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선의 마을 책방을 찾아書](8) 제주시 노형동 ‘유채꽃머리 책방’

마을책방은 단순한 기호품을 파는 곳이 아닙니다. 대형서점처럼 책을 어마어마하게 팔아치우는 곳은 더욱 아닙니다. 후미진 도심 골목이나 시골 언저리에서 마을책방을 만난다면 그것은 행운이지요. 마을 초입 팽나무 아래 마을사람들이 모여들듯 책벌레들이 도란도란 어우러질 수 있는 사랑방 같은 곳입니다. 제주도 마을 곳곳에 작은 책방들이 사람을 살리고, 다시 사람이 마을을 살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마을책방의 가치입니다. [제주의소리] 시민기자 고봉선 시인이 바람을 쐬듯 책방마실을 다니고 있습니다. 책과 사람이 만나는 곳 ‘마을 책방’에서 책방지기의 책 살림 이야기를 시인을 통해 듣습니다. [편집자 글] 

엽록소가 분해되면서 비로소 제 본색이 드러나는 나뭇잎, 이제 곧 이들도 낙엽이라는 이름으로 거리를 뒹굴겠지. 봄이 되면 다시 연둣빛 잎과 함께 와자자 꽃을 불러오겠지. 분해될 거 다 분해되면 우리도 저 단풍처럼 고운 빛깔이 될 수 있을까. 여기, 산산이 부서지며 바닥까지 다다랐던 사람이 있다. 그는 그곳에서 가면을 분해하고 다시 기어올랐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유채꽃이 필 봄을 기다리고 있다. 자신의 삶에 유채꽃 필 무렵을 기다리며 책방을 운영하는 사람, 유채꽃머리 책방지기인 이진우 씨를 만났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책방에 오신 손님이 프리마켓 할 때 갖다 놓았다는 스투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우연한 만남, 책”
한라대학교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 유채꽃머리 책방. 책방은 작년 11월에 오픈하여 이제 막 일 년이 되었다. 정보화 시대가 되면서 오프라인 책방도 많이 사라졌다. 이런 상황인 만큼 ‘도심의 책방을 찾는 손님이 있을까.’ 염려도 되었다. 책방이 사라지며 암암리에 책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일까. 다행스럽게도 오픈 첫날부터 손님이 찾아왔다. 아무래도 대학이 근처에 있다 보니 대학생 단골이 많을 것 같다. 하지만 의외다. 시내라는 위치 덕분인지 책방을 찾는 고객은 대학생뿐만 아니라 주부, 직장인, 나이 드신 분 등 다양하다.

비록 레트로풍의 책방은 아니지만, 도심이란 이름 뒤에 따르는 집세는 만만치 않을 것이다. 사실 책방지기에게 가장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도 임차료다. 작은 책방을 운영하는 책방지기들은 대부분 수입보다 자기만족으로 하는 일이다. 그래도 책방을 꾸려가려면 운영비는 나와야 할 것이다. 다행히도 책방을 꾸려나갈 정도의 운영비는 나온다. 생활비는 새벽에 하는 아르바이트로 충당하고, 이곳에서 책방지기는 치유와 함께 새로운 삶을 찾고 있다.

책방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이진우 씨. 그가 이 일을 시작한 데는 그야말로 바닥을 치고서였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이진우 씨는 고향에서 금융계통에 취업하고, 부산을 거치며 서울에서 23년 정도 일했다. 그런데 그가 맡던 자산운용 쪽에 금융사고가 터졌다. 거래 업체로부터 사기를 당한 것이다. 이진우 씨는 관리자로서 책임을 안고 하던 일을 그만둬야 했다. 하지만 사건은 그만두는 거로 끝나지 않았다. 적잖은 파장을 몰고 오면서 이진우 씨는 완전히 무너졌다.

