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주년, 한국전쟁과 제주] (13) 제주신보 속 한국전쟁과 제주 ③
한국전쟁 기간 '제주신보' 복사본, 더 늦기 전 온라인 아카이브 필요

한반도가 한국전쟁 폐허로부터 다시 일어선지 70년이 흘렀습니다. 물론 제주는 한반도 최남단이라는 지리적 환경으로 6.25의 직접 피해지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같은 환경은 6.25 전란 기간 동안 한국전쟁과 연관된 시설·기관들은 물론, 육지부의 피난민과 전쟁 포로들까지 대거 제주로 집중하게 하는 요인이 됐습니다. 4.3이라는 현대사의 비극을 치르고 있던 당시의 제주사회는 한국전쟁으로 유사 이래 정치·군사·외교뿐만 아니라 가장 큰 지역사회 격변까지 경험하게 됩니다. [제주의소리]가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전쟁기 육지에서 제주로 피난이 이뤄지는 과정과, 정부와 군에서 제주도를 적극 활용하면서 남긴 ‘사람과 장소’들을 재조명해보는 [70주년, 한국전쟁과 제주] 기획을 연재합니다. 전쟁의 실상과 전후의 변화상을 살펴보는 이번 기획을 통해 한국전쟁기의 제주역사는 물론 제주인들의 삶을 되돌아봄으로서 ‘항구적 평화’의 중요성을 미래세대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글]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는 3년 1개월 간 이어진 한국전쟁을 임시 봉합하는 휴전 협정이 체결됐다. 유엔군, 중국군, 북한군 대표가 각각 협정문에 서명한 이후 한반도는 70년 가까이 지구촌 유일의 분단 국가로 존재하고 있다.

당시 <제주신보>에도 한국전쟁의 휴전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전쟁이 멈춘 기쁜 소식이지만, 당시 휴전협정 전후의 보도를 보면 마냥 반가워할 수 없는 정치공학적 이해관계도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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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신보 1953년 7월 28일 기사. 한국전쟁 휴전 협정 체결 소식을 호외로 보도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 드디어 휴전! 하지만 반대 집회?

휴전 첫 보도는 체결 다음 날인 7월 28일자에 실린다. 

‘휴전!!’이라는 문구와 함께 ‘쌍방 대표 정식 조인 / 27일 상오 5시 1분’이라는 소식을 호외로 전한다. 다른 기사에는 ‘포로 교환 즉시 개시 / 크라크 사령관 언명’과 ‘실질적인 전투 정지 령 / 미 8군 각 사단에 지시’ 같은 후속 조치 기사들도 함께 보도됐다.

다음 날인 29일 자에는 ‘중립군 입국 절대 불가능 / 유리한 회합에는 참가한다 / 29일 변 외무부장관 언명’이라는 변영태 외무부 장관의 입장을 실어 휴전 이후 상황을 연이어 보도하고 있다. 30일 자에는 워싱턴 발 소식으로 ‘재한 미군 예비식량 / 일 만 톤을 한국민에 / 아 대통령, 크 사령관에 배급 지시’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당시 미 백악관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크라크 장군에게 한국에 있는 군 예비식량중 1만톤 정도를 전쟁 피해를 입은 한국민에게 배급할 것을 지시했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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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29일자 제주신보.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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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30일자 제주신보. ⓒ제주의소리

흥미로운 사실은 협정 체결 이전 수개월 동안 ‘휴전 반대’ 소식이 <제주신보> 지면을 채웠다는 점이다. 본격적인 휴전 반대 움직임이 등장한 것은 그해 4월부터다. ‘궐기대회’ 방식의 휴전 반대 행사들은 제주지역 애국단체, 피난민들, 부인회, 상이군인, 학도호국단 같은 단체들이 주축이 됐다. 휴전 반대 집회에는 각급 학교 학생들도 매번 빠지지 않는다. 

<제주신보> 6월 12일자를 보면 ‘한국 전토서 휴전 반대 / 절정에 달한 민족의 분노! / 각지서 사태 각- 심각화!’라는 상당히 강경한 제목이 1면을 차지하고 있다. 기사에는 국회를 비롯해 전국에서 벌어지는 휴전 반대 움직임을 소개한다.

10대 청소년들의 시위 소식은 특히 인상적이다. '통일 없는 곳 나라도 없다. / 10여세 소년들도 시위' 라는 같은 날 1면 3단 기사다. 

