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주년, 한국전쟁과 제주] (14) 문헌으로 살펴본 모슬포·제주 중공군 포로수용소의 흔적

한반도가 한국전쟁 폐허로부터 다시 일어선지 70년이 흘렀습니다. 물론 제주는 한반도 최남단이라는 지리적 환경으로 6.25의 직접 피해지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같은 환경은 6.25 전란 기간 동안 한국전쟁과 연관된 시설·기관들은 물론, 육지부의 피난민과 전쟁 포로들까지 대거 제주로 집중하게 하는 요인이 됐습니다. 4.3이라는 현대사의 비극을 치르고 있던 당시의 제주사회는 한국전쟁으로 유사 이래 정치·군사·외교뿐만 아니라 가장 큰 지역사회 격변까지 경험하게 됩니다. [제주의소리]가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전쟁기 육지에서 제주로 피난이 이뤄지는 과정과, 정부와 군에서 제주도를 적극 활용하면서 남긴 ‘사람과 장소’들을 재조명해보는 [70주년, 한국전쟁과 제주] 기획을 연재합니다. 전쟁의 실상과 전후의 변화상을 살펴보는 이번 기획을 통해 한국전쟁기의 제주역사는 물론 제주인들의 삶을 되돌아봄으로서 ‘항구적 평화’의 중요성을 미래세대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글] 

휘몰아치는 한국전쟁의 광풍 속에서 최남단 제주는 포화가 쏟아지는 격전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육군훈련소·포로수용소·육군병원 등 설치, 해병대 3·4기, 육군 장교 배출 등 군사력을 보충하고 물자를 조달하는 후방 전략기지로서의 필수적인 역할을 도맡았다.

뿐만 아니라 전쟁 당시 생겨난 중국인민해방군(이하 중공군) 포로 수용을 위한 수용소도 건설됐다. 장소는 대정읍 모슬포 알뜨르비행장에 한 곳, 그리고 현 제주국제공항 부지인 제주시 용담동의 속칭 '다끄네'에 한 곳 등 총 두 곳이다. 이 두 곳을 합쳐 약 2만명에 가까운 중공군이 제주에서 포로 생활을 했다.

현재의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약칭이다. 한국전쟁 당시엔 중공이라 불리던 시절이다. 제2차 세계대전 말 일본이 항복하자, 중국 본토에선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격렬한 내전이 시작됐다. 1949년 이 내전에서 패배한 국민당은 타이완으로 달아나 지금의 대만(중화민국)을 세웠고, 공산당은 본토에서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전쟁에 투입됐다가 붙잡힌 이들 중공군 포로들도 둘로 나뉘었다. 한 쪽은 당시 중공에 반대한 '반공'포로들로 대만행을 희망했고, 한 쪽은 '친공' 포로였다는 점이다. 당연히 반공포로와 친공포로는 둘로 나뉘어 서로 다른 곳에 수용됐다. 뿐만 아니라 수용소 부지에 주민들의 징발 토지가 포함되기도 했다.  

역사 전문가들은 중공군 포로수용소 안에는 일본군 기지, 4.3, 민간인 학살, 이데올로기와 전쟁이 중첩돼 있다는 점을 꼽으면서 "왜 지금 평화가 중요한지, 역사의 아픔을 풀어내야 하는지 포로수용소를 통해 메시지를 줄 수 있다"고 역설한다.

유엔군 제3 모슬포 포로수용소 전경. 중공군 포로들 중 반공포로들이 여기에 수용됐다. 포로수용소 막사 뒤로 산방산이 우뚝 솟아 있다. 출처=NARA,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현대사 디지털아카이브.
모슬포 포로수용소 입구 표지판. 사진=한국저작권위원회.
1953년 제주도 모슬포 포로수용소 입구 표지판. 출처=주식회사 유앤피플, 한국저작권위원회. CC BY

# 친공-반공으로 나뉜 중공군 포로, 또다른 이데올로기의 현장 

유엔군은 1952년 4월 무렵 중공군 포로들을 서귀포시 대정읍 제3모슬포수용소와 다끄네 마을로 불린 현재 제주국제공항 부지의 제8제주시수용소로 이동시켰다. 이 과정에서 본토 송환을 희망한 친공포로는 제주시, 본토 송환을 거부한 반공포로는 모슬포로 이동케 했다. 

2016년 12월 발표한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천저우의 논문에 따르면 1953년 2월 28일 기준 수용소별 나눠진 중공군 포로는 제주시 친공포로 5911명, 모슬포 반공포로 1만4298명이다. 

