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예술칼럼, Peace Art Column] (32) 토미야마 카즈미

제주도는 평화의 섬입니다. 항쟁과 학살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주4.3이 그렇듯이 비극적 전쟁을 겪은 오키나와, 2·28 이래 40년간 독재체제를 겪어온 타이완도 예술을 통해 평화를 갈구하는 ‘평화예술’이 역사와 함께 현실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2018년부터 세 나라 세 섬의 예술가들이 연대해 평화예술운동을 벌이고 있어 이에 대한 창작과 비평, 이론과 실천의 공진화(共進化)도 매우 중요합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세 섬 예술가들의 활동을 ‘평화예술칼럼(Peace Art Column)’을 통해 매주 소개합니다. 필자로 국외 작가들이 참여하고 있어 영어, 일어, 중국어 번역 원고도 동시 게재합니다. [편집자 글] 

2019년 10월 31일 오전 2시경 오키나와 섬 슈리성에서 화재가 발생해 정전을 비롯한 주요 건축물이 불탄 지 1년이 지났다. 어둠을 붉게 물들이는 맹화 속에서 무너져 내리는 성의 모습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오후 1시 30분 진화되기까지 오랜 시간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목격해야 했던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그것은 트라우마틱한 체험이다. 그해 봄에 일어났던 프랑스 노트르담 대성당 같은 비극이 설마 오키나와에도 닥칠 줄이야. 

노트르담 대성당의 화재 원인이 정부 조사에 의해 특정되지 않았듯 슈리성의 화재 원인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조사 과정에서 슈리성을 관리하는 단체의 소방 대책이나 위기 관리 체제의 빈약함이 드러났지만 책임 소재는 명확히 가려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화재 직후부터 재건을 위한 기부가 오키나와현이나 나하시에 전해져 그 총액은 50억엔을 돌파했다. 소실된 지 1년이 지난 지금, 슈리성 재건을 테마로 한 이벤트로 오키나와 전체가 들끓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상실의 아픔을 재흥의 낭만으로 전환하려는 듯.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불타는 슈리성 정전, 2019년 10월 31일 촬영. 사진=이시자키 마사히코, 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슈리성의 소실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453년, 1660년, 1709년의 화재가 기록으로 확인되고 있으며, 그때마다 재건되어 1945년 미군의 포격으로 궤멸되었다. 당시 슈리 성 지하에는 미군과의 오키나와 결전을 기약했던 일본군이 사령부 호를 설치하고 있었다. 지하 벙커에는 참모들을 위한 게이샤와 창녀 20여 명도 수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미군의 공격전에 사령부는 호를 포기하고 섬 남부로 퇴각해 있었지만, 버려진 부상병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전후 점령 미군은 잿더미로 변한 성터에 오키나와 주민을 위한 대학을 설립했다. 주민인 '자치정부' 대표를 미군이 임명하는 의식을 이 왕성 터에서 치러 군의 위신을 과시하기도 했다. 대학 캠퍼스는 1960년대 젊은이들이 미군 지배에 이의를 제기하는 투쟁의 장소였으나 슈리성 복원 정비를 계기로 이전했다. 1972년 오키나와의 시정권이 미국에서 일본으로 반환되고, 그 20주년을 기념하는 사업으로 일본 정부가 슈리성의 복원에 나서 국영 슈리성 공원으로 정비 개원한 것이 1992년. 올해 화재는 통산 30여 년에 걸친 복원공사가 완료된 지 약 10개월 만에 일어났다.

