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예술칼럼, Peace Art Column] (35) 토미야마 카즈미

제주도는 평화의 섬입니다. 항쟁과 학살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주4.3이 그렇듯이 비극적 전쟁을 겪은 오키나와, 2·28 이래 40년간 독재체제를 겪어온 타이완도 예술을 통해 평화를 갈구하는 ‘평화예술’이 역사와 함께 현실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2018년부터 세 나라 세 섬의 예술가들이 연대해 평화예술운동을 벌이고 있어 이에 대한 창작과 비평, 이론과 실천의 공진화(共進化)도 매우 중요합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세 섬 예술가들의 활동을 ‘평화예술칼럼(Peace Art Column)’을 통해 매주 소개합니다. 필자로 국외 작가들이 참여하고 있어 중어, 일어, 영어 번역 원고도 동시 게재합니다. [편집자 글]

2020년은 일본 작가 미시마 유키오가 사망한 지 50년을 맞은 해이다. 살아있다면 그는 95세에 이르렀을 것이다. 조숙한 천재로 불리며 노벨문학상 후보로 꼽히며 문단을 초월하는 작가로 늘 세간의 주목을 받던 인물이 자위대 주둔지에서 대원들에게 궐기를 촉구하며 격문을 띄운 끝에 할복자살한 게 1970년이다. 근년, 그의 행동의 의미를 재고하는 시도가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미시마와 도쿄대학 전공투(전공투는 1960년대에 나타난 대학생들의 반체제 운동 조직체)와의 공개 토론회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되어 화제가 된 것도 그 현상의 하나일 것이다. 미시마의 ‘유언’은, 미시마 이후의 세대에 의해서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미시마 유키오의 인터뷰집 '고백' 표지. 출처=알라딘.
미시마 유키오의 인터뷰집 '고백' 표지. 출처=알라딘.

1945년 미시마는 미군과의 전투에 나설 각오로 천황 폐하 만세라고 유서를 쓴 20세의 군국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고 패전, GHQ 점령, 강화와 주권 회복, 그리고 경이로운 고도 경제성장을 이룬 전후 일본을 경험했다. 엘리트로 대장성의 관료가 되어, 퇴직하고 전업 작가로 변신한 미시마의 화려한 작가 생활은, 일본의 전후 부흥과 보조를 맞추는 것 같았다. 물론 누구나 알다시피 일본의 전후 부흥은 미국의 국익에 봉사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미국은 일본국민 통합을 위해 천황제를 온존하고 한국전쟁 특수의 혜택을 주었으며 안전보장으로서 많은 토지를 제공하게 하였다. (이윽고 미군기지는 오키나와에 집중된다.) 더욱이 미국은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반성으로서 일본정부가 전쟁포기의 '평화헌법'을 제정하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전략상의 필요에 의해 새로운 군대조직 창설을 인정하였고, 이것이 자위대로 전개되었다. 미시마는 법 이론적으로 자위대를 현행 헌법 위반의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일본이 대미 종속의 기만을 해소하고 국토방위의 자주성을 회복하지 않는 한 자위대는 영원히 미국의 용병이라고 주장하며 대원들의 결기를 촉구한 것이 그의 마지막 연설이 되었다. 이 쿠데타의 거사에 나서기 전, 미시마는 물론 헌법 개정을 기대하기도 했지만, 일본 정부가 일·미 안보조약 자동연장을 강행했을 때에, 민주적인 제도내에서의 자주성 회복이라는 방법에 절망했던 것이다.

