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공육사 연극 ‘멍’

연극 '멍' 출연진. ⓒ제주의소리
연극 '멍' 출연진. 왼쪽부터 이정주, 백진욱, 박경진, 류태호, 황석정, 박선혜, 이유근, 김기남. 제공=공육사. ⓒ제주의소리

조선의 열다섯 번째 임금 광해군(1575~1641)을 두고 한때는 ‘폭군’, ‘패륜아’ 같은 박한 평가가 먼저 나왔다. 하지만 근래 이런 인식은 많이 달라졌다. ‘지는 해’ 명나라와 ‘뜨는 해’ 후금 사이에서 펼친 실리 외교, 임진왜란 대처와 전후 수습, 백성의 부담을 덜어준 대동법 같은 정책적인 면이 재평가를 받았다. 관객 1232만명을 불러모은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2012)가 대표 사례다.

광해군을 이야기 할 때 제주는 빼놓을 수 없는 장소다. 1608년 재위해 1623년 인조반정으로 축출당한 뒤 이곳저곳에서 유배 생활을 이어가다 1637년 제주로 들어온다. 그리고 4년 간 가시울타리 안에서 지내는 고독한 유배 생활 ‘위리안치’를 보낸 뒤 생을 마감한다.

달라진 광해 이미지에 ‘유배’를 결합한 콘텐츠 시도가 최근 제주에서 하나둘 등장하고 있다. 제주도 민속자연사박물관 전시, 양진건 제주대학교 교육학과 교수가 쓴 웹소설 ‘광해의 요리사’ 연재뿐만 아니라 원도심 도시재생 정책으로서의 테마 상품화는 더 적극적인 경우다.

제주국제대학교 공연예술학과 류태호 교수가 이끄는 극단 공육사가 4~5일 선보인 연극 ‘멍’도 광해의 제주 유배 생활에 상상력을 입혔다는 점에서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광해군 ‘광’(배우 류태호)은 가족도 모두 잃고 홀로 제주에 남아있다. 술에 의지한 결과는 기억상실증. 왕좌에 오른 30년 전 기억에 머물러 있어, 지금도 스스로를 왕으로 여기고 있다. 그를 보좌하는 나인 애영(황석정)은 보다 못해 광대들을 부른다. 그리고 자신이 기록한 광의 행적을 가면 놀이로 만들라고 지시한다. 지켜보며 때로는 본인 역으로 나서면서 광은 지난 일을 마주한다.

국가 위기를 극복하고 개혁을 추진한 군주,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권력이 위협받으면 과감히 제거하지만 그 뒤에 고뇌를 지닌 인간. 작품은 여기서 후자에 초점을 맞췄다. 광은 세자 딱지를 떼고 국왕에 오르지만 ‘왕권’이라는 명목으로 주변 입김에 떠밀리듯 형 임해군, 동생 영창대군, 의붓어머니 인목대비를 숙청한다. 한 편으로는 가족을 아끼라는 아버지 당부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린다. 여기에 극심한 가려움증까지 더해 몸과 마음이 허약해지자 상군 김개시 같은 측근에 휘둘린다. 

광은 혼란에 휘말린 지난 자신을 보며 부정하고 후회하는 감정에 사로잡힌다. “내가 아니야, 아닐꺼야”라고 토로하는 모습은 한때 절대 권력을 휘두른 사람으로 보기 힘들 만큼 초라하다.

작품은 모두 세 명의 광을 등장시킨다. 선대의 뜻을 받들고 백성을 위한 군주를 꿈꿨지만 안팎으로 서서히 무너진 과거, 비참하게 몰락해 기억을 잃고 떠돌아다니며 과거를 차마 직시하지 못하는 현재, 그리고 속세의 짐을 내려놓고 “내 인생의 광대놀이”를 끝마친 미래다. 처음부터 끝까지 불완전함으로 점철된 한 권력자를 통해 멍은 ‘숨을 쉬는 지금 순간마다,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 살아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런 메시지를 부각시키는 설정은 바로 광대를 포함한 밑바닥 서민들이다. 이들은 광의 인생을 재현하는 역할을 부여받았고, 동시에 열정적으로 서로 사랑한다. 광해군을 뒷바라지 하는 타 지역 여인과 제주 남자 광대, 광과 애영 사이에서 태어난 제주 여인과 타 지역 남자 광대, 그리고 위험한 사랑을 이어가는 두 남자 광대. 개개인을 가로막고 구속하는 현실 제약에도 이들은 굴하지 않고 본인 감정에 솔직하며 상대방에게 다가간다. 어쩌면 생의 끝자락에서 광이 “자연스러운 삶”을 피력한 것도 자신도 그들처럼 살고 싶었다는 뒤늦은 후회가 아니었을까. 광대와 하층민 모두 20~30대 청년 배우로 구성하면서 감정의 농도는 더욱 짙게 피어난다.