좀 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자. 모든 왕성이 그러했듯이 슈리성 또한 권력의 성쇠의 무대였다. 1429년 통일 왕국이 된 류큐는 중국 황제가 총괄하는 책봉 체제 아래 군신 관계를 맺었다. 왕국 최대의 외교 행사는 류큐 국왕을 대체하기 위해 황제로부터 파견되는 책봉사를 대접하는 것으로, 슈리성은 책봉 의식의 장소이기도 했다. 1609년 사쓰마가 류큐를 침공한 후에도 황제와 관계는 유지됐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출범한 신정부는 중국 황제에 대한 류큐의 조공을 금지했다. 이어 1879년 류큐 병합을 완성해 군대의 위압으로 슈리성에서 류큐 국왕을 추방했다. 슈리성 안은 일본군의 주둔지가 되었고, 나중에는 다시 오키나와 신사가 창건되어 슈리성 정전을 그 배전으로 사용하였다. 류큐 국왕의 제사 공간이기도 했던 슈리성이 천황 중심의 국가 신도 체계로 재편되어 가는 과정은 류큐 정신 문화의 식민지화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어느 정도 성공해 오키나와 사람들은 천황의 아기가 되어 1945년 파국을 맞이했던 것이다.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정전터, 2020년 10월 촬영.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그로부터 47년 뒤, 앞서 말한 것처럼 슈리성은 복원되어 국영 공원으로 개방되었다. 복원은 일본 정부의 프로젝트였지만, 물론 오키나와 측도 대망하고 있던 것이다. 재건을 위한 역사 자료도 부족한 가운데 왕조 문화의 정수를 모은 성의 재건은 연구진과 문화연예 관계자들의 영지를 결집하고 장인들의 기술을 총동원할 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는 일이었다. 2000년에는 '류큐 왕국의 구스쿠(성) 및 관련 유산군'의 일부로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기도 했다. 최근 복원된 사적이 세계유산이 되는 것은 유례가 없다고 한다. 갖은 논쟁과 노력을 거쳐 복원한 슈리성의 대부분은 그러나 27년밖에 버티지 못하고 날아가 버렸다.

오키나와 유수의 관광 명소가 된 슈리성을 몇 번인가 방문한 적이 있다. 고지대에 있어 탁 트인 로케이션과 왕조 문화의 화려함을 연출하는 취향을 맛보면서도 이 곳이 한때 들이마셨을 피나 화약 연기 냄새, 비분과 탄식이 너무 훌륭하게 소독되고 있어 불편하다. 성 안 한편에 작은 전시실이 있었으나 그곳에도 이 성 역사의 암부를 전하는 듯 한 전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왕조의 고풍스런 문물이 배치되어 일찍이 해외 교역의 중계지로서 번영했던 류큐가 중국이나 일본과의 교류 속에서 자라난 독자적인 미의식을 사랑하려는 장치임은 잘 알 수 있다(나 자신은 이러한 문물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농민의 후예이긴 하지만). 그것이 현재의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자부심과 자부심을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거기에만 머물러서는 복원 슈리성이 망각의 장치로 기능할 만한 것이 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오키나와전 이전의 슈리성(그림 엽서).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슈리성 지하 일본군 제32군사령부 호 내부, 1945년 미군 촬영.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한편 성 지하에 남아있는 옛 일본군사령부 호를 전쟁 유적으로 공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오키나와 현 당국은 많은 정비비 등을 이유로 입구를 닫아 놓고 있었다. 2014년, 호 입구에 '제32군사령부 호 설명판'을 설치하기 위해 오키나와(沖繩)현 당국은 전문가 검토위원회를 소집했지만 위원이 작성한 문안에서 "위안부", "오키나와 주민 학살" 등의 문구를 삭제하여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오키나와전 연구자의 제시를 현 직원이 검증한 결과 그런 사실의 확증을 얻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학문보다 행정이 우월한 셈이다. 이 또한 자발적인 소독 작업이었을지 모른다. 지금도 이 성의 땅은 망각과 상기의 정치가 서로 으르렁거리는 기억의 전쟁터다.

소실된 슈리성을 애도하는 목소리는 젊은 세대에게도 확산되고 있다. 복원 슈리성은 27년 동안 현존했을 뿐이지만 그 사이에 오키나와의 정신적 지주이자 영혼이며 정체성이라고 천명할 만한 상징성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역사적 문화적 유산의 상실이 장래를 짊어질 세대의 역사인식을 심화하는 계기가 된다면 소실 비극도 보상이 될 것이다. 오키나와의 많은 젊은이는 가령,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이름은 알아도 그 시대 류큐 국왕의 이름을 모른다. 복원된 슈리성의 화려한 모습은 알지만 그것을 지탱하기 위해 고된 노동에 인생을 바쳤던 농민들을 상상하는 계기는 없다. 슈리성이 일본 본토에서 파견된 병사들에게 점거된 점, 류큐의 왕이 도쿄로 소환된 점, 류큐의 망국에 저항해 탄압받은 자들이 있었던 점, 그리고 그 망국이 근대 동아시아를 석권한 일본제국주의의 첫걸음이었다는 점, 오키나와전이 일본제국주의의 귀결이었던 점에 대해서도. 이들 역사는 정규 학교 교육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류큐 오키나와의 역사는 일본국의 정사에 외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이야말로, 슈리성이 상징하는 오키나와의 역사였다.

