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오페라 ‘순이삼촌’

1978년 작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이 남긴 족적은 많은 전문가와 대중들에게 누누이 회자될 정도로 크다. 이미 제주4.3 진상규명을 위해 투신한 많은 선구자들의 뒤를 이어, 제주4.3을 대중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린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겠다.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이 세상에 나온 지 40년이 넘었다. 문학예술로서 업적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지만, 타 예술 장르로의 변환은 냉정하게 원작의 명성을 이어받지 못했다. 

2006년 원로 영화인 임원식이 영화화를 추진하면서, 제작 성공 기원제까지 지낼 만큼 의욕적인 분위기가 있었지만 투자 등을 이유로 끝내 무산됐다. 2013년에는 연극으로 등장했는데 당시 20대 나이였던 제주 출신 김봉건이 각색·연출과 제작까지 도맡았다. 유명 배우 양희경이 출연하며 화제를 모은 바 있지만, 당찬 취지와 달리 완성도는 평가가 분분했다. 2019년 제주국제대학교 영화연극학과도 아홉 번째 정기공연으로 연극 <순이삼촌>을 선택했다. 다만, 2013년 연극 극본을 각색자 동의 없이 사용해 취지가 반감됐다.

창작오페라 <순이삼촌>는 이런 배경을 가지고 등장했다. 누군가는 ‘언제 나온 순이삼촌이냐’라고 깎아내리겠지만, 기념비적인 예술 작품의 가치·업적을 어떤 방식이라도 계승해 남기려는 시도는, 4.3의 숙명이기도 한 기억투쟁에 있어 상당히 효율적이다. 

ⓒ제주의소리
창작 오페라 '순이삼촌' 7일 공연의 무대 인사 모습. ⓒ제주의소리

# 1
오페라 <순이삼촌>은 원작대로 두 가지 시공간을 큰 축으로 세웠다. 군인들이 주민들을 학살한 1948년 제주 북촌, 그리고 30년 전 희생자를 기리는 1979년 북촌 마을 제삿날이다. 소설 속 화자 ‘상수’과 순이삼촌의 서울 생활은 과감하게 짧은 장면·대사로 처리했다.

1막은 이미 순이삼촌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 상수와 친척들의 대화를 풀어냈다. 2막부터 4막까지는 북촌초등학교 학살 순간과 생존자들의 고통을 주목하면서, 옴팡밭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순이삼촌으로 끝맺음 짓는다.

오페라 <순이삼촌> 1막은 역사의 현장으로 안내하는 도입부 역할이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이 대립하는 구조는 음악의 힘으로 짜임새를 만든다. 그와 달리 나머지 2막~4막은 정극 연기, 무용, 퍼포먼스 등 음악 이외의 장르 비중을 과감하게 키웠다.

1막 ‘태사룬 땅을 밟다’는 소설에서도 상세히 나오듯 서북청년회 출신 고모부와 나머지 가족들 간의 공방이 핵심이다. 원작에서 고모부는 서북청년회 활동의 정당성을 설파하면서, 동시에 가족들 눈치를 보며 너스레도 함께 떠는 인물이다. 오페라에서는 6월 갈라콘서트에서 예고했듯이 보다 순도 높은 극우 성향으로 달라졌다. 

“위대한 이승만 박사”를 외치며 “우리(서북청년회)가 자유, 민주, 평화”라고 부르짖는 고모부를 길수, 상수 그리고 큰아버지가 맞선다. 같은 입장에 서있는 길수와 상수, 큰아버지 간에도 미묘한 차이가 존재한다. “필요한 죽음”라는 고모부에 길수·상수는 “무고한 희생”이라고 반박한다. 나아가 “왜 아무도 사과하지 않나”라고 국가 폭력의 부당함을 설파한다. 그에 반해 큰아버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공권력의 거대한 폭력 앞에 숨죽인 희생자들의 비통한 심정을 토로한다. 