이 같은 결과에 당시 중국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강하게 반발하기도 했다. ▲포로 연대에서 본토 송환 방송과 안내 책자를 확인하지 못하게 한 점 ▲본국 송환 희망 포로에게 가해진 구타-살해 협박 ▲반공 문구 문신으로 인해 본토 송환을 선택하지 못한 점 등 선별 과정의 문제를 지적하며 강하게 문제 삼았다. 

하지만 이미 중공군 포로들은 포로 심사와 선별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고, 수용소가 설치한 확성기를 통해 중국 측이 보낸 성명서를 들을 수 있었다. 더군다나 친공포로 회고에 따르면 선별 당일에는 미군이 확성기가 달린 자동차를 주차해 중국 측 성명서를 전달했다고 했다.

이처럼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 포로는 친공과 반공으로 나뉘어 갈등을 빚고 있었다. 심지어 미국 정부는 반공포로들의 대만 송환 요구 시위가 불거짐에 따라 대만 정부에 협조를 요청하기까지 했다. 

출처=주식회사 유앤피플, 한국저작권위원회. CC BY
1953년 2월 제주도 포로수용소 급수 시설. 출처=주식회사 유앤피플, 한국저작권위원회. CC BY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 포로수용소 모습. 사진=한국저작권위원회.
1953년 제주도 모슬포 중공군 포로수용소.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 소재 중공군 포로수용소 모습. 사진=한국저작권위원회.

이어지는 논문에 따르면, 미국 정부의 대만 정부에 대한 협조 요청은 유엔군의 자유송환 원칙을 견지한다는 사실을 포로들에게 알려 반공포로를 안정시키기 위함이었다. 당시 장개석(장제스) 대만중화민국 총통은 미국 측 제의를 받아들여 포로 송환 문제에 접근하기도 했다. 

장개석 총통은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된 이후 반공포로를 위해 친필 서한을 보내 전달키도 했다. 논문에 나타난 서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략) 유엔에서는 당신들의 입장을 지지하기 위하여 이미 자유송환원칙이 세워지도록 하였다. 이 원칙은 전쟁 양쪽에서 이미 모두 받아들였고 정전협정에도 반영되었다.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도 당신들의 자유에 대해 확실하게 보장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다. 앞으로 당신들은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어떠한 유혹에도 동요하지 않고, 어떠한 위협에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하기만 한다면 당신들은 반드시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의 몇 개월 동안 여러분들은 반드시 인내하고 유엔군사령부와 협력해야 한다. 우리 자유중국의 동포들은 당신들의 자유를 위하여 함께 분투할 것이다. 나 본인도 당신들이 다시 공비에 의해 강제 송환되지 않도록, 유엔군에서 자유송환원칙을 실천하고 있는지 주의 깊게 살필 것이다. 또한 나는 유엔이 약속한 대로 당신들을 당신들의 의지대로 자유중국인 대만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 반공포로던 장서기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때 인심이 흉흉하였는데 다행히 우리의 대통령이 편지를 보내 주셨어요. 그 편지를 받은 후에 겨우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되었죠. 그는 우리보고 유엔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어요. 우리 대통령께서 나오셔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는데 유엔이 우리를 배반하지는 않겠죠. 그때 편지 받고 적어도 마음은 든든해졌어요. (편지를 받은 후에) 우리는 중립지역에 가게 되었어요. 두려워하긴 했는데 대체적으로 단호한 의지만 유지하면 대만에 가는 것은 별로 문제가 없었어요.

대만 정부는 반공포로의 안정과 송환을 위해 장개석의 친필 서한과 더불어 ‘중국대륙재포구제총회 재한반공의사 위문대표단(中國大陸災胞救濟總會慰問留韓反共義士代表團)’을 통해 위로 물품을 보내기도 했다. 

1953년 8월 26일 대만 공군 총부는 대형수송기를 통해 위로 물품 37톤을 싣고 제주도로 향한 뒤 반공포로를 위로하기도 했다. 다른 논문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영실의 ‘타이완행을 선택한 한국전쟁 중공군 포로 연구’에는 위문단의 위문품이 자세히 나와있다. 

당시 대만 언론에 거론된 위문품 규모는 1인 당 ▲설탕 1홉 ▲파인애플 ▲채소-소고기 1통 ▲바나나 2개 ▲러닝셔츠 1개 등이었다. 물품은 대만 공군기 8대를 통해 전달된 것으로 알려진다. 