1970년 11월 25일 발코니에서 절규하는 미시마를 지상에 있는 자위대원은 재미있는 구경거리처럼 웃었고 당연히 아무도 동조하지 않았다. 그 직후에 그가 할복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로부터 50년 후의 현재, 미시마의 목소리는, 군사 뿐만이 아니라, 정치·경제·문화 등의 모든 면에서 미국의 속국이 된 일본에 대한 엄격한 자기 비판으로서 다가오고 있다. 그것은 일본이라는 나라의 암울한 현상의 반영처럼 보인다. 지난 30년 사이에 경제격차가 확대되고 빈곤이 만연했으며 사회의 활력은 서서히 떨어졌다. 사회안전망은 서서히 제거되고 필요 없어진 노동자와 노인들이 알몸으로 길거리에 내던져진다. 1960년대 분명히 일본은 초강대국 미국의 비호를 받으며 번영을 누렸겠지만, 21세기의 일본 정부는 마치 자국민의 부를 미국 자본에 이전 공급하는 기계와 같다. 대국 일본의 환상을 가질 수 없게 된 젊은 세대가, 이런 불행한 나라가 되어 버린 이유를 위의 세대에게 묻기 시작했을 때, 거기에 미시마가 있었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시마가 죽은 후의 세대에 속하는 나에게도, 내 나름의 ‘미시마 경험’이 있다. 일찍부터 소설을 탐독했던 내가 특히 매료된 것이 미시마의 작품들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테마로 한 소설로 본격적인 데뷔를 장식한 이 작가와, 그 만년의 우국적 행동과 사상을 접속하는 것은, 나에게는 오랫동안 곤란한 일이었다. 이 과제에 대한 실마리를 잡은 것은 1980년대에 대학생이 되어 도쿄에 살면서 일본이라는 나라의 모종의 찌그러진 위상을 깨달았을 때이다. 군국주의의 그 많은 화를 아시아에 퍼뜨리고도 지도자가 책임을 지지 않은 나라, 그 전쟁을 마치 대지진이나 해일 같은 자연재해처럼 말하는 나라, 전력을 보유할 수 없다는 자국의 헌법을 평화헌법이라고 자랑하면서 자위대라는 군대를 모호하게 용인하는 나라, 오키나와를 포함한 아시아를 깔보며 구미에 대한 굴절된 동경을 품은 나라, 젊은이들이 정치 사회변혁에 관심을 갖는 것을 전염병처럼 꺼리는 나라. 이 나라에 사는 대다수가 예의 바르고 근면하며 정직하고 다정한 사람들인데 내가 느끼는 나라 전체의 이상함은 무엇에서 기인하는가. ‘재팬·이즈·넘버원’이라고 하는 울림에 취해 있던 80년대의 도쿄에서, 나는 미시마가 느끼고 있었을 전후 일본의 기만의 종착지를 본 것 같았다.

나의 감촉은 내가 오키나와 출신이며 미일 안보를 위해 평화헌법의 번외지에 놓여 계속 군사화되는 고난의 근처에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인지도 모른다. 미시마가 죽음으로써 항의한 전후 일본의 모순을, 농축한 형태로 내던져 온 것이 오키나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시마의 주둔 미군기지는 오키나와 주민의 인권문제가 아니라 국가주권의 문제였다. 그의 관심은 오키나와에 존재하는 광대한 미군기지와 일본의 자주방위 관계에 있으며 오키나와에는 미군으로부터 독립한 자위대의 배치가 배치돼야 한다고 시사했다. 요컨대 오키나와의 군사화를 담당하는 주체가 미군이냐 일본군이냐 하는 것뿐이다. 구일본군의 무도함를 기억하는 오키나와의 트라우마가 미시마에게서 나타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럴 만도 하다. 그래도 오키나와는 일본 복귀를 강력히 원했으니까.