슈리성을 정신적 지주라고 부른다면 이들 역사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결코 역사의 화근을 재연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 깊이에서 새로운 재건의 의미가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헤노코 미군기지 건설과 마찬가지로 슈리성 재건에도 의욕을 보이고 있지만 현재 총리는 자신은 전후 태생이기 때문에 오키나와의 역사는 모른다고 단언하는 인물이다. 향후 재건될 슈리성이 일본 정부 주도의 관광용 테마파크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 이해에 입각한 오키나와의 정신성이 필요하다. 류큐 병합 140주년을 맞아 발생한 슈리성의 불길에 대한 의미를 숙의하고 결코 재건을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불탄 곳의 폐허야말로 우리를 향수를 넘어선 진정한 사상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파괴된 성벽에 미국기를 게양하다, 1945년 미군 촬영.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토미야마 카즈미(豊見山和美 TOMIYAMA Kazumi) 씨는 도쿄 소재 추오대학교와 류큐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며, 영국 런던대학교 아카이브연구 석사과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오키나와현립공문서관의 아키비스트로 일하면서, 오키나와 전후사를 중심으로 문화평론을 하고 있습니다.


廃墟における思想―首里城焼失1年
豊見山和美

2019年10月31日午前2時頃、沖縄島にある首里城で火災が発生し、正殿をはじめ主要な建築物が焼失してから1年が経った。夜の闇を赤く染める猛火の中で崩れ落ちる城の姿はあまりにも衝撃的だった。午後1時30分に鎮火するまでの長い時間、炎上に為す術もなく目撃するしかなかった沖縄の人々にとって、それはトラウマティックな体験となっている。同年春に起きたフランス・ノートルダム大聖堂のような悲劇が、まさか沖縄にも降りかかるとは。ノートルダム大聖堂の火災原因が政府の調査によって特定されなかったように、首里城の炎上原因も究明に至っていない。調査の過程で首里城を管理する団体の消防対策や危機管理体制の貧弱さが明らかになったが、責任の所在は明確にされないままだ。それでも、火災直後から再建のための寄付が沖縄県や那覇市に寄せられ、その総額は50億円を突破した。焼失から1年の今、首里城再建をテーマにしたイベントで沖縄中が沸騰していると言っても過言ではない。喪失の痛みを再興のロマンに転換しようとするかのように。

首里城の焼失は今回が初めてではない。1453年、1660年、1709年の火災が古記録で確認されており、その度に再建され、1945年に米軍の砲撃により壊滅した。当時、首里城の地下には、米軍との沖縄決戦を期した日本軍が司令部壕を設置していた。地下壕には参謀たちのための「芸者」や「遊女」20数名も収容していたという。もちろん米軍の攻撃前に司令部は壕を放棄して島の南部へと退却していたが、置き去りにされた負傷兵らがいたと推測されている。戦後、占領米軍は、灰燼に帰した城跡に沖縄住民のための大学を設立した。住民の「自治政府」代表を米軍が任命する儀式をこの王城跡で行い、軍の威信を誇示することもあった。大学のキャンパスは、1960年代、若者たちが米軍支配への異議を申し立てる闘争の場所となったが、首里城の復元整備を機に移転した。1972年に沖縄の施政権がアメリカから日本へ返還され、その20周年を記念する事業として日本政府が首里城の復元に取り組み、国営首里城公園として整備開園したのが1992年。2019年の火災は、通算30年に及ぶ復元工事が完了して約10か月後に起こった。

