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시선] 화해·상생은 진실이 전제되어야

“초토(焦土)작전은 인도적으로 결코 허용될 수 없고, 전시에도 명령하거나 묵인한 사령관은 전범으로 처형을 면키 어렵다. 하물며 전후(戰後) 평화시에 자기가 군정(軍政)하는 영토 내의 국민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다고 세상에 알려지면 그 결과는 엄청날 수 밖에 없다. 전범재판을 받지 않는다 해도 그는 인도적으로 처형될 것이다”

4.3당시 초토화 작전을 거부했다가 미 군정에 의해 해임된 김익렬 중령(당시 9연대장)이 후임인 박진경 중령에 대해 기술한 유고록의 일부다. 1988년 세상을 떠난 김익렬 중령은 “이 원고가 가필(加筆)되지 않은 그대로 세상에 알릴 수 있을 때 역사 앞에 밝히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유고록은 4년 뒤에야 세상에 공개됐다. 

김익렬 중령은 평화주의자였다. 무장봉기 세력에 대한 진압 명령을 받았으나, 오히려 경찰을 제지해야 한다고 맞섰다. 무장봉기의 원인이 경찰과 서북청년회의 과도한 탄압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행됐다면 대량학살을 막을 수도 있었던, 이른바 ‘4.28평화협상’의 주역이기도 했다. 이러한 행적은 제주4.3평화공원 내 ‘의로운 사람’ 코너에도 소개돼 있다. 

‘그’(박진경)는 인도적으로 처형됐는가? 아니다. 비록 부하들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지만, 그는 지금도 제주에 ‘살아있다’. 잘못된 기록으로 말이다. 

“공비 소탕에 불철주야 수도위민의 충정으로 선두에서 지휘하다가 불행하게도 장렬하게 산화하시다”

제주시 충혼묘지 입구에 자리한 박진경 추모비의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왜곡도 이런 왜곡이 없다. 추모비는 1952년 ‘제주도민 및 군경원호회 일동’ 명의로 세워졌다가 마모 등으로 인해 1985년 다시 세워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픽이미지=김찬우 기자] ⓒ제주의소리
4.3당시 '초토화작전'의 불을 당긴 박진경 연대장은 제주 뿐 아니라 그의 고향 남해에서도 오늘날까지 잘못 기억되고 있다. 제주시 충혼묘지 입구에 세워져있는 추모비(왼쪽)와 경남 남해 군민공원에 있는 추모 동상(오른쪽). 4.3유족들이 울부짖지 않을 수 없다. [그래픽이미지=김찬우 기자] ⓒ제주의소리

박진경은 초토화 작전의 불을 당긴 장본인이다. 일본군 소위 출신인 그는 연대장 취임사에서 “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명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했다. 

곧바로 강경일변도의 작전을 펼쳤다. 6주 동안 무려 4000명을 체포했다. 1948년 5월6일 제주에 온 박진경은 이 공로(?)로 한달도 지나지 않은 6월1일 대령으로 진급했다. 그의 진급은 선임자를 앞지른 것이었다. 특진은 무모한 체포 작전을 ‘성공적인 작전’으로 평가한 미 군정장관 딘 소장의 배려였다. 하지만 박진경은 무자비한 작전 방침에 불만을 품은 부하들에 의해 6월18일 암살됐다. 제주에 온지 불과 40여일 후의 일이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박진경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처럼 중산간 마을을 누비고 다니면서 불과 한 달 사이에 수천 명의 ‘포로’를 양산해낸 박진경 연대장의 작전은 주민들을 더욱 산으로 도망치게 했고, 자신은 암살당함으로써 사태 해결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더욱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맞다. 2013년 10월15일 정부(국무총리 산하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확정한 바로 그 보고서다. 이걸 근거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도, 문재인 대통령도 제주도민과 4.3유족들에게 사과했다. 

따라서 박진경 추모비의 비문은 이렇게 고쳐져야 마땅하다. 

“공비 소탕이라는 거짓 명분을 앞세워 수많은 무고한 양민을 탄압하다가 부하들에 의해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다”

물론 비현실적이다. 추모비에 악행을 담는 것은 우습다. 그렇다고 내용을 그대로 둔채 비의 명칭을 바꿀 수도 없다. 이전한다면 또 어디로 옮긴단 말인가. 철거 외에는 답이 없다. 마침 충혼묘지 일대에 국립묘지가 조성되고 있다. 지금이 공론에 부칠 더없이 좋은 기회다. 

최근 제주도의회 정례회 도정질문에서도 철거 여부가 도마에 올랐다. 원희룡 지사는 즉답을 피했다. “4.3특별법의 정신에 맞게 잘 처리하겠다”고만 짤막하게 대답했다. 고충은 이해한다. 진실 외에도 정서(?)의 문제가 걸려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좌고우면할 수 없다. 진실은 이미 드러났다. 

도의회에서 추모비 철거 문제가 대두된 것은 한 두 번이 아니다. 2017년 이후 최소 4명이 철거를 요구했다. 2017년 당시 도청 간부의 답변을 기억한다. “화해와 상생의 관점”을 이야기했다. 그냥 묻어두자는 말로 들렸다. 화해와 상생의 꽃은 진실의 토대 위에서 피어난다.

박진경은 제주 뿐 아니라 고향인 경남 남해에서도 오늘날까지 잘못 기억되고 있다. 남해군 군민공원에 그의 동상이 서 있다. 동상에서 약 20m 떨어진 곳에는 현무암으로 된 돌하르방 2기가 세워져있다. 감정이 묘해진다. 동상의 비문은 제주 추모비의 내용과 궤를 같이한다. 지난 2000년과, 그 전에도 현지 시민사회 주도로 철거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역사의 아니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정작 추앙받고도 남을 김익렬 연대장은 어디에도 그 흔한 공덕비 하나 없으니 말이다. <논설주간 /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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