이진우 씨는 우울증에 빠졌다. 이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지인이 한 권의 책을 건넸다. 정희재 님의 ‘어쩌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라는 에세이였다. 이진우 씨는 생각 없이 책을 펼쳤다. ‘살아오느라 참 애썼다.’ 책을 펼치자마자 문장 하나가 툭! 튀어나오며 이진우 씨 가슴을 파고들었다. 울컥, 목구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더니 눈앞이 흐려졌다. 마음껏 울 수조차 없던 이진우 씨는 자신의 가슴으로 파고든 첫 문장과 함께 책에 빠져들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책방 입구.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지금껏 일해 왔던 금융기관의 경력도 이제 무용지물이 되었다. 이진우 씨는 막노동판을 전전하다가, 장례식장에서 관리실장으로 일하며 시신을 운구하고 염하기도 했다. 인생의 최대 범위 죽음, 세상을 떠나는 자와 책 사이에서 이진우 씨에겐 많은 생각이 오갔다. 결론은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다는 것이었다. 되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했다. 조금의 휴식도 필요했다.

이진우 씨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휴식과 함께 치유와 정리를 위해 책방을 열었다. 아니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라는 속담처럼 뒤늦게 맛을 안 책을 읽고 싶어서였다. 

사태가 터지기 전에도 이진우 씨는 우울증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다. 제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인정은커녕 문책까지 받은 때였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엔 이진우 씨 스스로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긴 시간인데도 눈물 나도록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위로를 받으며 충분히 치료될 것 같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병원은 시간으로 치료비를 받는 곳이었다. 의사는 환자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모든 게 무너진 상황에서, 시간을 돈으로 바꾸며 치료할 여유가 이진우 씨에게는 없었다. 스스로 탈출구를 찾아야 했다. 마침 그때 지인이 건네준 정희재 님의 에세이, ‘어쩌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이진우 씨에게 필요한 건 ‘어쩌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니라, ‘어쩌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정희재 님의 에세이는 이진우 씨에게 명의인 셈이었다. 

환경이었을까, 운명이었을까. 이진우 씨에 의하면, 부끄럽게도 학창 시절엔 책을 많이 읽지 못했다.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교양서나 자기계발서를 중심으로 읽었다. 이는 다만 체면 유지 차원의 독서일 뿐이었다. 이랬던 그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책의 맛과 효과까지 경험했다. 이진우 씨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그저 느낌이 흐르는 대로 책을 읽었다. 그렇게 읽다 보니 시와 소설, 에세이, 인문학이 친숙하게 느껴졌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차를 준비하는 책방지기.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편안한 얼굴의 비밀”
마치 속세를 떠난 사람처럼 온화한 얼굴, 시련을 겪은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는다. 비밀은 그의 이야기 속에 들어 있었다. 서울에서 이진우 씨는 출‧퇴근 시간만 거의 세 시간이었다. 잠 또한 여섯 시간 이상 자는 날이 거의 없었다.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함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게다가 항상 많은 돈을 다뤄야 하는 자산운용 업무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실적에 의해 매일 평가되는 일이라 마음 또한 편한 날이 없었다. 그래도 외형적으로 봤을 땐 안정된 삶처럼 보였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항상 흔들렸다. 대지진에 앞서서 일어나는 전진(前震)과 같은 날들이었다. 

치열한 삶 속에서 관계를 맺어온 사람들, 그 사람들은 증언을 외면했다. 허망했다. 이진우 씨는 심연의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이진우 씨 인생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긍정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긍정, 이 한 단어의 힘은 컸다. 아슬아슬 붙잡고 있던 것을 내려놓았다. 기어오르기 위해, 바닥에서 삶의 벽돌을 다시 쌓았다. 여기에 가장 많은 힘을 준 건 책이었다.

이제껏 이진우 씨는 독서의 유익한 면이 삶의 방향이나 지혜를 얻기 위한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인제 보니 인생만큼 이해할 수 있는 게 책이었다. 책 속 이야기들이 자신의 이야기로 이입이 되며, 살아온 만큼 보이는 게 책이었다. 책은 인생과 동일한 것이었다. 정희재 님의 에세이가 없었다면, 과연 이진우 씨는 책방을 생각했으며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을까.

