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예술칼럼, Peace Art Column] (39) 토미야마 카즈미

제주도는 평화의 섬입니다. 항쟁과 학살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주4.3이 그렇듯이 비극적 전쟁을 겪은 오키나와, 2·28 이래 40년간 독재체제를 겪어온 타이완도 예술을 통해 평화를 갈구하는 ‘평화예술’이 역사와 함께 현실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2018년부터 세 나라 세 섬의 예술가들이 연대해 평화예술운동을 벌이고 있어 이에 대한 창작과 비평, 이론과 실천의 공진화(共進化)도 매우 중요합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세 섬 예술가들의 활동을 ‘평화예술칼럼(Peace Art Column)’을 통해 매주 소개합니다. 필자로 국외 작가들이 참여하고 있어 일어, 영어 번역 원고도 동시 게재합니다. [편집자 글]

2018년 12월 말, 나는 인천국제공항에서 오키나와로 돌아오는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게이트 앞에는 혹한의 반도를 벗어나 따뜻한 남쪽 지방에서 새해 휴일을 보내려는 한국인 가족 동반자가 여러 쌍 있었고 기내는 가득 차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왕래를 할 수 없는 지금은 꿈같은 기억이다.

아이들은 들뜬 마음으로 앞으로 갈 곳을 어떤 곳이냐고 부모에게 묻는 듯했다. “감사합니다는 일본어로 뭐라고 해?” 부모님께 배운 대로 '아리가토'하고 반복적으로 발성하는 그 울림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감사의 말을 먼저 기억하고 싶다는 한국 어린이의 마음은 내 마음에도 따뜻한 불을 밝혀, 이것이 평화의 존재라고 생각하게 했다. 이 아이들이 ‘아리가토’를 기억하듯이 오키나와 아이들도 ‘감사합니다’를 기억하고, 그들 세대가 암울했던 역사의 그늘에서 물려받은 유산을 청산해 줄 것을 믿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일본이라는 나라가 해야할 일은 아직 너무 많지만.

이번 평화예술칼럼에서 내 글의 핵심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그 후의 냉전구조가 준 역사의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회와 사람들이 어떻게 치유와 재생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의식이다.

나에게 있어서 오키나와는 메이지정부가 최초로 내국식민지화하고, 그 후에 병합된 조선이나 대만의 운명과 궤를 같이 한 과거의 소국이다. 2차대전 후 오키나와는 '해방'되지 않고 일본에 귀속되어 있다는 점에서 조선·대만과는 다르지만 새로운 제국주의에 의해 평화를 위협받는 상황을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이나 대만의 친구들로부터 배우는 것이 나에게 매우 중요한데, 이처럼 연대의 근거를 찾으면서도 안이하게 동일시하는 위험성 또한 자각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때로는 무형의 폭력으로도 전환되기 때문이다.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평화의 초석 원경, 오키나와 평화 기원 공원.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평화의 초석, 줄지은 각명비.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그것을 단적으로 내게 가르쳐 주는 장소가 오키나와 섬의 평화기원공원에 있는 '평화의 초석'이다. 이것은 오키나와현이 태평양전쟁·오키나와전 종전 50주년을 기념해 1995년에 건립한 각명비로, 1만7900㎡의 부지 내에 116기, 1204면의 화강암비를 동심원상에 배치해, 그 표면에는 24만1593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2020년 6월 현재).

평화의 초석의 컨셉트는, 1945년의 오키나와전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이름을 동심원상에 배치해, 그 표면에는 24만1593명의 이름을 새겼다(2020년 6월 기준). 한국어, 영어, 중국어를 지원하는 검색시스템이 설치되어 이름과 각명비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옛 조선 464명은 물론 식민지 조선에서 오키나와로 강제 연행돼 숨진 사람들이다.