이런 메시지는 성악가 4인의 노래에 실려 객석으로 향한다. 고모부의 노래는 곧바로 상수·길수·큰아버지·고모부의 4중창 <역사는 우리에게>로 연결되고 상수, 순이삼촌, 상수·길수 듀엣 순으로 이어진다. 4.3에 대한 관점과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감정까지...한 곡, 한 곡 마다 소설과 현실을 오가는 가사와 선율을 곱씹으면서 오페라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고모부가 부르는 <엣세반공, 우리가 이 땅의 주역>은 극우세력의 솔직한 마음을 끄집어낸 것 같은 노골적인 가사와 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선율로 이번 작품 속 어느 노래보다 흥미로웠다. 

1막은 순이삼촌의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예고하며 끝이 난다. 2막 ‘북촌, 이승과 저승 사이’는 군인들의 학살과 그 속에서 홀로 살아남아 넋이 나간 순이삼촌을 조명한다. 3막 ‘1948년 마침내 해제된 소개령’은 생존자들을 끝임 없이 괴롭히는 고된 노동과 압박을 비추고, 4막 ‘넋은 넋반에 혼은 혼반에’는 살아도 살지 못했던 순이삼촌의 죽음이다.

2막~4막에서는 관객이 주목할 요소는 노래 하나만이 아니다. 주민들을 공포에 질리게 만들고 옴팡밭 자리로 끌고 가 사살하는 2막은 정극 연기 비중이 크다. 시체 더미에서 홀로 생존한 순이삼촌이 자녀들의 환영에 사로잡힌 장면 역시 노래가 아닌 표현력에 초점이 맞춰진다.

4막은 순이삼촌을 괴롭히는 트라우마와 운명 같은 비극을 군무, 소리와 퍼포먼스, 살풀이로 표현한다. 망자를 위로하는 피날레의 마무리를 노래가 아닌 다른 예술로 채우는 시도는, 실험성이 다분한 연출 방향이다. 덕분에 관객들에게 색다른 여운을 안겨줄 수 있었다. 1막과 나머지가 선명하게 구분되는 구성은 작품 전체로 볼 때 다양한 매력을 품은 오페라로 기억하게 만든다.

# 2
오페라 <순이삼촌>은 7일과 8일 주·조연 출연진을 구분한 더블캐스팅으로 공연했다.

연출 겸 주인공 강혜명은 힘 있게 치고 나가는 목소리와 섬세한 표현력을 뽐냈다. 강정아는 역할에 녹아드려는 연기와 안정적인 바탕 위에서 도약하는 목소리로 순이삼촌을 연기했다. 전반적으로 7일은 노래·연기 모두 완숙한 중견 배우들로 출연진을 꾸렸다면, 8일은 경험을 쌓는 유망주들이 중심이 됐다. 

모두 각자 맡은 바 역할을 위해 노력한 가운데, 캐릭터를 표현하는 데 몰입한 장교 역의 젊은 성악인 윤한성은 꽤나 인상 깊었다. 노래 실력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연기할 배역을 관객들에게 어떻게 하면 각인시킬지 눈빛부터 걸음걸이까지 본인 만의 틀을 만들고, 그것을 무대 위에서 표출하려 했다. 덕분에 장교는 원작에 등장하지 않지만 생동감 있는 인물로 관객에게 다가왔다. 더블캐스팅 박경준의 장교가 관록의 카리스마라면, 윤한성은 꿈틀대는 광기로 서로 매력을 발산했다.

젊은 큰아버지 역을 연기한 고승보는 노래만큼 정극 연기도 매끄럽게 소화하며, 자신이 올해 제주예술단 합동 공연부터 왜 주목받고 있는지 몸소 증명했다. 할머니 역의 정유미는 전문 배우 못지않은 연기와 꼼꼼한 분장으로 존재감을 보였다.

오페라 <순이삼촌>에서 정극 연기는 극단 가람이 담당했다. 큰당숙을 연기한 이병훈, 작은당숙은 객원 배우 김병택, 육촌 현모는 이승준, 북촌초등학교에서 주민들을 추리는 직원에 이창익, 군인 장교에게 겁탈 당하는 가상의 여성 인물은 고가영, 단역을 담당한 양진영 등 가람의 대표 선수들이 대거 출연했다. 한국 전통 소재에 특화된 가람의 실력을 잘 발휘했다. 이상용 가람 대표는 협력 연출로 참여했다. 