“또 다른 변화와 배설”
책방을 운영하면서 이진우 씨에겐 또 다른 변화가 생겼다.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진우 씨는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과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금융기관에 있을 때는 IT의 최첨단을 활용했던 이진우 씨다. 금융상품이란 게 모바일이나 컴퓨터를 통해서 판매되는 상품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 삶에서 떠났다. 그렇기 때문에 IT 활용은 가능한 내려놓고 싶다. 블로그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상황일 뿐이다. 그래도 어느 순간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모른다. 책방 운영과 함께 시작된 블로그 활동이 이진우 씨 삶을 다시 바꿔놓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번 사건이 이진우 씨 인생 수업료는 아니었을까. 뜻하지 않게 제2의 인생을 시작했지만, 어찌 보면 이진우 씨도 책과 잠시 이별해 있었을 뿐이다. 비록 체계적인 글쓰기를 배우지 못했다 해도, 블로그나 문화 활동은 가랑비에 옷이 젖어들듯 이진우 씨를 키울 것이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책방 안에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 책갈피 등 프리마켓 행사 때 동네 분들이 갖다 놓은 물품들이 놓여 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2009년이 시작되던 해, 나는 ‘제주도 한 바퀴 도보여행’이란 과제를 스스로 던졌다. 그리고 제주의 소리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4회 이후 연재하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이를 정리하려니, 연재된 14회까지는 편했다. 하지만 10년이 넘은 이야기를 사진 하나로 떠올리기란 쉽지 않았다. 나머지 6회 분량은 너무 힘들었다. 연재까지는 아니어도, 메모라도 해 뒀다면 정리는 훨씬 쉬웠을 것이다. 그래도 확실한 건, 완주하고 났을 때 느낌이 나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아무리 힘든 일도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진우 씨 역시 지금처럼 꾸준히 기록해 둔다면 꼭 필요할 때가 올 것이다.

글을 쓰면서 이진우 씨에겐 전에 없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일상에서 혹은 바다나 오름엘 다니노라면, 전에 없이 작은 풀들이 보였다. 삶도 풍성해지는 것 같았다.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삶이 즐거워졌다.

이진우 씨는 책방에서 작은 문화 활동도 하고 있다. 글이라고는 전혀 써보지 않은 사람들이 ‘책 만들기 모임’에서 글‧그림책을 만든다. ‘글쓰기 모임’에서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쓰고 그림을 넣기도 한다. 모두 주변 분들이다. 이곳에 있는 책갈피나 그 외의 것들도 동네 작가 지망생들이 갖다 놓은 것이다. 이진우 씨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어서다. 결국 책방은 동네 분들이 이용해주는 셈이다. 일반 서점보다는 동네 책방으로 생각하고, 여기에 더 의미를 두는 이유이다.