もう少し歴史を遡ろう。あらゆる王城がそうであるように、首里城もまた権力の盛衰の舞台だった。1429年に統一王国となった琉球は、中国皇帝の統べる冊封体制のもとで君臣関係を結んだ。王国最大の外交行事は、琉球国王の代替わりにあたって皇帝から派遣される冊封使を接遇することであり、首里城は冊封の儀式の場所でもあった。1609年に薩摩が琉球を侵攻した後も皇帝との関係は維持されたが、明治維新後に発足した新政府は中国皇帝への琉球の朝貢を禁止し1879年には琉球併合を完成して軍隊の威圧をもって首里城から琉球国王を追放した。首里城内は日本軍の駐屯地となり、後には沖縄神社が創建され首里城正殿はその拝殿に用いられた。琉球国王の祭祀空間でもあった首里城が、天皇中心の国家神道体系へ再編されていく過程は琉球の精神文化の植民地化と言ってよいだろう。それはある程度成功し、沖縄の人々は天皇の赤子となって1945年のカタストロフを迎えたのだ。

それから47年後、先述したように首里城は復元され国営公園として開放された。復元は日本政府のプロジェクトではあったが、もちろん沖縄側も待望していたことである。再建のための歴史資料も乏しい中で、王朝文化の粋を集めた城の再建は、研究者や文化芸能関係者たちの英知を結集し、職人たちの技術を総動員して初めて実現できることだった。2000年には「琉球王国のグスク及び関連遺産群」の一部としてユネスコの世界文化遺産に登録されてもいる。近年に復元された史跡が世界遺産となるのは例がないという。さまざまな論争や努力を経て復元した城の大部分はしかし、27年しか保てずに失われてしまった。

沖縄有数の観光スポットとなった首里城を何度か訪れたことがある。高台にあって見晴らしのよいロケーションと王朝文化の華やかさを演出する趣向を味わいながらも、この場所がかつて吸い込んだであろう血や硝煙の臭い、悲憤と嘆きの声があまりにも見事に「消毒」されていることに、違和感を覚えたものだ。城内の一角に小さな展示室があったが、そこにもこの城の歴史の暗部を伝えるような展示は見られなかった。王朝の雅な文物が配置され、かつて海外交易の中継地として繁栄した琉球が、中国や日本との交流の中で育んだ独自の美意識を愛でようという仕掛けであることはよくわかる(私自身はこれらの文物を想像することすらできなかった百姓の末裔であるが。)それが現在の沖縄の人々に誇りと自負を与えるものであるのは確かだけれども、それだけにとどまっては、復元首里城が忘却の装置として機能するだけのものになりはしないかという疑念を抱いた。

いっぽう、城の地下に残る旧日本軍司令部壕を戦争遺跡として公開活用すべきだという声に対して、沖縄県当局は多額の整備費などを理由に入口を閉ざしていた。2014年、見過ごしてしまいそうな壕の入口に「第32軍司令部壕説明板」を設置するため、沖縄県当局は学識経験者らによる検討委員会を招集したが、委員が作成した文案から「慰安婦」「沖縄住民の虐殺」などの文言を削除して問題となったことがある。沖縄戦研究者の提示を県職員が検証した結果、そのような事実の確証を得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という理由だった。学知に行政が優越したわけだ。これもまた自発的な「消毒」作業だったのかもしれない。今もこの城の土地は、忘却と想起の政治がせめぎ合う記憶の戦場だ。

焼失した首里城を悼む声は、若い世代にも広がっている。復元首里城は27年間現存しただけだが、その間に沖縄の精神的支柱であり魂でありアイデンティティであると明言されるほどの象徴性を獲得したということだろう。歴史的・文化的遺産の喪失が将来を担う世代の歴史認識を深化する契機になるならば、焼失の悲劇も報われるに違いない。沖縄の多くの若者は、たとえば豊臣秀吉の名は知っていてもその時代の琉球国王の名を知らない。復元された首里城の華麗な姿は知っていても、それを支えるために過酷な労働に人生を費やした農民たちを想像する契機はない。首里城が日本本土から派遣された兵士たちに占拠されたこと、琉球の王が東京へ召喚されたこと、琉球の亡国に抵抗し弾圧された者たちがいたこと、そしてその亡国が近代東アジアを席巻した日本帝国主義の最初の一歩であったこと、沖縄戦が日本帝国主義の帰結であったことについても。これらの歴史は学校教育の正規のカリキュラムではないからだ。琉球・沖縄の歴史は、日本国の「正史」にとって「外伝」に過ぎない。しかし、これらの事象こそが、首里城が象徴する沖縄の歴史だった。