가람 단원은 아니지만 극단 파수꾼 대표 조성진은 중간 간부급 군인을 맡아 강렬한 카리스마를 보여줬다. 영주고를 졸업하고 이제 막 성인이 된 고훈민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주민을 연기했다. “산에 들어가 싸우겠다. 가만히 앉아서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순 없다”는 짧지만 중요한 대사로 눈도장을 찍었다. 올해 2월 ‘프로젝트 그리다’ 공연 때 보다 연기도 한층 자연스러워졌다. 물론 긴장하는 모습도 보였지만 참여 자체만으로 소중한 경험이 되리라 본다.

밀물현대무용단은 순이삼춘의 깊은 곳에 자리한 끔찍한 트라우마를 온몸으로 구현했다. 4.3 70주년을 맞아 극단 경험과상상이 선보이며 4.3추념식까지 등장한 희생자 분장은 여기서도 큰 효과를 발휘했다.

여기에 자신만의 목소리와 분위기를 지닌 종합예술인 문석범, 사회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무용인 박연술, 어린이클럽 노래하자춤추자, 제주4.3평화합창단 등 오페라 <순이삼촌>은 여러 개인과 집단이 각자 자리를 채웠다. 

무엇보다 제주합창단이 없었다면 <순이삼촌>은 무대에 올릴 수 없었다. 둘째 날 예상치 못한 상황을 포함해 이틀 내내 중심을 잡아준 제주교향악단은 관객 눈에 보이지 않아도 단연 소금과 같은 존재였다. 유튜브에 공개된 공연 영상을 보면 정인혁 지휘자의 역동적인 지휘와 교향악단·합창단 단원들의 집중력을 볼 수 있다.  

각색 김수열, 미술 강요배, 사진 강정효를 비롯한 제작진 상당수도 제주에서 활동해온 예술인들이 역할을 맡았다. 특히 김수열은 2006년 영화화 당시에도 각색에 참여했었는데, 남다른 기분이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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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오페라 '순이삼촌' 8일 공연의 무대 인사 모습. ⓒ제주의소리

# 3
오페라 <순이삼촌>은 전체 출연진과 연주자, 제작진까지 포함하면 수 백 명인 대작이다. 관객의 상상 이상으로 결과를 만들어가는 과정 과정마다 확인하고 수정해야 하는 것들이 정말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첫째 날 7일 공연과 둘째 날 8일을 비교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차이가 많이 나타났다. 8일은 공연 시작을 알리는 프롤로그 곡에서 가사를 잊어버리는 큰 실수가 나왔다. 여기에 준비된 녹음 낭독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막이 오르는 상황이 2막과 3막 두 번 발생했다. 7일 공연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무대 양쪽 대사 화면이 실제와 어긋나는 실수도 몇 차례 반복되는 등 전반적으로 관객이 느끼는 완성도가 상이했다.

표면적으로 첫 날과 둘째 날의 차이는 강혜명을 비롯한 주·조연 배우 차이 밖에 없다. 제주MBC, 제주4.3평화재단 유튜브에서 올라와 있던 8일 공연 영상이 하루도 지나지 않아 9일 오전 비공개된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실수는 실수대로 인정하고, 더블 캐스팅으로 마친 이상 8일 공연에서 열연을 펼친 배우들을 고려하면 비공개 조치는 부적절한 소지가 없지 않다.

평소 김병택 배우의 안정된 연기와 발성은 익히 알고 있지만 작은당숙, 주민 사살을 승인하는 군 간부, 혼백까지 세 가지 상황에 한 명의 목소리를 ‘돌려쓰는’ 건, 배우의 역량을 떠나 부적절하다.