책방은 이진우 씨가 책도 읽고, 사람을 만나며 제2의 인생을 꾸려나가는 공간이다. 하지만 책방 수입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이진우 씨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새벽에 병원 청소를 하고 있다. 일을 나간 첫날이었다. 청소라는 일이 서툴렀던 탓일까? 쓰레기통을 정리하다가 주삿바늘에 손가락이 찔렸다. 그동안 꿋꿋하게 잘 견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솟는 피와 함께 왈칵, 울음이 터졌다. 피와 함께 흐르는 눈물, 이진우 씨에겐 꼭 필요한 울음이었다.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던 그 모든 것들, 아니었나 보다. 병원을 나와서 걸으며 이진우 씨는 하염없이 울었다. 그리고… 비로소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허울만으로 살아왔던 그동안의 삶, 이제 마음 편히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후 이진우 씨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게 되었다. 글의 힘이 컸다. 글을 쓰며 전에 보이지 않던 게 보였기 때문이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책방 내부 중 일부.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블라인드 책”
아, 이곳에도 블라인드 책이 있었다. 책방지기 이진우 씨 말에 의하면, 블라인드 책은 다른 책에 비해 많이 나가는 편이다. 블라인드 책을 고르는 이유, 설렘과 궁금증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단 한 사람도 구매한 블라인드 책을 책방에서 풀어보지 않는다. 이처럼 신비의 힘을 지닌 블라인드 책, 책방지기는 이 블라인드 책 선정이 가장 어렵다. 편하게 읽을 수 있어야 하고, 선물로도 부담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에세이, 소설, 자기계발서 등 가벼운 책이며 무거운 책까지 골고루 선정해 놓는다. 선택한 책이 비록 본인과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를 기회로 관심 밖 분야의 책을 읽을 수 있는 계기도 될 것이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해시태그만 보고 책을 선택하는 코너입니다. 살다 보면 우리는 늘 선택과 결정의 갈림길에 서게 되죠. 중요한 것은 선택과 결정의 순간이 아니라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내가 선택한 책에 대한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요? 읽기 편안한 책들이라 선물로도 좋아요.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사피엔스와 1Q84”
고향으로 오기 전, 이진우 씨는 경영상 문을 닫은 강원도 홍천의 한 장례식장에서 일했다. 폐쇄된 장례식장, 생각만 해도 오싹해진다. 머리끝이 쭈뼛쭈뼛 일어서는 것만 같다. 몇 안 되는 주변 상가들도 밤이면 모두 문을 닫았다. 사실상 주변엔 사람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리모델링 전, 폐쇄된 이곳에서 이진우 씨는 혼자 살아야 했다. 혼자 있어야 하는 낡은 장례식장, 으스스하다 못해 괴기했다. 

처음 며칠은 무서움에 떨었다. 샤워도 제대로 못 했다. 이때 이진우 씨는 ‘사피엔스(유발 하라리 저, 조현욱 역, 김영사 출판)’를 읽고 있었다. 사피엔스에서는 종교나 제도 등 모든 것이 인간의 상상력에 의한 허구라고 했다. 인간의 상상 능력이 사람을 모이게 했고, 그 힘은 사람을 전 지구에서 최고가 되게 했다는 것이다. 모든 게 상상 때문에 만들어진 거라니, 정작 무서운 건 실체 없는 공포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공포였다. 상상하기 때문에 무서운 거였다. 이진우 씨는 이제 귀신을 상상하지 않기로 했다. 상상하지 않았더니 정말로 무서움이 사라졌다. 그 후 안치실이든 지하실이든 밤이든 낮이든 혼자서도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사피엔스의 도움이었다. 

또 하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이다.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으면서 재판받을 때였다. 증언을 외면하는 사람들과 취조, 잠도 잘 수 없었고 먹을 수도 없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모르는, 그야말로 몽환적인 상태였다. 그렇게 교착상태에 빠져 있는데, 업무상 배임으로 회사에서 추가 고소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사연과 이메일을 적어 우체통에 넣어주시면 작가 중 한 분이 이메일로 답장을 해드립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구치소에 있는 6개월 동안, 조사에 불려갈 때마다 이진우 씨는 모멸감에 시달렸다. 그런데 추가 고소, 더는 살고 싶지 않았다. 취조는 그야말로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내 심정을 다 안다는 듯 감미롭게 취조하다가, 어느 순간엔 팽개치는 걸레로 취급했다. 사람의 감정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완전히 깔아뭉갰다. 혼란 그 자체였다. 미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그래도 이 한 번의 경험이 없었다면, 두 번째 사건 조사도 얼떨결에 똑같은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럴 수는 없었다. 고통의 시간을 잊기 위해 이진우 씨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를 읽기 시작했다. 다행히 처음부터 몰입력이 강했다. 이진우 씨는 1Q84 속으로 그냥 빠져들었다. 책을 읽는 동안, 몽환적인 세계에 빠져들며 검찰의 조사는 까마득히 잊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를 다 읽고, 이진우 씨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1Q84 속 야한 장면이 꿈에 나오며 몽정하고 말았다. ‘나, 아직 살아있구나. 죽지 않고 살아있었구나’ 이진우 씨는 비로소 자신이 살아 있음을 깨닫고 흐느껴 울었다.