首里城を精神的支柱と呼ぶならば、これらの歴史をも受け止めなければなるまい。それは決して歴史の禍根を再燃させようということではなく、その深みからこそ新しい再建の意味が生まれてくると考えるからだ。日本政府は辺野古の米軍基地建設と同様に首里城の再建にも意欲を示しているが、現在の首相は「自分は戦後生まれなので沖縄の歴史はわからない」と明言する人物である。今後再建されるであろう首里城が、日本政府主導の観光用テーマパークに堕してしまわないためには、歴史理解に立脚した沖縄の精神性が必要となる。琉球併合から140年の節目に起こった首里城の炎上の意味を熟議し、決して再建を急ぐべきではない。焼け跡の廃墟こそが、私たちをノスタルジーを越えた真の思想へと誘うからだ。

写真1 炎上する首里城正殿 2019年10月31日撮影 ©石崎雅彦
写真2  正殿の跡 2020年10月撮影 
写真3  沖縄戦以前の首里城(絵葉書)
写真4 首里城地下の日本軍第32軍司令部壕の内部  1945年 米軍撮影
写真5  破壊された城壁に米国旗を掲げる  1945年 米軍撮影


Thoughts at ruins
TOMIYAMA Kazumi

It's been a year since a fire broke out at Shuri Castle on the Okinawa island at around 2 a.m. on October 31, 2019, destroying the major buildings, including the main hall of the palace. The sight of the castle collapsing in the midst of the fierce fire that dyed the darkness of the night was too shocking to see. It was a traumatic experience for the Okinawans, who had no choice but to witness the blaze for a long time before it was extinguished at 1:30 pm on the same day. The tragedy of Notre Dame Cathedral in France in the spring of that year, and how could Okinawa be expected to experience such a tragedy? Just as the cause of the Notre Dame cathedral fire was never identified by the government's investigation, the cause of the Shuri Castle fire has yet to be determined. The investigation revealed the poor firefighting measures and crisis management systems of the organization that manages Shuri Castle, but the blame for the fire remains unclear. Nevertheless, immediately after the fire, donations for the rebuilding of Shuri Castle came to Okinawa Prefecture and Naha City, and the total amount of money raised exceeded 5 billion yen. One year after the fire, it would not be an exaggeration to say that the whole of Okinawa is now boiling over with events focused on the rebuilding of Shuri Castle as if trying to turn the pain of loss into a romance of restoration.

This is not the first time Shuri Castle has burned down; fires in 1453, 1660, and 1709 are documented in the archives, and each time it was rebuilt and finally destroyed by U.S. military bombardment in 1945. At that time, the Japanese army had set up a shelter in the basement of Shuri Castle in preparation for the decisive battle with the U.S. military in Okinawa. The underground bunker reportedly housed more than 20
"geishas" and "prostitutes" for the general staff. Of course, before the U.S. attack, the headquarters abandoned the shelter and retreated to the southern part of the island, but it is assumed that some of the wounded soldiers were left behind. After the war, the occupying U.S. forces established a university for the residents of Okinawa on the ruins of the burnt-down castle. Once the U.S. military would hold ceremony at the site of the castle to appoint the residents' "self-governing" representatives, demonstrating the military's prestige. The university campus, which became a site of youth protest against U.S. military rule in the 1960s, was relocated in the wake of the restoration of Shuri Castle. To commemorate the 20th anniversary of the return of administrative rights over Okinawa from the U.S. to Japan in 1972, the Japanese government undertook a project to restore Shuri Castle as National Park and opened it for the public in 1992; the 2019 fire occurred about 10 months after a total of 30 years of restoration work was completed.

Let's go back a little further in history. Like all royal castles, Shuri Castle was the scene of the rise and fall of power: the Ryukyu Kingdom which established in 1429, entered into a ruler-subject relationship under the tributary system governed by the Chinese emperor. The biggest diplomatic event of the kingdom was the reception of the envoys sent by the emperor for coronation the king of Ryukyu, and Shuri Castle was also the place for the ceremony. Even after Satsuma invaded Ryukyu in 1609, the relationship with the Chinese emperor was maintained, but the new government, which came into power after the Meiji Restoration, banned Ryukyu tribute to the Chinese emperor. In 1879, the annexation of Ryukyu was completed and the king of Ryukyu was expelled from Shuri Castle under the pressure of the army. The Shuri Castle became an encampment for the Japanese army, and later the Okinawa Shrine was built, and the main hall of Shuri Castle was used as a place of worship to the Shirine. The reorganization of Shuri Castle, which had been a sacred space for the Ryukyu kings, into an Ten-no-centered state Shinto system can be seen as a colonization of Ryukyu spiritual culture. It succeeded to some extent, and the Okinawans became the emperor's babies and met the catastrophe of 1945.