그런데, 미시마는 천황의 군대였던 구일본군의 단순한 부활을 요구하고 있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미시마의 작품 「영령의 소리」는, 일본 군인들의 영혼이 그들의 무념함을 이야기해, ‘따라서 천왕은 인간이 될 수 있다’라고 하는 소리가 반복되는 이야기다. 그 목소리는 신으로서 국민에게 죽음을 명한 쇼와천왕이 미국 점령 하에서 '인간선언'을 한 것에 대한 사망자들의 원망이다. 살아남기 위한 대미 종속이 습성이 된 일본의 ‘평화’, 피 묻은 과거를 망각하고 성립되는 일본의 ‘평화’에, 미시마는 만족하지 못했다. 나는, 미시마의 만년의 행동을, 죽은 사람들과 맞바꿔 얻은 전승국이 ‘속국화=식민지화’한 것에 대하여 항의한 것이며, 자주성 회복을 희구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것은, 이 나라의 전쟁 책임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정말로 미시마 다운 로맨틱한 추궁이었다고. 경제적 번영의 아래에서도 덧붙여 영혼의 공허이나 살아남아버린 괴로움을 마주하고, 최후는 자신의 논리에 충실하게 죽은 인간·미시마. 미시마와 오키나와는 전쟁책임과 반식민지화라는 주제로서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토미야마 카즈미(豊見山和美 TOMIYAMA Kazumi) 씨는 도쿄 소재 추오대학교와 류큐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며, 영국 런던대학교 아카이브연구 석사과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오키나와현립공문서관의 아키비스트로 일하면서, 오키나와 전후사를 중심으로 문화평론을 하고 있습니다.


三島由紀夫と沖縄―戦後日本への問いかけ
豊見山和美

2020年は、日本の作家・三島由紀夫の死から50年となる。生きていれば彼は95歳になっていた。早熟の天才と呼ばれ、ノーベル文学賞候補と目され、文壇を越えて行動する作家としてつねに世間の注目を浴びていた人物が、自衛隊駐屯地で隊員に決起を求めて檄を飛ばした末に割腹自殺したのが1970年のことだ。近年、彼の行動の意味を再考する試みが顕著になっており、三島と東大全共闘(全共闘は1960年代に高揚した大学生による反体制運動の組織体)との公開討論会のドキュメンタリー映画が封切られ話題になったこともその現象のひとつだろう。三島の「遺言」は、三島以後の世代によって新たに読み解かれつつある。

1945年、三島は米軍との戦闘に臨む覚悟で「天皇陛下万歳」と遺書をしたためた20歳の軍国青年だった。しかし彼は死なず、敗戦、GHQの占領、講和と主権回復、そして驚異的な高度経済成長を遂げた戦後日本を経験した。エリートとして大蔵省の官僚となり、退職して専業作家へ転身した三島の華麗な作家生活は、日本の戦後復興と歩調を合わせるかのようだった。もちろん、誰も知るように日本の戦後復興はアメリカの国益に奉仕する形で行われた。アメリカは日本国民統合のため天皇制を温存し、朝鮮戦争の特需の恩恵を与え、安全保障として多くの土地を提供させた(やがてその米軍基地は沖縄に集中する。)さらにアメリカは、日本軍国主義への反省として日本政府に戦争放棄の「平和憲法」を制定させたにもかかわらず、その世界戦略上の必要から新たな軍隊組織創設を認め、それが自衛隊へと展開した。三島は法理論的に自衛隊は現行憲法違反の存在と認識し(そしてそれは正しい)、日本がこの対米従属の欺瞞を解消して国土防衛の自主性を回復しない限り自衛隊は永遠にアメリカの傭兵だと訴えて、隊員の決起を促したのが彼の最期の演説となった。このクーデタの挙に出る前、三島はもちろん憲法改正への期待もしたが、日本政府が日米安保条約自動延長を強行した時に、民主的な制度内での自主性回復という方法に絶望したのだった。

1970年11月25日、バルコニーで絶叫する三島を、地上にいる自衛隊員は面白い見世物のように笑い、当然、誰も同調しなかった。その直後に彼が切腹するとは思わなかったのだ。それから50年後の現在、三島の声は、軍事のみならず、政治・経済・文化などのあらゆる面でアメリカの属国と化した日本への厳しい自己批判として聞き取られている。それは日本という国の暗鬱な現状の反映のように思える。ここ30年の間に、経済格差が拡大して貧困が蔓延し、社会の活力はじわじわと低下した。社会的セーフティネットは徐々に取り外され、要らなくなった労働者や高齢者が裸で路上に放り出される。1960年代、たしかに日本は超大国アメリカに庇護されて繁栄を享受しただろうが、21世紀の日本政府はあたかも自国民の富をアメリカ資本に移転供給するマシンのようになってしまった。大国日本の幻想を持てなくなった若い世代が、こんな不幸な国になってしまった理由を上の世代に問いかけ始めた時、そこに三島がいたということなのかもしれない。

