는 아파트관리의 세계. ‘여자’라는 사회적 약자와 ‘관리소장’이란 직업적 약자의 이중적인 차별 속에서 이들의 생활은 겪어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사실, 아파트 경비원들의 처우에 대한 논란은 간간히 있어왔지만 정작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하나도 나을 것 없는 처지가 바로 아파트 관리소장이지 않을까. 

목숨을 내걸어야만 밥벌이를 할 수 있다는 사실. 이 첨단의 시대에 아직도 이런 사실을 마주해야만 하는 현실이 분노를 넘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 소식을 접한 후 며칠 째, 그녀가 나였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몸서리를 치며, 이 조서(弔書)를 띄운다. ‘그대 참으로 사랑했었노라고’...

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 『오래된 것들은 골목이 되어갔다』, 산문집 <비오는 날의 오후>를 펴냈다.

젊은시조문학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오랫동안 하던 일을 그만두고 ‘글만 쓰면서 먹고 살수는 없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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