Forty-seven years later, as mentioned above, Shuri Castle was restored and opened to the public as a national park in 1992. Although the restoration was a project of the Japanese government, it was, of course, aspiration that the Okinawans had longed for.
Despite the paucity of historical materials for reconstruction, the reconstruction of the castle, which gathered the best of dynastic culture, could only be accomplished by mobilizing the wisdom of researchers and people involved in culture and the arts, and by mobilizing the skills of the craftsmen. In 2000, the castle was inscribed as part of the UNESCO World Heritage List of "Gusuku Sites and Related Properties of the Kingdom of Ryukyu”. This is the first time that a recently restored historical site has been declared a World Heritage Site. Most of the restoration which was realized after various controversies and efforts, however, was lost after only 27 years of keeping it.

I have visited Shuri Castle several times, which has become one of the most popular tourist attractions in Okinawa. While I enjoyed its elevated location with its excellent view and the glamorous atmosphere of dynastic culture, I felt something strange by the fact that the smell of blood and gunpowder, of grief and sorrow that this place must have inhaled, had been so brilliantly "sanitized". There was a small exhibition room in one corner of the castle, but even there, there was no display that conveyed the darker side of the castle's history. It is clear that this is a gimmick to appreciate the unique aesthetic sense that Ryukyu, which once prospered as a transit point for foreign trade, fostered in its interaction with China and Japan (although I myself am a descendant of a farmer who couldn't even imagine these artifacts), by arranging elegant artifacts from the dynasty. It is true that this is something that gives the Okinawans today a sense of pride, but I had a suspicion that it would only serve as a device for oblivion.

In 2014, in order to install an "explanation board for the 32nd Army Headquarters bunker" at the entrance of it, which could have been overlooked, the Okinawa Prefecture authorities asked academics and other experts to make description for the explanation board. The Okinawa Prefecture deleted phrases such as "comfort women" and "massacre of Okinawan residents" from the draft text the committee members had prepared. The reason for this was that the prefectural officials were unable to verify such facts after reviewing the presentation of the Okinawan war researchers. So, the administration was superior to academia. This may have been another voluntary "sanitization" process. Today, the land of the castle is still a battlefield of memory, where the politics of oblivion and recall are at odds with each other.

Mourning for the burnt down castle is spreading to the younger generation as well. The restored Shuri Castle has only existed for 27 years, but in that time it has acquired a symbolism that has been clearly stated as the spiritual pillar, soul and identity of Okinawa. If the loss of this historical and cultural heritage is an opportunity for future generations to deepen their understanding of history, the tragedy of the burning must be rewarded. Many young Okinawans know the name of TOYOTOMI Hideyoshi, for example, but not the name of the King of Ryukyu at that time. They may know the splendor of the reconstructed Shuri Castle, but they do not have the opportunity to imagine the farmers who worked hard and devoted their lives to its support. Nor that Shuri Castle was occupied by soldiers dispatched from the Japanese mainland; that the Ryukyu king was summoned to Tokyo; that there were those who resisted the fall of the Ryukyus and were suppressed; and that the fall of the kingdom was the first step in the Japanese imperialism that swept modern East Asia, and that the Battle of Okinawa was a consequence of Japanese imperialism. These historical narratives are not part of the regular curriculum of school education. The history of Ryukyu/Okinawa is only an "offshoot" to the "official history" of Japan. However, these events were the history of Okinawa that Shuri Castle represents.