오키나와의 피연행자는 최소 3400명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일본 정부에 의해 책임 있는 추적이 이뤄지지 않아 각명에 해당된 오키나와 현과 오키(在沖)의 옛 조선 관계자들을 열심히 조사했다. 건립 이후 추가해 464명이라는 수에 달했지만 그렇다고 실태를 반영했다고 보기엔 너무 적다. 이들 464명은 실제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82명, 대한민국 382명으로 구분돼 있다. 출신지 표기에 대해 오키나와 거주의 구 조선 출신자의 의견은 갈라져, 최종적으로 오키나와현은 유엔가맹의 국명에 준거하기로 했다. 오키나와 전투가 벌어졌던, 1945년 당시 조선은 둘로 나뉘지 않았지만 '평화의 초석'이라는 오키나와의 추모장에서조차 남북분단이라는 전후 부조리가 가시화된다.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각 장소 검색용 단말기.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평화의 초석, 대한민국 출신 전몰자.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평화의 초석, 대만과 북한의 전몰자.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1995년 6월 평화의 초석 제막식에 일본 정부의 무라야마 수상을 비롯한 3부 요인과 주일 미국대사 등이 참석했다. 재일본 대한민국민단 오키나와현 지방본부 단장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오키나와현 본부위원장은 이들 앞에서 식사(式辞)를 하고, 강제연행이라는 만행을 저질러 타향에서 동포를 죽음으로 내몬 책임을 전후에도 다하지 않은 일본 정부를 비판했다. 그리고 오키나와전에서 희생된 피연행자의 정확한 수의 해명작업을 더욱 촉진하여 평화의 초석이 일본의 과거의 진정한 청산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표명했다. 이 행사에는 물론 대만 대표도 참석했다. 그것은, 대일본제국 패배 50년이라고 하는 고비에 오키나와 땅에서 행해졌던, 일본식민지 통치를 재심하는 특필해야 할 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구 조선 출신 사망자의 유족 중에는 평화의 초석에 대한 각명을 거부하는 분도 있었다. 그 뜻은 지극히 깊다. 국적과 군민의 구별 없이 모든 전몰자를 한자리에 모으자는 컨셉트는 누구나 전쟁이라는 국가폭력의 피해자라는 사상에 기초한다. 그러나 이 일종의 평등주의는 추모의 이름으로 가해와 피해를 혼탁하게 만들고 전쟁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지 않는 일본의 현주소를 추인하는 것이라는 비판도 샀다. 나 또한 평화의 초석이라는 설치미술이 누구나 피해자인 동시에 누구나 가해자인 전쟁의 실상을 거꾸로 덮어두는 장치가 되어 버리는 위험을 내포한다는 것을 이해한다.

오키나와의 민중도 단지 무고한 피해자였던 것은 아니다. 오키나와인들도 일본제국의 황민화 교육에 충실히 침략전쟁에 동원돼 후방을 지키며 전쟁을 지탱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초석에는 오키나와인에 한해서 오키나와 이외의 장소-중국 기타 아시아 각지에서의 전몰자를 각명하고 있다. 오키나와인도 황국의 일원으로 가해자였고, 또 오키나와로 끌려온 조선 사람들의 곤경을 동정하면서도 약한 자가 더 약한 자를 짓밟듯이 제국의 폭력에 가담했다.

그런 시대였다, 어쩔 수 없었다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망각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오키나와 사람들이 피해의 자기도취에 빠지지 않으려면 평화의 초석에 이름이 새겨진, 혹은 지금도 새겨지지 않는 구 조선이나 대만 사람들이 왜 오키나와에서 죽어야 했는지를 거듭 생각해야 한다.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한국인위령탑, 한국정부 지원으로 1975년 건립,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제주의소리

한국의 지인들과 평화기념공원에 동반해 태극기가 휘날리는 한국인 위령탑(1975년 건립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를 새김)이나 평화의 초석 앞에 선다. 평소에는 명랑한 친구들이 거기서 나타내는 침묵, 내 마음속에 오고가는 사념을 외국인인 나는 진정으로 공유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같은 동아시아의 인간으로서 식민지 지배와 해방 후 분단이라는 그들 역사의 무게를 상상하는 노력을 계속했으면 한다. 한국 어린이들의 '아리가토' 하는 목소리의 울림이 가르쳐 주었듯이 평화의 초석이란 본래 사람의 마음에 다져지는 것이니까.

# 토미야마 카즈미

토미야마 카즈미(豊見山和美 TOMIYAMA Kazumi) 씨는 도쿄 소재 추오대학교와 류큐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며, 영국 런던대학교 아카이브연구 석사과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오키나와현립공문서관의 아키비스트로 일하면서, 오키나와 전후사를 중심으로 문화평론을 하고 있습니다.