광대 놀이가 극 진행에 있어 중요하게 쓰이는 구성은 셰익스피어 ‘햄릿’을 떠올리게 한다. 햄릿에서 연극 놀이는 주인공이 아버지의 복수를 시작하는 단초로서 필연적으로 불안과 긴장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멍은 광의 단절된 기억을 복구하려는 한 여인의 애정으로 이끌어가기에 치유 성격이 강하다. 

개인적으로 자신이 숙청한 임해군, 영창대군, 인목대비 환영에 시달리는 순간 등 몇몇 부분에서는 폭발하는 감정을 기대하기도 했다. 다만, 류태호가 보여주는 광은 나약함에 초점을 맞췄다고 생각한다. 류태호의 광은 마치 일정 기억에 갇힌 치매 환자처럼 내면이 망가져 현실과 유리된 채 무대 위를 내내 누빈다. 시도 때도 없는 '술래잡기'는 이를 상징한다. 그리고 모든 짐을 내려놓는 마지막 순간에서야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후회하며 바라보는 눈빛 속에는 지난 세월이 응축돼 서려있다.

황석정이 연기한 나인 애영은 여기서 무척 바쁜 인물이다. 광을 보좌하는 책임자이면서 놀이를 진행하고, 외적으로는 작품 배경을 해설한다. 자신과 광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주하면서 “넌 알고 있었지”라는 짧은 말로 서로를 위로하는 장면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김기남, 박선혜, 박경진, 이유근, 이정주, 백진욱 등 젊은 배우들은 몸동작과 함께 역동적인 에너지를 뿜어내며 무기력한 광과 더욱 대비를 이뤘다. 제주 광대 역 배우들의 제주어는 다소 이질적인 억양이었지만 단어 구사는 현실감 있게 표현했는데, 제주어 감수를 맡은 김선희 작가가 힘을 썼다고 본다.

멍은 크게 볼 때 광대 재현 놀이, 광의 기억, 다시 재현 놀이가 반복되는 것이 주된 흐름이다. 놀이마다 보다 다양하고 선명하게 감정 표출하는 광을 상상했다. 저승길로 향하기 전 광은 지난 시간이 못내 아쉬운 듯 많은 말을 쏟아내는데, ‘여백’을 살리는 연출이 더 추가된다면 어떨까 싶었다.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굴곡진 삶을 반추하는 광의 심정을 곱씹으며 공감하고 싶었다.

작품은 그림자, 밧줄, 붉은 조명 등 과거와 현재를 잇는 상징적인 이미지를 여럿 사용했다. 그에 반해 해설성 대사가 다수 포함돼 있기 때문인지, 긴장감 있게 집중할 대사는 다소 부족하게 다가왔다.

혼백으로 광을 모시러 온 애영이 옆방 신음소리에 호통 치는 장면은 웃음을 유발했다. 마지막 분위기를 고려하면 차분하게 진행돼야 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설레임의 파도”처럼 이어지는 광의 대사를 감안하면 작품 메시지를 색다르게 강조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무엇보다 2시간 30분 공연 시간에 대한 고찰, 관객을 주목시키는 집중력은 고민 거리로 보인다.

졸업생과 함께한 창단 공연 ‘유리동물원’, 대표가 직접 주연을 맡고 사실상 출연진·제작진까지 모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멍. 지난해 창단한 극단 공육사는 당분간 류태호 대표(제주국제대학교 공연예술학과 교수)에 의존해야 한다.

제주 극단을 표방하지만 공육사는 구성원이나 활동에 있어 지금껏 제주 연극계에서 볼 수 없던 형태다. 제주 연극의 몇 없는 다양성 가운데 하나로서, 공육사 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을 계속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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