If we call Shurijo Castle a spiritual pillar, we must take this history into account. This is not to rekindle the ravages of history; rather, it is from the depths of that history that a new meaning for reconstruction will emerge. The Japanese government is as eager to rebuild Shuri Castle as it is to build the U.S. military base at Henoko, and the current prime minister has clearly stated that because he was born after the war and does not know the modern history of Okinawa. In order for Shuri Castle not to be turned into a fancy theme park led by the Japanese government, Okinawan philosophy based on historical understanding will be required. The significance of the fire that destroyed Shuri Castle on the 140th anniversary of the Ryukyu annexation of Japan should be discussed, and the rebuilding of the castle should not be rushed. Because it is the burned ruins that invite us to the true philosophy beyond nostalgia.

Photo 1: Shuri Castle Main Hall in flames, 2019 ©ISHIZAKI Masahiko
Photo 2: The remains of the Main Hall, 2020 
Photo 3: Copy of a post card picture of Shuri Castle before the bombardment.
Photo 4: Former headquarters of Japanese 32nd Army in cave, 1945
Photo 5: American flag files over a parapet of the castle wall, 1945


關於遺址的想法:首里城燒毀一年之思
豐見山和美

自2019年10月31日凌晨2點左右在沖繩島首里城發生火災以來已過一年,燒毀宮殿主殿在內的主要建築物。暗夜中瀰漫著熊熊赤焰烈火映照夜空,城堡坍塌的景象實在令人震驚。對於沖繩人民而言,這是一次痛苦的經歷,他們別無選擇,僅能望眼欲穿目睹大火在下午1:30熄滅。為什麼同年春天發生在法國的巴黎圣母院這樣的悲劇再次襲擊沖繩?如同政府從未查明巴黎聖母院起火的原因一樣,首里城堡起火的原因也尚未得到調查。調查顯示,負責首里城營運管理的組織對消防措施和危機管理系統不佳,但火災的責任仍不清楚。即便如此,火災發生後,也立即向沖繩縣和那霸市捐款,超過了50億日元。毫不誇張地說,整個沖繩島正在燒毀一年的主題為重建首里城的活動中沸騰。彷彿試圖將失落的痛苦變成重建恢復的浪漫。

首里城不是第一次被燒毀。根據歷史記載,在1453年,1660年和1709年發生了大火,每次都進行了重建,並於1945年被美軍轟炸摧毀。當時,正計劃與美軍進行沖繩決戰的日軍在首里城地下室建立了一個司令部碉堡。據說地下掩體還為員工安置了20多個“藝妓”和“遊女”。當然,在美軍發動進攻之前,總部已經放棄了避難所,撤退到了島嶼南部,但是據推測,一些受傷的士兵被留下了。戰後,佔領的美軍在城堡廢墟上為沖繩居民建立了一所大學。一旦美軍在城堡所在舉行了儀式,任命居民為「自治政府」的代表,等於彰顯了美軍的統治威望。 1960年代,大學校園成為年輕人挑戰美國軍事統治的抗爭之地,但在首里城(Shuri Castle)恢復修建後,該校園隨即被搬遷。 1972年,沖繩政府從美國返還給日本,為了紀念其20週年,日本政府致力於修整首里城,並於1992年將其作為首里城國家公園開放。 30年的修復工作完成大約10個月後,直到2019年的大火。

讓我們回顧一下歷史。像所有王室城堡一樣,首里城也是權力興衰的舞台。琉球於1429年成為一個統一的王國,在明朝皇帝的統治的冊封體制下建立了君臣關係。王國最大的外交事件是接待皇帝派遣的冊封使者,以取代琉球國王,首里城也是冊封儀式的地點。即使在薩摩(Satsuma)入侵琉球後,與皇帝的關係仍得以維持,但明治維新後成立的新政府禁止琉球向清朝皇帝朝貢。此外,在1879年,日本併吞了琉球,並在軍隊威嚇下將琉球國王從首里城驅逐。首里城內部成為日軍的屯駐地,其後建造了沖繩神社,將首里城的主殿被作為拜殿。曾是琉球國王的祭祀空間的首里城,被編入為以天皇為中心的國家神道體系的過程,可以說是琉球精神文化的殖民化。它在某種程度上是成功的,沖繩人民成為了皇民之子,並迎接1945年發生的災難。

