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법정의기록] (8)행불수형인 재심 청구 6차 심문...김명춘 할아버지 70년 전 형님 이야기 진술

제주4.3사건으로 형님(김명환)을 잃은 재심청구인 김명춘(84) 할아버지. 김 할아버지는 70년 전 행방불명인이 된 형님의 한을 풀어달라며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형은 1948년 4.3당시 결혼했지만 혼인신고도 못하고 행불인이 됐다.
제주4.3사건으로 형님(김명환)을 잃은 재심청구인 김명춘(84) 할아버지. 김 할아버지는 70년 전 행방불명인이 된 형님의 한을 풀어달라며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형은 1948년 4.3당시 결혼했지만 혼인신고도 못하고 행불인이 됐다.

“우리 형님 혼인신고도 못하고 토벌대에 끌려갔어. 수용소에서 멀리서나마 봤는데 물지게를 지고 가는 모습이 사람취급도...”

20세 나이에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 결혼식까지 올렸지만 4.3의 광풍은 행복해야 할 신혼 생활까지 무참히 짓밟고 지나갔다.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장찬수 부장판사)는 국방경비법 위반과 내란실행 등의 혐의로 불법 군사재판을 받고 사라진 행방불명인 40명의 재심청구 사건에 대한 심문절차를 23일 진행했다.

재심청구인인 김명춘(84) 할아버지는 4.3 당시 11살이었다. 제주시 도련동에서 아버지, 어머니, 형, 동생과 농사를 하며 생활했다. 누이 2명이 출가하면서 5명이 한 집에서 오붓하게 지냈다.

집 안의 기둥이었던 큰형(김명환)은 4.3 당시 20세 청년이었다. 따뜻한 봄날 군경의 눈을 피해 지금의 마을회관인 공회당에서 가족들을 불러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예식이 끝나고 4.3이 터지면서 새신부는 친정집에서 생활했다. 다행히 같은 마을에 사는 처녀와 짝을 이뤄 얼굴은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불안한 신혼생활은 뜻하지 않은 불행으로 이어졌다.

1948년 5월 군인들이 마을로 들이 닥쳐 밭일을 하던 형을 끌고 갔다. 2~3개월이 지나서야 가족들은 형의 행방을 들을 수 있었다. 관덕정 옆 수용소(당시 제주경찰서)로 끌려갔다는 이야기였다.

가족들은 서둘러 경찰서로 향했지만 면회는 허락되지 않았다. 멀리서나마 물지게를 짊어 걸어가던 형의 모습만 가까스로 볼 수 있었다.

“갈중이(감물염색 옷)를 입고 걸어가는데, 군인인지 경찰인지 형님 앞뒤로 몽둥이를 들고 갔어. 이건 뭐 동물도 아니고. 인간취급을 하지 않았어. 그게 내가 본 형님의 마지막 모습이야” 

형이 그리워 또 다시 먼 길을 걸어 경찰서를 찾았지만 이미 사라진 뒤였다. 어디론가 끌려갔다는 대답뿐이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후 대구형무소에서 편지 한통으로 집으로 날아들었다.

무슨 이유로 어떤 절차를 거쳐 대구형무소로 끌려갔는지 알려주는 내용은 없었다. 그저 잘 지내고 있다는 내용 뿐이었다. 1999년 수형인명부가 세상에 공개되면서 형의 이름도 확인할 수 있었다.

수형인명부에는 형이 1949년 7월2일 열린 군사재판에서 징역 15년의 형을 받아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후 한국전쟁까지 터졌지만 시신조차 찾지 못한 형은 여전히 행방불명인이다.

“형님 제사는 내가 지내지. 죽은 날을 모르니 생일날에 하는 거야. 매해 음력 3월28일. 형님이 잡혀가고 형수도 행방불명됐어. 이 억울함을 누가 알아줄까. 대체 누가...”

제주4.3희생자유족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는 2019년 6월3일 법원에 행불인수형자 10명에 대한 첫 재심을 청구했다. 올해 2월18일에는 행불인수형자 393명이 추가로 청구에 나섰다.

서류미비 등을 이유로 제외된 인원을 적용하면 실제 재심 대상자는 349명이다. 재심청구인은 342명이다. 6월8일을 시작으로 6차례 심문절차를 거쳐 210여명 대한 심문 절차가 이뤄졌다.

법원이 재심 개시 결정을 하면 70여년만에 4.3행방불명인 수형자에 대한 첫 재심 정식 재판이 열리게 된다. 검찰이 최근 의견서를 제출하면서 이르면 이달 중 개시 여부가 가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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