위문품을 가져온 파견단은 대만서 작성된 보고서에 따르면 ‘중화민국선위한전반공전부대표단(華民國宣慰韓戰反共戰俘代表團)’이란 이름을 가진 채 활동했다. 이들은 제주 모슬포에 도착한 뒤 한국을 방문한 이유와 대만 정부가 자유 송환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노력한 것들을 설명했다. 

출처=주식회사 유앤피플, 한국저작권위원회. CC BY
1953년 제주도 모슬포 중공군 포로수용소 내 반공포로들의 송환 준비 모습. 사진 속 액자는 장제스 중국 국민당 총재의 사진이다. 출처=주식회사 유앤피플, 한국저작권위원회. CC BY
출처=주식회사 유앤피플, 한국저작권위원회. CC BY
1953년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중공군 포로수용소 포로들의 이동 모습. 포로 행렬 뒤로 나즈막한 송악산의 모습도 보인다. 출처=주식회사 유앤피플, 한국저작권위원회. CC BY

보고서에는 비무장지대에서 이뤄지는 포로 송환여부 결정 과정서 첩자가 포함돼 있을 것이라는 부분이 나타난다. 공산당과 인도관리군이 포로를 위협할 수 있으므로 정부서 간부를 기자 신분으로 파견해 관찰-탐방 등의 공작을 진행해야 한다고 제안한 것이다.

이같이 한국전쟁 당시 잡혀 온 중공군 포로는 제주로 내려오기 전부터 내부 갈등을 빚고 있었고, 그 결과 제주서 두 곳으로 나뉘어 수용됐다. 서로 다른 이념을 갖고 압록강을 넘어와 같은 전쟁을 치른 동상이몽이 명확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 수용소, 군사기지...전쟁에 잠식당한 주민들의 삶

포로수용소를 건설하면서 해당 지역 주민들의 피해에 주목한 연구도 존재한다.

전갑생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 김민환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조교수가 2018년 6월 발표한 논문 ‘포로수용소의 설치 및 해제와 주민들의 고통-제주·통영을 중심으로’이다.

이 논문은 한국전쟁 당시 포로수용소 건설 과정에서 벌어진 주민 피해를 살펴봤다. 논문에 따르면 통영 지역은 용초도, 추봉도 주민 거주 지역에 수용소를 건설했다. 이 과정에서 소개(疏開), 육체적 고통 등 주민 피해가 발생했다.

제주지역은 농토 징발, 토지 분쟁 같은 문제가 있었다.

논문에 따르면 1957년 5월 17일 제주 오라동 출신 의원 강경옥은 국방부 관계자들을 대동하고 도내 군 징발 농토 실태를 답사했다. 답사 대상에는 모슬포 전 육군훈련소 자리, 제주비행장도 포함됐다. 현장을 둘러본 강 의원과 국방부 측은 "농토는 농민에게 반환토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1957년 5월 18일자 제주신보를 보면 '모슬포의 징발 토지는 전체 1000정보에 이르렀다'는 보도 내용이 나온다. 답사 이후 한 달 정도 지난 6월 17일 국방부는 모슬포 비행장 주변 국유지 48만4363㎡(14만6520평)을 농경지로 개방하기로 결정한다. 상모리 일대 농가 120호 농민들은 국방부와 대부 계약을 체결하고 농토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출처=주식회사 유앤피플, 한국저작권위원회. CC BY
1953년 제주도 모슬포 중공군 포로수용소. 출처=주식회사 유앤피플, 한국저작권위원회. CC BY

제주시 수용소 관련해서는 전쟁 이후 1956년 4월 28일 다끄내마을 지주들이 국방부에 '서비행장 서북측' 농지 66만1157㎡(20만평)을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제주시는 제주도지구경비사령부와 협의해 13만2231㎡(4만평)만 경작지로 반환할 예정이었지만 차질을 빚었다. 오히려 그해 8월 17일 제주도지구경비사령관은 '민간이 군용지(제주비행장)를 무단출입한다면 엄중히 경고한다'는 성명까지 발표한다.

그리고 2년이란 시간이 지나서야 국방부는 다끄내마을 지주들에게 토지를 반환했다. 제주공항에는 ▲2차 활주로 포장공사(1957) ▲비행장 확장공사(1962) ▲재확장공사(1979~1983) 등이 이뤄지면서 포로수용소 일부 부지가 편입된다.

논문에서는 "제주도 2개 수용소 토지 보상에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면서 "그 이유가 주민들의 거주지가 아니라는 점에서 (통영과) 큰 차이를 보이는 듯하다”고 분석했다. 제주시 수용소는 공항으로 사용하고 있었고, 모슬포 수용소는 미군이 계속 점거·사용해왔기에 “주민들이 토지 보상 요구하는데 소극적으로 보일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도 덧붙였다. 