如上所述,四十七年後首里城得以修復並作為國家公園對公眾開放。儘管修復是日本政府的計劃,但是沖繩人民方面當然也很期待。由於缺乏重建的歷史資料,只有通過收集研究人員和從事文化藝術工作者的智慧並動員所有工匠的才能,才能實現王國的文化精華城堡重建。2000年,這座城堡被認定為「琉球王國城跡及相關遺產群」的一部分被聯合國教科文組織 UNESCO 列為世界文化遺產。這是最近修復的歷史遺跡成為世界遺產。但是,經過各種爭議和努力所修復的大部分內容僅在27年後就失去了。

我已經多次參觀過首里城,它已成為沖繩最受歡迎的旅遊景點之一。一邊欣賞山上的美景,一邊欣賞朝代文化的光輝,但由於氛圍感受,讓我感到有些奇怪,這個地方曾鮮血和煙霧氣味,充滿悲傷和哀悼的氣氛都被出色地“消毒了”。城堡的角落有一間小展覽室,但是即使在那兒,也沒有任何展示物可以透射出黑暗的一面。不難看出,琉球曾經作為對外貿易的中轉站而繁榮,它具有歷朝歷代的高雅文物,具備與中國和日本的交流而培育的獨特美學。(儘管我自己是無法想像這些文物的農民後代。)通過展示王朝時期的精美文物,今天的沖繩人民無疑為此感到自豪和自豪,但我對此表示懷疑,認為這座城堡成為載著遺忘的裝置。

另一方面,由於有人要求保留在城堡地下室中的日本前軍事總部坑口應公開用作戰爭地點的聲音,沖繩縣當局由於維修費用高而關閉了入口。 2014年,沖繩縣政府召集了一個由學術專家組成的審查委員會,在該坑的入口處安裝了“第32陸軍指揮部說明牌”,縣府從委員會委員準備的案文中刪除了“慰安婦”和“沖繩居民屠殺”等字眼,原因是縣官員在審查了沖繩戰爭研究人員的介紹後無法確認這些事實。因此,政府高於勝於學術界,這也可能是另一個自願自我審查的“消毒”過程。即便如今,這座城堡的土地仍然是記憶的戰場,遺忘和追憶的政治在這裡相互矛盾競爭。

哀悼被燒毀的首里城的聲音傳到了年輕一代。修復後的首里城只存在了27年,但在那段時間裡它獲得了象徵性的象徵,被明確認為是沖繩的精神支柱、靈魂和身份。如果歷史和文化遺產的佚失為加深對子孫後代的歷史認識提供了機會,那麼燒毀的悲劇就必須得到回報。例如,沖繩縣的許多年輕人都知道豐臣秀吉(Hidekichi Toyomi)的名字,但當時卻不知道當時琉球國王的名字。即使您知道經過修復的首里城堡的輝煌外觀,也沒有機會想像一下為支撐該城堡而付出辛勤勞動的農民。首里城被從日本派遣的軍隊佔領,琉球國王被召喚到東京,有一些人留下抵抗和鎮壓琉球。這還涉及一個事實:是近代日本帝國主義席捲亞洲的最初,對沖繩島的戰爭是日本帝國主義擴張的結果。這是因為這些歷史記錄不是學校教育的正式課程。琉球和沖繩的歷史無非是日本“正史”的“外傳”。然而,這些事件正是首里城象徵的沖繩歷史。

如果我們將首里城稱為精神支柱,那麼我們也必須接受這些歷史。這不是要重燃歷史的殘骸,而是要藉由歷史的深處浮現新的重建意義。為了使首里城不像在河內興建美國軍事基地那樣急於重建。但是現任首相表示“我是戰後出生的,所以我不知道沖繩的歷史”。為了使將來重建的首里城不落入日本政府主導的旅遊主題公園,基於歷史理解的沖繩精神必不可少。在討論了琉球合併140週年之際,首里城焚毀的含義之後,我們更不應該急於進行重建。正是被燒毀的廢墟使我們有了超越懷舊的真實觀念。

照片1 燃燒首里城正殿,攝於2019年10月31日©石崎雅彦 Masahiko Ishizaki
照片2 大殿遺跡,攝於2020年10月
照片3 沖繩島戰之前的首里城(照片傳單)
照片4 美國軍隊攝於1945年,首里城堡下的第32陸軍指揮部洞穴內
照片5 1945年,美軍在被毀的城堡牆上升起美國國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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