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205. 자식 이길 부모 없다

* 엇나 : 없다

‘품엣 자식’이란 말이 있다. 제가 낳은 자식이지만 자식은 품에 품어 키울 때가 좋다는 얘기다. 응석 부리는 것만이 아니다.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말 잘 듣고 하라는 일 잘하이 행동거지가 여간 착하고 대견스럽지 않다.

한데 그렇게 착하게 말 잘 듣던 자식도 몸이 커지면 이전 같지 않아 꺼칠해진다. 사춘기를 거치면서 나타나는 이런 징후는 날이 갈수록 심해 고질처럼 굳어 간다. 말을 잘 안 듣는 정도가 아니라, 조금만 제 기분에 맞지 않으면 말대꾸하고 심지어는 반발해 대들기까지 않다.

물론 어른이 돼 가는 과정이긴 하지만 부모로선 여간 당황스러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이쯤에서 자식이 이미 자신의 품 안을 벗어났다고 느끼는 것이다.

1950년대 제주에서 촬영한 소 모는 부자(父子). 출처=데이비드 네메스, 제주학연구센터.
1950년대 제주에서 촬영한 소 모는 부자(父子). 출처=데이비드 네메스, 제주학연구센터.

자식은 몰라보게 커서 부모를 내려다보고, 부모는 어느새 장대처럼 커 버린 자식을 올려다보게 된다. 이런 신체적 변화 이상으로 자식은 교육을 받아 많은 지식을 쌓아 부모를 앞서 가게 된다.

자식에게 이래라 저래라 훈시하고 가르치던 것은 옛날얘기가 돼 버린다. 이런 판국인데 자식이 그 부모가 하라는 대로 하겠는가. 불 보듯 뻔 한 게, 자식이 오히려 그 부모를 가르치려 들 것이다. 

‘조식 이길 부모 엇나’는 거의 보편적인 금언이기라도 한 것처럼 항간에 널리 쓰이는 말이다. 자식 이길 부모가 없다는 얘기다. 여기서 ‘이길’이나 ‘이기는’은 미래시제나 현재진행시제는 별로 의미가 없다. ‘이길’이든 ‘이기는’이든 문제될 것이 전혀 없다. 그냥 ‘이긴다’로 풀이되기 때문이다.

집안 대소사를 치름에 부모와 자식이 의견 대립으로 불화를 초래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때 보란 듯 쓰인다.

“아이고, 경덜 햄주만은 조식 이기는 부모 봐서? 부모가 져사주게.”
(아이고, 그렇게들 하고 있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보았는가? 부모가 져야지.)

심하면 부모 자식 간에 불화가 오래 가는 수도 있다. 하지만 부모와 자식은 피를 나눈 인연이니 곧 천륜(天倫)이 아닌가. 누가 이기고 지고의 문제를 초월해야 하리라. 결국 자식에 부모에게 머리 숙이면 되는 일이다.

그렇게 하고 나면 집안이 얼마나 화기애애할 것인가.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지는 법이라서.

더욱이 부모는 자식 잘되기를 소망하니 자식이 굽어들면 얼마나 고마워하랴. 하지만 형제는 조금 다르다. 서로 비교하는 사이라 역지사지보다 형은 제 아우가, 아우는 제 형이 자기보다 잘되는 걸 시새움(시기 질투)하기 일쑤다. ‘이기고 지고’가 ‘조식 이길 부모 엇나’의 경우와는 사뭇 다르다.

# 김길웅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자리>, 시집 <텅 빈 부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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