The Cornerstone of Peace
TOMIYAMA Kazumi

It was late December 2018 and I was at Incheon International Airport waiting to board my flight back to Okinawa. The plane was fully booked with several families in front of the gate, eager to leave the frigid peninsula and spend the New Year holidays in the warm southern Island. It's a dreamy memory now that the Covid-19 has made traffic impossible. The children seemed excited, asking their parents questions about where they were heading to. How do you say "Kam Sam Nida" in Japanese? The sound of them repeating "Arigatou" as they were taught by their parents was so adorable. The Korean children's intention to learn words of gratitude first lit a warm fire in my heart and made me think that this is the way peace should be. Just as these children learned to say "Arigatou," I hope that the children of Okinawa will learn to say "Kamsamnida," and I trust that their generation will clear away the negative legacy of a dark history. There is still too much for Japan to do for that to happen.

One of the pillars of this column is my awareness of the question of how societies and people who have experienced the trauma of history caused by Japan's colonial rule before WWII and the subsequent Cold War structure can be healed and be regenerated. I recognize Okinawa as once a small country that became the first internal colony of the Meiji government and that in line with the fate of Korea and Taiwan where annexed later. Although Okinawa differs from Korea and Taiwan in that it was not "emancipated" after WWII and still belongs to Japan, it shares the same situation of having its peace threatened by the new imperialism. Therefore, it is very important for me to learn from my friends in Korea and Taiwan. And while seeking grounds for solidarity in this way, I should also be aware of the danger of easily equating. Because it can sometimes turn into intangible violence.

The place that makes this clear to me is <the Cornerstone of Peace> in the Peace Memorial Park on the Okinawa island. This is a monument erected by Okinawa Prefecture in 1995 to commemorate the 50th anniversary of the end of the Pacific War and the Battle of Okinawa. 116 granite monuments with 1,204 facets are arranged in concentric circles on a 17,900 square meter site, and 241,593 names are inscribed on their surfaces (as of June 2020). Its concept is to inscribe the names of those who died in the Battle of Okinawa in 1945, regardless of nationality, military or civilian (including Okinawans who died due to the war in and outside Okinawa after the Manchurian Incident). Thus, not only 149,529 Okinawans, but also 77,448 mainland Japanese, 464 Korean, 34 Taiwanese, and 14,091 soldiers from the U.S. and U.K. who were enemies of Japan, are all listed together according to their place of origin. A search system in Korean, English, and Chinese has been set up so that visitors can check the names and locations of the inscriptions.
The 464 former Koreans are, of course, those who were forcibly taken from colonial Korea and died in Okinawa. It is said that there were at least 3,400 people who were taken to Okinawa, but there was no responsible tracking of them by the Japanese government. Although the number reached 464 due to the addition after the erection, 464 is regarded too small to reflect the actual situation. The 464 are inscribed separately on the monument as 82 for the DPRK and 382 for the ROK. There were various suggestions about the birthplace notation from Koreans living in Okinawa, and in the end, Okinawa Prefecture decided to follow the names of the member countries of the United Nations. At the time of the Battle of Okinawa in 1945, Korea was not divided into two, but the absurdity of the postwar division into North and South is visible even at this Okinawan memorial site of peace.

The unveiling of<the Cornerstone of Peace> in June 1995 was attended by all the top executives of the Japanese government including Prime Minister Murayama, and the U.S. Ambassador to Japan. The head of the Okinawa Headquarters of the Korean People's Liberation League in Japan and the chairman of the Okinawa Headquarters of the Korean General Association in Japan both delivered speeches in front of the guests, criticizing the Japanese government for not fulfilling  its responsibility after the war, which had resulted in the deaths of their countrymen in a strange land as a result of the barbaric practice of forced removal. They also expressed their hope that<the Cornerstone of Peace> would lead to a true reckoning of Japan's past by further clarifying the exact number of the victims of the Battle of Okinawa. Of course, a representative from Taiwan was also present at the ceremony. It was a noteworthy moment in Okinawa to re-examine the Japanese colonial rule on the 50th anniversary of the defeat of the Japanese Empire. 