三島亡き後の世代に属する私にも、私なりの「三島経験」がある。早くから小説を読みふけった私がとりわけ魅了されたのが三島の作品群だった。とはいえ私には、自らの同性愛性向をテーマにした小説で本格的なデビューを飾ったこの作家と、その晩年における憂国的行動と思想を接続することは長らく困難なままだった。この課題への糸口をつかんだのは、1980年代に大学生となり東京で暮らしながら、日本という国のある種いびつな位相に気づいた時である。軍国主義のあれだけの禍いをアジア中にまき散らしたのに元首が責任を取らなかった国、あの戦争をまるで大地震か大津波のような自然災害のように語る国、戦力は保持しないとする自国の憲法を「平和憲法」と誇りながら自衛隊という軍隊を曖昧に容認する国、沖縄も含めたアジアを見下しながら欧米への屈折した憧れを抱く国、若者が政治や社会変革に関心を持つことを伝染病のように忌み嫌う国。この国に住む多くは礼儀正しく勤勉で実直な優しい人々だというのに、私が感じる国全体としての異様さは、何に起因するものなのか。ジャパン・アズ・ナンバーワンという響きに酔いしれていた80年代の東京で、私は三島が感じていただろう戦後日本の欺瞞の行きついた先を見た気がしていた。

そのような私の感触は、私が沖縄出身であり、日米の安全保障のために平和憲法の番外地に置かれて軍事化され続ける苦難の近くにいることから生まれたものかもしれない。三島が死をもって抗議した戦後日本の矛盾を、濃縮した形で投げつけられてきたのが沖縄だからだ。しかし三島にとって在沖米軍基地は、沖縄住民の人権問題でなく国家主権の問題だったと思われる。彼の関心は、沖縄に存在する広大な米軍基地と日本の自主防衛の関係にあって、沖縄には米軍から独立した自衛隊の配備が配備されるべきだと示唆した。要するに、沖縄の軍事化を担う主体が米軍か日本軍かというだけのことだ。旧日本軍の非道を記憶する沖縄のトラウマが三島に見えていたとは思えない。しかしそれも無理からぬことだ。それでも沖縄は、日本復帰を強く激しく望んだのだから。

では、三島が天皇の軍隊だった旧日本軍の単なる復活を求めていたのかというと、そうではない。三島の作品「英霊の聲」は、日本軍人たちの霊が彼らの無念を語り、「などてすめろぎ(天皇)は人間(ひと)となりたまいし」いう声がリフレインする物語だ。その声は神として国民に死を命じた昭和天皇が、アメリカ占領下で「人間宣言」したことへの死者たちの怨嗟である。生き延びるための対米従属が習い性となった日本の「平和」、血塗られた過去を忘却して成り立つ日本の「平和」に、三島は安んじ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私は、三島の晩年の行動を、死者たちと引き換えに得た戦勝国への属国化:植民地化というものへの抗議であり、自主性回復への希求と理解する。それは、この国の戦争責任というものへの、いかにも三島らしいロマンティックな追及だったのだと。経済的繁栄のもとでもなお、魂の空虚や生き残ってしまった苦しみに向き合い、最後は自身の理路に誠実に死んだ人間・三島。三島と沖縄は、戦争責任と魂の反植民地化という主題においてこそ、出会うことができるだろう。


MISHIMA Yukio and Okinawa: An Inquiry into Postwar Japan
TOMIYAMA Kazumi

The year 2020 will mark 50 years since the death of Japanese author MISHIMA Yukio. Had he lived, he would have been 95 years old. In 1970, the man who was called a precocious genius, considered a candidate for the Nobel Prize in Literature, and always in the public's eye as a writer who acted beyond the literary circles, committed suicide by disembowelment after issuing a proclamation to members of the Japan Self-Defense Forces (JSDF) at the JSDF garrison, calling for an action. In recent years, there has been many attempts to reconsider the meaning of his actions, and one of these phenomena is the release of a documentary film about an open debate between Mishima and the Tokyo University Zenkyoto (Zenkyoto was organizing bodies of anti-establishment movements by college students that became active in the 1960s). Mishima's "testament" is being read anew by the generation after Mishima.

