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178. 살아남은 그림들, 눌와, 조상인

출처=알라딘.
출처=알라딘.

“어떤 이는 ‘다 죽게 생겼는데 그림을 그리냐’, ‘그깟 그림이 밥 먹여주느냐’라고 한 소리 했을지도 모른다. 실제 유화가 불이 잘 붙고 캔버스가 오래 탄다며 추위에 불쏘시개로 사라진 그림도 상당했다. 그럼에도 화가들에게 그림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시키는 대수로운 존재였다. 그림이 밥보다 중했고 목숨만큼 귀했다.”

21세기 한국사회에서 그림은 밥먹여주는 일이다. 일부의 일이지만, 예술작품은 수천, 수억, 수십억 원의 화폐와 교환 가능한 재화로 자리잡았으며, 큰돈은 못벌어도 어쨌거나 경제활동의 기본이 되는 직업으로도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미술제도가 사회체제 내에 자리잡기까지 이루 말로 다 못할 역경을 거쳐왔다. 한국사회에서 화공과 석공과 도공이 제작하던 서화와 석물, 도자기 등이 화가, 조각가, 도예가가 창작하는 예술작품으로 전환한 것은 100여년 전 근대초기 이후의 일이다. 이 시기동안 수많은 예술가들이 작품을 남겼지만, 정작 현재까지 남아있는 작품의 수를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신여성의 삶과 예술을 개척하며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화가 나혜석의 경우만 보도라도 생전에 300여점의 작품을 남겼지만 화재로 인한 작품 손실 등의 이유로 현재까지 남아있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나혜석만이 아니다. 모든 예술가들은 지난 1백년동안 한반도에서 벌어진 식민지와 해방공간, 전쟁과 산업화, 독재, 민주화 시기를 거치면서 자신들의 작품을 지키지 못했다. 작품만이 문제가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삶을 지탱하는 것조차 녹록치 않았던 그들에게 예술작품과 예술가로서의 삶을 지켜나가는 일은 이중의 고통이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예술가들 가운데 일반인들의 평균적인 삶을 살아가며 풍요로운 삶을 누린 이들은 극히 드물다. 

이 책이 살아남았고 판단한 그림들은 물질적으로 살아남은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없어지지 않고 남아있다고 다 살아남은 것은 아니다. 그림에는 물질적인 존재 자체를 초월하는 유기적인 생명이 있다. 공론장에서의 예술적 소통기제로 작동하고 있는지의 여하에 따라 살아있는 작품일 수도 있고, 죽은 작품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술가들의 삶과 시대의 숨결이 새겨진 한국 근현대미술의 명작들’을 소개하는 이 책은 ‘당신이 마주 서 바라봐 줄 때, 그림은 다시 살아난다’고 말한다. 물질적으로 살아남은 그림이 진정으로 살아남은 그림이 되기위해서는 대중과 함께 호흡하며 예술공론장에서 살아있는 그림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파란의 시대를 산 한국 근현대 화가 37인의 작품과 삶’이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제목이 말해주는 바대로, 고난과 역경의 20세기를 지나면서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은 그림들을 소개하는 책이다 150점의 도판을 싣고있는 이 책에는 파란만장한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면서 우리들에게 명작으로 남아있는 작품들에 대해 공감의 언어를 들려준다. 일간지에서 미술을 담당하는 현직 기자가 미술책을 썼다는 점에서 일견 건조한 사실보도 기반의 미술리포트일 것이라고 선입견을 가질 수도 있지만, 이 책의 필자는 대학에서 고고미술사학을 전공한 데다 십년동안의 현장 기자 경력동안 쌓아온 정보력을 더해 친근하면서도 탄탄한 글쓰기로 한국 근현대미술의 대표작가 37인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6부에 걸친 분류로 작가와 작품을 소대하고 있다. ‘1. 고뇌에서 움트는 희망, 2. 사무치는 사랑, 그리운 가족, 3. 이 땅, 이곳의 사람들, 4. 자연의 아름다움, 그 생명력, 5. 전통에서 벼려낸 새로움, 6. 끝없는 미의 추구’ 등 식민지에서 현대의 초입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정신적 요소들을 압축하여 구성하고 있다. 식민지시대 이산의 고통, 자연과 사회의 면면들, 근대사회의 전개와 전통의 문제, 근대적 의의식의 탄생과 전개, 현대적 미감의 발생과 전개 등을 담아낸 것이다. 

그림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 꼭 그 배경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예술은 시대의 거울이 되기 마련이다. 화가의 삶, 그리고 그림에 얽힌 사연을 알고 나면 감동은 배가 된다. 그렇다면 일제의 식민지배, 해방 이후 겪은 분단과 한국전쟁, 독재와 그에 맞선 투쟁, 급속한 근대문물의 유입과 산업화까지. 이 모두를 불과 한 세기에 겪은 우리 근현대사는 미술에 어떻게 나타나 있을까? 이 책 한권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값진 해답을 제시한다. 그것은 예술작품이라는 물질적 재화 속에 담겨있는 시대정신과 역사성, 개인적 삶과 사회 공동체의 고통과 애환, 희망과 환의의 기억들을 소환하여 깊이 반추해보는 일이다.

▷ 김준기

홍익대학교 예술학 석사, 미술학 박사.
현(現)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경기문화재단 '평화예술대장정' 프로젝트 총감독 겸 정책자문위원장, 예술과학연구소장, 지리산프로젝트 예술감독, 미술평론가.
전(前) 부산비엔날레 전시기획 팀장, 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제주도립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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