However, some of the bereaved families of the deceased from Korea refused to have their family member’s names inscribed on the Cornerstone. The significance of this is extremely profound. The concept of bringing together all the war dead, regardless of nationality or military or civilian status, is based on the idea that everyone was a victim of national violence. However, this kind of egalitarianism has led to criticism that it muddies the waters between the perpetrators and the victims in the name of mourning, and that it is an affirmation of the current situation in Japan where the responsibility for the war is not clearly defined. I also understand that the installation "Cornerstone of Peace" has the danger of becoming a device to cover up the reality of war, where everyone is a victim and everyone is a perpetrator at the same time.

The Okinawans were not just innocent victims. The Okinawans were also mobilized for invasions, faithfully following the imperialist education, and supported the war by guarding the rear of the guns. As mentioned earlier, the names of the Okinawan war dead outside Okinawa (China and other Asian regions) are engraved. The Okinawan, as members of the Empire, were also perpetrators, and while sympathizing with the plight of the Korean people brought to Okinawa, they were also complicit in the violence of the empire, as the weak trampled on the weaker. We can say that it was that kind of time, that it was inevitable. But it is unacceptable to forget it. In order for Okinawans not to fall into the narcissism of victimization, they must repeatedly consider why the Korean and Taiwanese, whose names have been inscribed or still remain inscribed, had to die in Okinawa.

I accompanied Korean acquaintances to the Peace Memorial Park, where we stood in front of the Korean Memorial Tower (erected in 1975, inscribed with the handwriting by then-President Park Chung-hee) and <the Cornerstone of Peace>. Being a foreigner, I may not be able to truly share the silence of my usually cheerful friends and the thoughts that come to their minds. But as a fellow East Asian, I hope to continue my efforts to imagine their burden of the history of colonial rule and division after emancipation. As the echo of the Korean kid's "Arigatou(Thank you)" taught me, <the cornerstone of peace> is essentially laid in the hearts of ours.

Photo 1: Distant view of <the Cornerstone of Peace>, Peace Memorial Park, Okinawa
Photo 2: Inscriptions on <the Cornerstone of Peace>
Photo 3: Terminal for locating inscriptions
Photo 4: Inscriptions of War dead from South Korean
Photo 5: Inscriptions of War dead from Taiwan and North Korea
Photo 6: Korean Cenotaph, erected in 1975 with support from the South Korean government Peace Memorial Park, Okinawa


<平和の礎> 
豊見山和美

2018年12月の終わり、私は仁川国際空港で沖縄へ戻る飛行機の搭乗を待っていた。ゲートの前には極寒の半島を出て暖かな南国で新年の休日を過ごそうという家族連れが何組もいて、機内は満席だった。コロナ禍のために往来のできない今となっては夢のような記憶だ。子供たちは弾む心で、これから向かう場所について何かと両親に質問しているようだった。カムサムニダは日本語で何ていうの?両親に教わったとおりに「アリガトウ」と繰り返し発声するその響きのなんと愛らしかったことか。感謝の言葉をまず覚えたいという韓国の子どもの思いは、私の心にも温かな火を灯し、これこそが平和のあり方だと思わせてくれた。この子たちがアリガトウを覚えるように、沖縄の子どもたちもカムサムニダを覚え、彼らの世代が暗鬱な歴史の負の遺産を清算してくれることを信じたい。そのために日本という国がなすべきことはまだあまりにも多いけれども。

この平和芸術コラムにおける私のひとつの基軸は、第二次世界大戦前の日本の植民地支配とその後の冷戦構造が与えた歴史のトラウマを経験した社会や人々が、どのように治癒と再生を果たしうるかという問題意識である。私にとって沖縄とは明治政府が最初に内国植民地化し、その後に併合された朝鮮や台湾の運命と軌を一にしたかつての小国だ。第二次大戦後、沖縄は「解放」されずに日本に帰属している点で朝鮮・台湾とは異なるが、新たな帝国主義によって平和を脅かされる状況を共有している。ゆえに、韓国や台湾の友人からの学びが私にとってとても重要なのだが、このように連帯の根拠を求めつつも、安直に同一視する危うさについてもまた自覚的でなければならないと思う。それは時として無形の暴力にも転化するからだ。