In 1945, Mishima was a 20-year-old militaristic young man who prepared to fight with the U.S. military and wrote a suicide note, "Long live the Emperor." However, he did not die, and experienced defeat in the war, occupation of GHQ, restoration of sovereignty, and amazing economic growth after the war. After becoming an elite bureaucrat in the Ministry of Finance, Mishima retired and became a full-time writer, and his brilliant life as a writer seemed to keep pace with Japan's post-war recovery. Of course, the postwar reconstruction of Japan was carried out in the form of serving the U.S. national interests. The U.S. maintained the Emperor system for the integration of the Japanese people, benefited from the special demand of the Korean War, and provided much of land for security (which would eventually be concentrated in Okinawa). Furthermore, despite the fact that the U.S. had the Japanese government enact a "Peace Constitution" that renounced war as a reflection on Japanese militarism, the its global strategic needs allowed for the creation of a new military organization of Japan, which evolved into the JSDF. Mishima recognized (and rightly so) that the JSDF were unconstitutional in legal theory, and urged the members to rise, insisting that the JSDF would forever be U.S. mercenaries unless Japan resolved this deception of subordination to the U.S. and restored the autonomy of national defense. Before the coup d'etat, Mishima of course expected a constitutional amendment, but when the Japanese government pushed ahead with the automatic extension of the Japan-U.S. security treaty, they were disappointed at the way to restore independence within the democratic system.

Nov. 25 1970, the JSDF personnel on the ground laughed at Mishima's screaming on the balcony as if he were an amusing spectacle, and naturally, no one agreed with him. They didn't expect him to commit seppuku right after that. Fifty years later, Mishima's voice is heard as a harsh self-criticism of Japan that has become a vassal state of the U.S., not only militarily, but also in politics, economics, culture, and every other area. It seems to be a reflection of the gloomy state of affairs in Japan. Over the last three decades, economic disparities have widened, poverty has become widespread, and social vitality has slowly declined. The social safety net is gradually removed and the unwanted workers and elderly are thrown out into the streets naked. While Japan may have enjoyed prosperity under the aegis of the U.S. superpower in the 1960s, the Japanese government of the 21st century is like a machine for transferring the wealth of its people to American capital. When the younger generation, no longer under the illusion of a Japan as a great nation, began to ask the older generation why Japan had become such an unhappy country, perhaps that's where Mishima was.

I belong to the generation that followed Mishima's death, but I also have my own "Mishima experience”. As an early reader of novels, I was particularly fascinated by Mishima's works. For a long time, however, it has been difficult for me to make a connection between this author, who made his debut with a novel about his homosexual tendencies, and the nationalistic behavior and ideas of his later years. It was while living in Tokyo as a university student in the 1980s that I got a clue to this subject, when I became aware of a particular phase of the country's distortions. A country whose head of state did not take responsibility for the horrors of militarism that had been spread across Asia; a country that talks about the war as if it were a natural disaster, like an earthquake or a tsunami; a country that prides itself on its constitution, which states that it will not retain its war potential, as a "peace constitution," while vaguely accepting the existence of the SDF as a military force; a country that looks down on Asia including Okinawa and condescendingly harbors a refracted yearning for the West, a country that abhors young people's interest in politics and social change like a contagious disease. What accounts for the strangeness I feel about the country as a whole, when so many of its inhabitants are polite, hard-working, honest and kind people? In Tokyo in the 80's, when they were intoxicated by the phrase of "Japan as number one", I felt like I had seen where the  post-war Japanese deception which Mishima felt had led him.