남들이 자는 동안 몽정의 흔적을 빨래로 무마했다. 그리고 살아있는 자답게 적극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우선,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 운동하면서 근력을 만들었다. 사건기록도 갖다 놓았다. 수사 기록만 2천 쪽 이상이었다. 신문도 읽고 책도 읽었다. 이러한 행동은 결과를 확, 바꿔놓았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영화 ‘쇼생크의 탈출’이 떠올랐다. 영화의 주인공 앤디 역시 탈출이라는 희망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바닥까지 내려가도 희망만 있으면 올라올 수 있었다. 이진우 씨가 병원 청소에서 주삿바늘에 찔려 흘린 피나 몽정, 눈물은 모두 새 삶을 위한 배설이었다.

덕분에 이진우 씨는 제대로 대응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사건은 집행유예를 받았고, 두 번째 사건에서는 무혐의가 되었다. 엎지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상황, 사피엔스와 1Q84가 힘을 준 것이다. 이진우 씨는 이제 모든 아픔을 다 비웠다. 세상에 둘도 없이 편안한 그의 얼굴이 사실임을 입증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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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내부 중 일부. 유채꽃머리 책방은 독자와 책이 만나는 감성 공간입니다. 책의 디자인도 감상하시고, 질감도 느껴 보시고, 향기도 맡아 보세요. 필요하신 책은 주문해 드립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치유와 삶”
공연기획자에 기자도 했었다는 50대 중반쯤의 고객이 한 분 계시다. 그분이 책방에 처음 오시던 날, 한눈에 봐도 어려운 철학서를 여러 권 골랐다. 보편적으로 잘 찾지 않는 책인데, 한 권도 아닌 여러 권을 꺼내자 이상했다. 이진우 씨는 손님께 말을 걸었다. 그런데 손님의 발음이 어눌했다. 순간, ‘생각 없이 책을 고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진우 씨는 차를 대접하며 대화의 물꼬를 텄다. 

그분은 암 재발 환자였다. 말이 어눌해진 것도 약물치료 후유증이었다. 6개월 정도 남은 시간, 그분은 치료를 중단했다. 하루라도 자유롭게 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책방을 찾고 평소 좋아하던 철학서를 고르는 중이었다. 6개월, 얼마나 불안했을까. 약물에 의한 마비가 아니어도 횡설수설할 것 같다. 그분은 책을 읽으며 통증을 잊는다고 했다. 

책방지기가 그분을 만난 지도 어느새 6개월, 어찌 된 일인지 최근 한 달 동안 안 오셨다. 걱정하는 찰나 다시 오셨다. 하지만 염려와 달리 공방에서 무리하게 일하여 근육이 아프셨다고 했다. 이제 6개월을 넘겼다. 겉모습도 괜찮다. 조금만 더 견디면 된다. 책을 통해서 치유하는 경우였다. 내친김에 책이 완전히 치유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분은 책을 구매해도 다 읽지는 못한다고 했다. 그래도 구매하는 이유가 있다. 당신이 떠난 후, 자식들이 우연히라도 아빠가 남긴 책을 보며 추억하기를 바란다. 혹여라도 그 책들에서 자식들이 삶을 찾아갈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죽음을 앞두고서도, 앉으나 서나 부모는 자식 생각이다.

예전엔 자산운용, 그것도 대출 쪽에 있었다. 대출받는 사람은 대부분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다. 그래서인지 상담도 어두울 때가 많다. 그로 인한 민원이나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이곳엔 따뜻하고 밝은 분이 많이 오신다. 그래서인지 스트레스도 거의 없다. 어두운 이야기를 들으면 같이 어둡고, 밝은 이야기를 들으면 덩달아 밝아지는 게 우리 삶이다. 