이 기사를 잠깐 소개하면 "서울시내에서 시위행진을 하던 약 5백명의 10대의 한국 학생들은 한국전쟁 3년째에 처음으로 미국인은 집으로 돌아가라고 외쳤다. 프락카드(플래카드)를 들은 소년들은 오후 3시50분 유엔 종군기자숙소를 향해 시위행진을 개시하였는데 ... 중략 ... 2시간 동안에 두 번이나 동숙소를 향해 시위행진을 한 것인데 칼빈총으로 무장한 헌병들은 문에서 20 야드 떨어진데서 그 줄을 맞이하여 그들의 진로를 막고 경계선을 쳤다. 이에 학생들은 구호 선창자의 지도말에 영어로 '우리는 휴전을 반대한다. 통일없는 곳에 나라는 없다'고 외쳤다." 는 내용이다. 

역사적으로 10대들은 국가와 민족의 위기 때마다 선명한 목소리를 내왔다. 휴전이 가시화되던 이 당시에도 10대 학생들이 전면에서 '휴전 반대, 완전한 통일'을 부르짖으며 일제강점기 이후 해방을 맞은 나라가 남북으로 두동강 나 분단되는 것을 반대했던 것이다. 

2면에서도 전날 제주에서 열린 북진통일추진위원회 주최 ‘정부 대안지지 총 궐기대회’ 소식을 전한다. 기사 제목은 ‘정부 대안 지지 총궐기 대회 성황 / 우리의 살길은 북진 통일! / 견고한 민족의 기상을 재현시’라고 적혀있다. 내용을 보면 관덕정 앞 광장에 각 정당, 사회 단체 대표, 지방 유지들을 비롯해 학교 학생들이 대거 참여했다고 나온다. 세대와 계층 구분없이 통일을 갈망하는 전국민적 염원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1953년 6월 12자 제주신보 1면. ⓒ제주의소리
1953년 6월 12자 제주신보 1면.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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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6월 12자 제주신보 2면. ⓒ제주의소리

궐기대회 옆에는 국방부 병무국장 육군 준장 박승준의 글 <장정 및 가족에게 고함>이 실렸다. 휴전 대신 조국통일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박승준은 1890년생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에서 소좌 계급까지 오른 뒤에, 일본제국이 패망할 때까지 만주국군 장교로 복무한 인물이다. 이런 행적 때문에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반민족 행위자다. 박승준은 1948년 10월 제14연대장에 임명됐다. 바로 여수·순천사건이 벌어진 부대다. 이 사건을 책임지면서 군복을 벗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복직했으며 군 고위직을 거쳐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반민족 친일 행위를 저지르고도 승승장구한 군인, 동시에 제주4.3과 맞물린 여수·순천사건의 밀접한 책임자를 제주 지역신문에서 만나는 경험. 안타까운 한국 현대사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다.

국가기록원의 ‘6.25 전쟁’ 온라인 자료집에 따르면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전쟁 휴전을 반대했는데, 휴전 회담을 저지하고자 6월 18일 반공포로 2만6000명을 석방시킨다.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팽덕회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휴전회담 이후 가장 강력한 공격 작전인 ‘7.13 공세’를 취하고, 유엔군과 한국군은 위기 국면을 맞기도 했다. 휴전을 둘러싸고 미국과 이승만 대통령은 심각한 정치적 대립을 겪었는데, 심지어 ‘이승만 제거계획’까지 거론되기에 이른다. 결국 한국정부는 휴전 협정을 묵인하는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군사·경제 원조, 그리고 한국군 증강 등의 약속을 받아냈다.

휴전 협정을 목전에 둔 7월 14일자 <제주신보>에는 ‘일익고조하는 휴전반대 / 노도의 시위 대열 / 제상고, 제중, 신성여중고 / 천여학도들의 기염충천’ 기사가 실린다. 이 기사는 12일 오후 5시부터 7시까지 열린 휴전반대 시위행진을 소개한다.

제주를 포함해 전국에서 벌어졌던 휴전 반대 목소리는 이런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 1953년 6월 19일자 <제주신보> 1면에는 ‘반공 포로 석방 / 인권 옹호 정신에 입각 / UN 측 동정을 확신 / 이 대통령 정식 담화 발표’를 비중있게 소개한다. ‘인권 옹호 정신에 입각’이란 문구는 정부 입장을 온전히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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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14일자 제주신보.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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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6월 19일자 제주신보. ⓒ제주의소리

# 휴전 전후로 접하는 도민 소식

7월 13일자 보도 '이 몸 바처 나라가 선다면 / 열렬! 재복무 지원 / 6 상이용사, 멸공전선에'는 ‘본적은 남원면에 두고 대정면 무릉리에 거주하는 1922년생 현O산 군’의 인터뷰가 실렸다.