Perhaps my feeling is born of my Okinawan origins and my proximity to the hardships of the continued militarization of the U.S. and Japan's security that has placed it on the margins of the Peace Constitution. For it is in Okinawa that the contradictions of post-war Japan, which Mishima protested to the death, have been thrown in a concentrated form. For Mishima, however, the issue of the U.S. military bases in Okinawa seems to have been one of national sovereignty, not human rights for Okinawans. His concern was with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vast the U.S. military bases that existed in Okinawa and JSDF, suggesting that the deployment of JSDF forces independent of the U.S. military should be deployed in Okinawa. In short, it is simply a question of whether the U.S. or Japanese forces are the ones responsible for the militarization of Okinawa. It is unlikely that the trauma of Okinawa's memory of the former Japanese military's atrocities was apparent to Mishima. But that is not surprising. Nevertheless, Okinawa strongly and fiercely wanted to return to Japan.

So, was Mishima simply calling for the revival of the old Japanese army that was the army of the emperor? No, it was not. In Mishima's work "Eirei no Koe" (A Voice of the military dead), the spirits of the Japanese soldiers speak of their grief, and a voice refrains, "Why have the emperor became a human being?”. The voice is the resentment of the dead for the fact that Emperor Hirohito, who, as a god, ordered his people to die, had "declared himself human" under the U.S. occupation. Mishima could not rest on "peace" of Japan, a country where subordination to the U.S. to survive has become a habit, a Japan whose "peace" is built on forgetting its bloody past. I understand Mishima's actions in his later years as a protest against the colonization of Japan by the victorious nation in exchange for its dead, and a desire for the restoration of its independence. It was a romantic pursuit of the country's war responsibilities, as is typical of Mishima. Even in the midst of economic prosperity, Mishima was a man who faced the emptiness of his soul and the pain of survival, and in the end died faithfully to his own reasoning. Mishima and Okinawa can meet especially on the theme of war responsibility and resistance to the colonization of souls.


三島由紀夫與沖繩-對日本戰後的質疑
豐見山和美

2020年將是日本作家三島由紀夫(Yukio Mishima)去世的50年。如果他還活著,他將已經95歲。這位被稱為早熟的天才,被世人認為是諾貝爾文學獎的候選人,並且始終是眾人眼中超越文學界的作家角色。1970年,這個人在向日本自衛隊發表聲明後站出來舉劍切腹自殺。近年來,人們進行許多嘗試來重新考慮他的行為與含義。其中並發行了三島與東京大學全共鬥(全學共鬥會議是由在1960年代興起的大學生進行的反建制運動的組織)之間的公開辯論的紀錄片。現象之一就是它成為熱門話題。在三島過世之後,三島的「遺言」被年輕世代相傳。

1945年,三島(Mishima)是一名20歲的軍國主義青年,他準備與美國軍方作戰,並寫了遺書,說“呼喊天皇萬歲”。但是,他並沒有死,也沒有遭受戰後日本的失敗,GHQ(General Headquarters)佔領,和平與主權以及巨大的經濟增長。三島成為財政部的一名官僚精英後,後來退休成為專職作家,他作為作家的輝煌生活似乎與日本戰後的復甦保持同步。當然,眾所周知,日本戰後的重建是以符合美國國家利益的形式進行的。受益於朝鮮戰爭的特殊需求,美國保留了天皇制,以整合日本人民,並為安全提供了大量土地(美國軍事基地將很快集中在沖繩)。儘管日本政府制定了《和平憲法》以放棄戰爭以反映軍國主義,但由於其全球戰略需求,日本政府允許建立一個新的軍事組織,並擴大為自衛隊。三島在法律上承認自衛隊違反了現行憲法(這是正確的),除非日本解決對美國的從屬欺瞞並恢復國防自主權,否則自衛隊將永遠是美國的僱傭軍。是他的最後講話敦促成員上升。在這次政變之前,三島當然希望修改憲法,但是當日本政府強制自動延長《日美安全條約》時,他迫切希望在民主制度中恢復自治。