중국인민지원군 송환포로들을 수용한 제주시 용담2동(현 제주국제공항 부지 포함) 유엔군 제8제주시전쟁포로수용소. 사진=거제시청.
중국인민지원군 송환포로들을 수용한 제주시 용담2동(현 제주국제공항 부지 포함) 유엔군 제8 제주시 전쟁포로수용소. 사진=거제시청.
출처=논문 '포로수용소의 설치 및 해제와 주민들의 고통-제주·통영을 중심으로'
제주시수용소 구역 및 정뜨르비행장. 출처=육군본부, 논문 '포로수용소의 설치 및 해제와 주민들의 고통-제주·통영을 중심으로'
출처=논문 '포로수용소의 설치 및 해제와 주민들의 고통-제주·통영을 중심으로'
모슬포 수용소 구역도. 출처=논문 '포로수용소의 설치 및 해제와 주민들의 고통-제주·통영을 중심으로'

흥미로운 점은 미군이 모슬포 주민들의 반발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제주도 프로젝트(Chejudo Island Project)’를 실행했다는 사실이다.

1958년 지역사회개발 훈련센터에 4만 달러 지원과 상수도 건설, 모슬포 마을 지도자를 비롯해 여러 명에게 농업과 위생 시설 등을 적극적으로 개선하고, 마을독서 클럽 조직, 고구마와 포도 재배까지 다양한 기술 전수를 담고 있었다.

- '포로수용소의 설치 및 해제와 주민들의 고통-제주·통영을 중심으로' 가운데 일부.

이에 대해 논문 저자들은 정영신의 2007년 연구를 참고해 “미군에서 오키나와와 제주도를 연결하는 군사기지 플랜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시각을 제시하기도 했다. 

대정읍 알뜨르비행장 부지는 계속 국방부가 소유하고 있고, 조금 떨어진 강정에는 해군기지가 들어섰다. 그리고 조금 더 지나서 성산에 새로 짓겠다는 공항은 ‘공군기지’ 의혹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한국전쟁은 종전까지 언급될 만큼 시간이 흘렀지만, 제주도는 아직까지 전쟁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양새다.

논문의 저자 전갑생 연구원은 '제주의소리'와의 통화에서 중공군 포로수용소를 통해 제주 평화의 섬 가치를 높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제주의 정체성 가운데 하나는 바로 '평화'다. 제주에 있던 포로수용소 두 곳 가운데 하나는 친공, 나머지는 반공이었다. 현재 중국과 대만 사이의 관계를 참고해 탈냉전과 평화라는 모토를 고려하면, 중공군 포로소에 대한 연구와 역사적 재조명은 필요하다고 본다"고 밝혔다.

특히 "당시 기록, 증언에 따르면 제주에 있던 육군훈련소 관계자들이 포로수용소 경비 업무도 맡았고, 동시에 4.3 관련 토벌도 병행했다. 포로수용소는 일본군 기지, 4.3, 민간인 학살, 이데올로기, 전쟁 같은 내용들이 중첩돼 있다. 왜 지금 평화가 중요한지, 역사의 아픔을 풀어내야 하는지 포로수용소를 통해 메시지를 줄 수 있다"면서 포로수용소를 포함한 관련 역사 아카이브를 제안했다.

지난 10월23일은 한국전쟁에 중공군이 개입한지 70년이 되는 날이다. 시진핑(習近平‧67) 중국 국가주석은 이날 기념행사에서 “1950년 6월 25일 조선(북한) 내전이 폭발했다. 미국 정부는 세계 전략과 냉전 사유에서 출발해 조선 내전에 무장간섭을 결정했다”라고 언급했다. 

‘항미원조(抗美援朝, 미국에 맞서 북한을 도왔다)’를 통해 본 중공의 역사관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중국의 한국전쟁 참여 명분을 당시 미국의 무장을 통한 한반도 간섭 시도를 막기 위해 북한을 도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념은 권력의 명분이다. 세계 냉전(冷戰)의 정세 속에서 발생한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 한국전쟁의 또다른 이름 6·25전쟁으로 한반도의 한민족은 둘로 쪼개져 있다. 제주에 남은 포로수용소의 흔적도 소중한 역사다. 모든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제주의 중공군포로수용소 등 전쟁의 흔적은 우리에게 항구적 평화와 한반도 통일의 메시지를 남겨주고 있다. 

출처=NARA, 오마이뉴스
1951년 5월 29일 촬영된 13세인 중공군 소년병 포로. 출처=NARA,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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