코로나가 장기화하면서 좀 어렵긴 하다. 그래도 고마운 분이 많기에 견딜만하다. 한번은 동네 작가 지망생 몇몇이 책방에서 프리마켓을 열자고 했다. 그분들은 드로잉이며 캐리커처에 즉석 소설도 써주셨다. 여기에 그림이며 엽서 판매 등도 준비하셨다. 그렇게 동네 화가와 작가 지망생들이 모여서 프리마켓을 열었다. 물론 이진우 씨가 부탁한 것은 아니다. 오직 그분들이 손수 나서서 해주셨고, 자연스레 책방도 홍보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두 번째 프리마켓을 준비 중이다. 

유채꽃머리 역시 인문교양서 중심 책방이다. 지금껏 살아온 세계에서 이진우 씨는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경험했다. 그래서인지 이진우 씨는 가능한 수험서나 세상 살아가는 데 필수적으로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서가에 꽂지 않는다. 기왕이면 휴식이나 위안, 공감, 다음 삶의 방향, 회고 등 인생과 관련된 책을 중심으로 책방을 꾸리고 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제주 서쪽 마을 서른여섯 개의 석양을 담은 엽서책과 메모지.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책 선정은 본인이 읽었던 책들을 기본으로 한다. 다음은 유명한 블로그에서 추천한 글들을 읽고, 첫 번째 선정에서 빠진 책을 고른다. 이어서 광고성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북튜버가 추천하는 책과 서울대학교 등 신뢰하는 기관에서 추천하는 책에서 데이터를 모은다. 그리고 여기서 추천이 중복되는 책들을 선정한다. 이렇듯 유채꽃머리 책방에 진열된 책에는 이진우 씨의 정성이 모여 있다.

“어머니”
육지에 가서 잘살고 있다고 믿었던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가방 하나만을 들고 나타났다. 그러나 어머니는 다그치는 대신 “밥은 먹었냐?”라고 먼저 묻는다. 그리고 부랴, 밥을 차려주신다. 부모가 뭔지, 콧등이 시큰하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동안은 명절 때만 왔어도 가족이 함께였는데 지금은 혼자다. 불효자라는 생각이 이진우 씨를 괴롭힌다. 한밤중 가방 하나 들고 홀연히 나타난 아들,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을 어머니, 웃지도 못하고 밥은 먹었냐고 먼저 묻던 어머니, 아무 말 못 하고 모래알 씹듯 꾸역꾸역 밥만 삼키던 아들. 이렇게 이진우 씨는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새벽, 아르바이트 나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어머니 마음은 어떠실까. 아마도 뒤돌아서 코를 팽, 풀고는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시겠지. 이미 중년인 아들이 어머니와 살면서 어디 불편이며 갈등이 없겠는가. 하지만 기분 좋은 일들도 많다. 이진우 씨는 어머니를 위해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 비록 계획에 불과하지만, 현재 어머니 이야기를 조금씩 쓰고 있다. 때가 되면 그 글을 모아 선물로 드릴 생각이다. 부디 그 꿈 이루는 날이 하루라도 빨리 오기를 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동네 작가 지망생들이 갖다 놓은 네마탄서스와 테이블야자 화분.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유채꽃머리 책방은”
대화가 필요하신가요? 유채꽃머리 책방으로 가보세요. 한라대학교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찾을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당신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는 책방지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찾아가는 길 : 제주 제주시 한라대학로 
영업시간 : 월-토 12시 ~ 8시 (일요일 휴무) 
블로그 : https://blog.naver.com/yuchaebooks

고봉선은?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나 식물과 함께 자랐다. 지금은 허름한 고향 시골집에서 꽃과 함께, 독서지도사를 하며 아이들과 지내고 있다. 한국해양아동문화연구소 운영위원, 애월문학회 회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에서 [고봉선의 마을 책방을 찾아書]를 통해 격주로 독자들을 만난다. 마을 책방에 깃든 사람과 책 이야기가 소개된다.

저서로는 시집 ‘詩를 먹고 자라는 식물원’, 꽃과 함께 사는 이야기 ‘詩가 사는 기행식물원1, 2, 3, 4’, 동화집 ‘지우개’가 있다. 식물원 시리즈로 전자도서관에 식물원을 꾸미는 게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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