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법정의기록] (6)행불인 34명 재심청구 심문절차서 임춘화 할머니 오열...75년 모진 삶 편지로 호소

제주4.3당시 불법 군사재판으로 아버지 故 임청야씨(1921년생)를 먼저 보내고 고아로 살아온 임춘화(75)씨가 지난 6월8일 제주지방법원에서 발언하는 모습.
제주4.3당시 불법 군사재판으로 아버지 故 임청야씨(1921년생)를 먼저 보내고 고아로 살아온 임춘화(75)씨가 지난 6월8일 제주지방법원에서 발언하는 모습.

“너무 배가 고파서 솥덕(부뚜막) 옆에 앉아서 고구마, 감자인줄 알고 씹었는데 그게 비누였어요. 부모님은 다 떠나고 고아처럼 산 75년 내 삶. 나처럼 억울한 사람이 또 있습니까”

아버지 임청야(1921년생)씨를 여의고 빨갱이로 내몰려 엄마까지 육지로 떠나보낸 임춘화(75)씨가 증인석을 박차고 일어나 오열했다. 애기구덕에 있던 세 살배기는 주름 가득 할머니가 돼서 법정에 섰다.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장찬수 부장판사)는 국방경비법 위반과 내란실행 등의 혐의로 불법군사재판을 받고 사라진 행방불명인 34명의 재심청구 사건에 대한 심문절차를 9일 진행했다.

재심청구인인 임 할머니는 1948년 4.3당시 어머니 품에서 지내던 두돌잡이였다. 서귀포시 대정읍 신평리에서 조부모와 어머니 뱃속의 동생까지 포함해 3대가 농사를 지내며 살았다.

초토화 작전으로 마을 전체가 불에 타자, 가족들은 어머니의 부모님들이 살고 있는 대정읍 영락리로 몸을 피했다. 이 과정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가 줄줄이 군경에 붙잡혔다.

아버지는 만삭의 아내와 딸을 굴 속에 숨기고 포승줄에 묶인 채 끌려갔다. 만난 적도 없는 무장대 폭도들에게 협조했다는게 끌려간 이유다. 그게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이듬해인 1949년 7월5일 불법적인 군사재판에서 징역 7년을 선고 받아 목포형무소에 수감됐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형무소 문이 열리면서 아버지의 행적은 완전히 끊겼다.

어머니마저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이유로 처갓집에서 친척이 있는 육지로 보내면서 임 할머니는 어린나이에 고아 신세가 됐다.

“아버지는 행방불명되고 어머니는 동생과 함께 제주를 떠나고. 나 혼자 친척집에 얹혀사는데, 내 이름도 없었어요. 다들 누구네 집의 괸당(친적)이라고. 누구하나 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없었어...(오열)”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하고 부모님 재산마저 다 빼앗긴 채 힘든 유년생활을 보냈다. 진술 내내 감정이 복받친 듯 증인석에서 벌떡 일어나 가슴을 쥐어짜며 흐느꼈다.

“배가 고파서 솥덕(부뚜막) 옆에 고구마, 감자 같은 게 있어서 냉큼 씹었는데 비누였어요. 얼마나 속상한지. 하늘을 봐도 울고 땅을 봐도 울고. 지난 내 인생이 너무 원통합니다”

제주는 난방만을 위한 굴묵(굴뚝의 제주어) 아궁이가 온돌과 연결되어 있고, 육지와 달리 굴묵과 별도로 음식을 조리하는 솥덕(솥을 걸어놓고 불을때는 화덕)이 있었다. 당시 비누는 감자나 고구마가 불에 탄 것처럼 거멓게 생겨 감자떡비누라고 불렀다.

성인이 돼서도 4.3의 흔적은 임 할머니를 따라다녔다. 가정을 꾸리고 세 아이의 엄마가 됐지만 40년 전에도 관덕정에 위치한 보안사에서 경찰들이 들이닥쳐 경찰서로 임 할머니 내외를 연행했다.

다짜고짜 4.3당시 아버지의 폭도 이야기를 하라는 협박이 이어졌다. 육지 출신인 남편은 당시 상항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갖은 폭행과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남편이 4.3에 대해서 뭘 알겠습니까. 외삼촌하고 외할머니까지 잡아가서 진술서를 써내라고. 며칠 뒤에 석방시켜주면서 거기서 있던 일을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말라고 했어요”

감정이 격해진 임 할머니는 법정에서 오열하다가 변호인과 법정경위의 도움을 받고서야 감정을 추슬렀다. 이어 품 속에서 편지를 꺼내고 재판장을 향해 꼭 읽어달라며 호소했다.

“재판장님, 제 75년 모진 삶이 여기 다 써져 있습니다. 오늘 이렇게 재판장에 서기 위해 억울한 삶을 지금까지 이어온 것 같습니다. 부디 이 억울함을 풀어주십시오. 제발 좀 부탁드립니다”

제주4.3희생자유족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는 2019년 6월3일 법원에 행불인수형자 10명에 대한 첫 재심을 청구했다. 올해 2월18일에는 행불인수형자 393명이 추가로 청구에 나섰다.

서류미비 등을 이유로 제외된 인원을 적용하면 실제 재심 대상자는 349명이다. 재심청구인은 342명이다. 6월8일을 시작으로 4차례 심문절차를 거쳐 132명에 대한 심문 절차가 이뤄졌다.

법원이 재심 개시 결정을 하면 70여년만에 4.3행방불명인 수형자에 대한 첫 재심 정식 재판이 열리게 된다. 검찰이 최근 의견서를 제출하면서 조만간 개시 여부가 가려질 전망이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