1970年11月25日,地面上的自衛隊成員嘲笑三島在陽台上尖叫,認為他像一個有趣的景像,自然沒有人同意他的說法。也沒想到他會切腹。五十年後,三島的聲音被視為日本的一種嚴厲的自我批評,不僅在軍事上、日本在政治,經濟,文化和各個方面已成為美國的附庸國。這似乎反映了日本的悲觀局勢。在過去的三十年中,經濟差距不斷擴大,貧窮日益普遍,社會活力逐漸下降。社會安全網逐漸被取消,無用的工人和老人被赤裸地扔到街頭。儘管在1960年代,日本在超級大國美國的支持下可能享有繁榮,但是21世紀的日本政府似乎是將本國人民的財富轉移並提供給美國首都的機器。當年輕一代不再被日本視為一個偉大的國家的幻想時,他們開始問老一代日本為什麼變得如此不快樂,也許這就是三島。

我屬於三島死後的那一代,但我也有自己的“三島經驗”。三島的作品讓我特別著迷,作為小說的早期讀者,我對三島的作品特別著迷,但是很長一段時間以來,我一直很難將他晚年的民族主義行為和思想與這位作家聯繫起來(他的小說早期以同性戀的傾向聞名)。當我在1980年代成為一名大學生並住在東京時,對此問題有所了解。當時我注意到日本處於某種扭曲的狀態。一個國家元首未曾對遍布亞洲的軍國主義恐怖行為負責;一個談論戰爭的國家,就像一場自然戰爭災難,例如地震或海嘯;以自己的憲法引以為傲的國家,該國聲稱它不會保留其戰爭潛能。一個以自己的憲法作為“和平憲法”而自豪的國家,卻模糊地接受了自衛隊的軍隊。這個國家看不起包括沖繩島在內的亞洲,並居高臨下地懷念著對西方的嚮往,這個國家憎恨年輕人對政治和社會變革的興趣。就像一種傳染病。當這麼多居民是有禮貌,勤奮,誠實和善良的人時,我對整個國家感到陌生的原因是什麼?在80年代的東京,當他們被“日本第一”的措辭陶醉時,我感覺彷彿看到了三島感覺到的戰後日本欺騙導致了他。

我的這種感覺可能源於我來自沖繩,並且處於實現日本和美國的安全而被置於《和平憲法》之外並繼續被軍事化的困苦之中。這是因為在沖繩,三島抗議戰後日本以死亡抗議的矛盾之中。但是,對於三島來說,美國在沖繩的軍事基地似乎是國家主權的問題,而不是沖繩人的人權問題。他擔心的是沖繩島上存在的龐大的美國軍事基地與日本自衛隊之間的關係,這表明獨立於美國軍方的日本自衛隊的部署應在沖繩進行。簡而言之,這僅僅是美國或日本部隊是沖繩軍事化的負責人的問題。三島不太可能看到沖繩對前日本軍方暴行的記憶所造成的創傷。但這不足為奇。然而,沖繩堅決並強烈地希望返回日本。

不,那不是。在三島的作品《軍人之聲》中,日本士兵的精神說出了他們的悲痛,而聲音卻大聲疾呼:“為什麼皇帝成為人類?”這種聲音是一種怨恨。死者死於日本皇帝裕仁天皇作為一個神命命令其人民死去,並在美國占領下“宣稱自己是人”。三島無法依靠日本的“和平”,而日本是一個順從日本的國家。美國生存下來已成為一種習慣,日本的“和平”是建立在忘記流血的過去的基礎上的,我理解三島晚年的舉動是為了抗議勝利國對日本的殖民化以換取其死亡,渴望恢復獨立。這是三島對這個國家戰爭的責任的浪漫追求。即使在經濟繁榮的情況下,三島仍然是一個人,他面對著自己的靈魂的空虛和倖存的痛苦,最終以自己的方式真誠地死了。三島和沖繩只能在戰爭責任和反殖民化問題上持續互視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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