2막 주민들의 학살 장면도 때리는 사람, 맞는 사람 간의 합이 맞지 않거나 한쪽이 어설픈 경우가 자주 발견돼 몰입이 떨어졌다. 물론, 군인과 주민 배역을 맡은 배우 대부분이 노래라는 1순위 역할이 주어진 제주합창단원들이기에 그 이상을 요구하기란 현실적으로 힘든 면이 있다. 차라리 합을 주고받을 배우를 더 배치한다면 공포감이 지금보다 더욱 살아나리라는 사족이 남는다. 주민을 연기한 정극 배우들도 위기 상황에서 미리 준비해온 레퍼토리가 많지 않아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마지막 순간에서 무용가 박연술은 순이삼촌의 아이들 돌무덤뿐만 아니라 벽을 어루만진다. 그 벽은 북촌 주민들이 끌려가 죽임을 당한 옴팡밭의 것이다. 이는 단순히 순이삼촌 만이 아닌 북촌 주민, 나아가 4.3 당시 억울하게 희생당한 도민 전체를 위무하는 손길로 느껴졌다. 지금도 의미가 전달되지만 학살 장면에서 2명 정도가 벽에 달라붙는 정도가 아닌, 예를 들어 더 많은 도민들이 벽에 대한 연기를 선보이는 식으로 확장 가능성을 상상해봤다.

경직된 자세로 연기에 임하는 조연들은 경험이 쌓이면 차차 나아지지 않을까 싶다. 강정아 배우가 자주 정면을 응시하는 시선 처리는 부담스러웠지만, 밀물현대무용단과의 합동 안무는 멋지게 해냈다. 

# 4
약을 털어넣고 세상을 등진 순이삼촌. 그제야 꿈에 그리던 자녀들을 만나게 됐지만 두 아이들은 이내 돌아서고 순이삼촌은 홀로 뚜벅뚜벅 저승길로 떠난다. 서정적인 분위기를 기대한다면 자녀들과 함께 하는 장면을 그려볼 법도 하지만, <순이삼촌>은 고독한 걸음만을 보여줬다. 덕분에 작품이 지닌 비극이 한층 더 부각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오페라 <순이삼촌>은 원작이 보여주려 한 메시지와 감정을 최대한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어린 길수, 상수 귀여운 듀오는 제외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음울하고 내면의 감정을 짓누르며 때로는 섬뜩한 최정훈의 음악은 작품의 시작부터 끝까지 책임진다. 

예술감독, 연출, 각본, 작사에 배우까지 1인 5역 이상을 소화한 강혜명은 이번 작품에 대해 상당한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공식 추념식 단상에서 노래를 바치고, 제주4.3유족회 홍보대사를 맡고 있는 입장에서 다른 어떤 공연보다 단단한 마음으로 제작에 임했을 것이다. 중간 쉬는 시간 15분 포함해 무려 3시간을 꽉꽉 채우고, 북촌리 실제 사건 개요에 유족 인터뷰, 4.3 특별법 개정 촉구 메시지까지 보여주니 그 마음을 정말 충분히 알겠다. 처음인 만큼 채우는데 몰두했다면 앞으로는 차분하게 덜어낼 것은 덜어내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종합 예술이자 고급 예술 이미지를 지닌 오페라까지, 제주4.3의 공연 예술화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반가운 일이다. 

제주시, 제주4.3평화재단과 제주 예술인들이 합심해 만든 의미 있는 결과만큼 과정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영화화 시도, 연극화와는 별개로 제주 예술인들은 한쪽에서 꾸준히 도전을 이어갔다. 바로 제주민예총이 매해 4월 3일이 돌아올 때마다 열었던 '4.3거리굿'이다. 모르는 도민들도 있겠지만 이미 제주 안에서는 <순이삼촌>과 강요배의 연작 <동백꽃지다>를 포함한 4.3예술을 복합 공연으로 재구성하는 시도가 존재했다. 그렇기에 오페라 <순이삼촌>은 무수한 예술가들이 거리에서 땀 흘린 노력들이 꾸준히 쌓이고 쌓인 토양에서 피어난 화려한 꽃으로 감히 부르고 싶다. 

“이름 없어도 영원히 기억해야 할 사람들이, 다시는 잊지 말아야 할 그 이름...”
- <이름 없는 이의 노래> 가운데 일부.

이틀 동안 제주아트센터를 가득 채운 외침은 제주4.3 그 자체만이 아니라 구석구석에서 자기 방식으로 4.3을 잊지않고 알려온 예술인들에게도 적용된다. 4.3 기억투쟁의 물꼬를 튼 소설 <순이삼촌>처럼, 오페라 <순이삼촌>을 통해 4.3을 예술로서 만나는 기회가 더 많아지길 바란다.

<순이삼촌>은 제주MBC과 제주4.3평화재단 유튜브 채널에서 다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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