현 씨에 대해서는 “괴뢰 남침을 결기로 멸공 전선에 투신, 용전감투 타 영예의 부상을 입고 재작년 가을 10월 15일 명예 제대 귀가”했다고 설명돼 있다. 기사는 “성공 남북통일을 위해서는 남은 한 팔, 남은 한 다리마저 조국에 이바지 하겠다…시민들은 눈물을 지우고 있다”고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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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13일자 제주신보. ⓒ제주의소리

휴전 협정 체결 소식을 보도한 7월 28일자 <제주신보> 2면에는 ‘병역 문제’ 기사가 실린다. 예나 지금이나, 특히 절체절명의 국가위기 사태에서도 병역을 회피하는 고위관료 자녀의 병역문제는 크나 큰 사회적 문제였다.  

‘지검 허 검사장 당면 문제에 담 / 병역 기피자 철저 단속 / 참 중상모략은 유감’이란 제목이다. ‘허 검사장’은 1952년 7월 18일부터 1954년 5월 14일까지 제주지검장을 지낸 허만호 검사를 말한다. 기사에 보면 ‘사건 발생 후 수개월이 되었으나 동 사건은 해당 공무원 중 범법자에 대해서는 사표를 제출케 한 후 특별히 기소하겠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한국전쟁 당시 병역기피 문제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됐던 모양이다. 이진수 국회의원이 1951년 전선을 시찰하고 보고한 문서에는 ‘지식층 또는 고위층 자제들의 병역 기피 문제가 심각해 국민들의 반발이 있으니 시정하라’는 건의까지 담겨있다. 시대를 거슬러 씁쓸한 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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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28일자 제주신보. ⓒ제주의소리

7월 29일에는 9일 전 폭우로 인해 농경지 피해가 컸다면서 ‘하(여름) 작물 감 수난 면시 / 유실 전지의 재파종 위해 / 중앙에 종자 알선을 요청’을 알렸다.

이틀 뒤 신문에는 ‘재연하는 분리(分里) 분쟁 / 수원, 한수리 간 대립 경화’ 소식이 보도됐다. 한수리와 수원리는 1953년 4월 29일 분리됐다. 분리 결정이 내려진 지 3개월이 지나도 여전히 주민 간에 갈등이 해소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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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29일 제주신보.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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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31일자 제주신보. ⓒ제주의소리

# 70년 전 용사들을 기억하며

<제주신보> 1953년 9월 26일자 기사 ‘포근히 맞자! 고토의 품에 / 귀휴 용사 환대에 각종 준비’에는 고향으로 돌아올 참전 군인들을 맞이하는 제안이 담겨있다.

버스회사는 할인 제시하나 가급적 무료 승용하도록 한다
각 진료소에서는 휴가 장병 및 그 가족에 무료 진료 한다.
사회단체와 학교를 통해 위문 물품을 모집한다.
사회단체 또는 시 군 읍 면 동 리 단위로 위안좌담회를 개최한다
산지부두에 휴게소를 설치한다

11월 11일은 올해 처음 법정기념일로 지정된 ‘UN참전용사 국제 추모의 날’이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한국전쟁 참전국은 21개국이다.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이 전투 병력을 파견했고, 5개 국가는 의료지원단을 보냈다. 40여 개국은 물자를 지원했다.

참전 용사 맞이 소식을 보도한 옛 신문 지면을 보며, 동아시아의 낯선 땅에 와서 쓰러져간 군인들이 있었기에 현재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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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9월 26일자 제주신보. ⓒ제주의소리

한편,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까지, 한국전쟁 당시 제주지역 소식은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가 2002년 ‘제주4.3사건 자료집’을 제작하면서 참고 자료로 남긴 복사 인쇄본이 사실상 유일하다. 그 마저도 1950년 8월 1일부터 시작한다.

남은 기록이 영구적으로 훼손, 상실되기 전에 하루 빨리 온라인으로 저장하는 작업이 필요한 이유다. 2002년 자료집 작성에 참여한 박찬식 전 제주학연구센터장은 “한국전쟁 당시 제주지역의 사회상과 여론은 의미 있는 가치가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의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처럼 이제는 사료를 온라인으로 아카이브해야 활용도가 높은 시기가 됐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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