そのことを端的に私に教えてくれる場所が、沖縄島の平和祈念公園にある<平和の礎>である。これは沖縄県が太平洋戦争・沖縄戦終結50周年を記念して1995年に建立した刻銘碑で、17,900平方メートルの敷地内に116基1,204面の花崗岩の碑を同心円状に配し、その表面には241,593人の名が刻まれている(2020年6月現在)。<平和の礎>のコンセプトは、1945年の沖縄戦で死亡した人々の氏名を、国籍や軍人、民間人の区別なく刻銘するというものだ(沖縄人に限っては満州事変以降に県内外において戦争が原因で死亡した者なども含む)。したがってそこには149,529人の沖縄人だけでなく、日本本土77,448人、旧朝鮮464人、台湾34人、そして敵国だったアメリカやイギリスの兵士14,091人が、出身地別に一堂に名を連ねる。韓国語、英語、中国語に対応した検索システムが設置され、氏名や刻銘碑位置を確認できるようになっている。

旧朝鮮464人とはもちろん、植民地朝鮮から沖縄へ強制連行されて落命した人々だ。沖縄への被連行者は少なくとも3,400人いたとされるが、日本政府による責任ある追跡はなされておらず、刻銘にあたって沖縄県と在沖の旧朝鮮関係者が懸命に調査した。建立以降の追加により464人という数に達したが、それでも実態を反映したとするには少なすぎるだろう。この464人は、実際には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82人、大韓民国382人と分けて刻銘されている。出身地表記について沖縄在住の旧朝鮮出身者の意見は割れ、最終的に沖縄県は国連加盟の国名に準拠することとした。沖縄戦の1945年当時、朝鮮は2つに分かれてなどいなかったが、<平和の礎>という沖縄の追悼の場においてさえ南北分断という戦後の不条理は可視化される。

1995年6月の<平和の礎>の除幕式に、日本政府の村山首相をはじめとする三権の長、駐日米国大使などが参列した。在日本大韓民国民団沖縄県地方本部団長と在日本朝鮮人総聯合会沖縄県本部委員長は彼らの前で式辞を述べ、ともに強制連行という蛮行の結果、異郷の地で同胞を死に至らしめた責任を戦後も果たそうとしない日本政府を批判した。そして沖縄戦で犠牲になった被連行者の正確な数の解明作業をさらに促進し、<平和の礎>が日本の過去の真の清算に結びつくものとなることへの期待を表明した。この式典にはもちろん台湾からの代表も臨席した。それは、大日本帝国敗北50年という節目に沖縄の地でなされた、日本植民地統治を再審する特筆すべき瞬間だったと言える。

しかし、旧朝鮮出身の死亡者の遺族には、<平和の礎>への刻銘を拒否する方もいた。その意味は極めて深甚だ。国籍や軍民の区別なくすべての戦没者を一堂にというコンセプトは、誰もが戦争という国家暴力の被害者であるという思想に基づく。しかしこの一種の平等主義は、追悼の名のもとに加害と被害を混濁させ、戦争責任の所在を明確にしない日本の現状を追認するものだという批判も招いていた。私もまた<平和の礎>というインスタレーションが、誰もが被害者であると同時に誰もが加害者であるという戦争の実相を、逆に覆い隠す仕掛けとなってしまう危うさを孕むことを理解する。

沖縄の民衆もただ無辜な被害者だったわけではない。沖縄人も大日本帝国の皇民化教育に忠実に侵略戦争に動員され、銃後を守って戦争を支えた。先に述べた通り、礎には沖縄人に限って沖縄以外の場所―中国その他アジア各地―での戦没者を刻銘している。沖縄人も皇国の一員として加害者だったし、また、沖縄に連行されてきた朝鮮の人々の苦境に同情しつつも、弱き者がより弱き者を踏みつけるように、帝国の暴力に加担した。そういう時代だった、仕方がなかったということはできる。しかし、それを忘却するのは許されないことだ。沖縄の人々が被害の自己陶酔に陥らないためには、<平和の礎>に名を刻まれた、あるいは今なお刻まれぬ旧朝鮮や台湾の人々が、なぜ沖縄で死な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のかを、繰り返し考えなければならない。

韓国の知人と平和祈念公園に同伴し、太極旗が翻る韓国人慰霊塔(1975年建立、当時の朴正煕大統領の揮毫を刻字)や<平和の礎>の前に立つ。いつもは朗らかな友人たちがそこで示す沈黙、その心中に去来する思念を、外国人である私は真に共有しえないかもしれない。だが、同じ東アジアの人間として、植民地支配と解放後の分断という彼らの歴史の重さを想像する努力を続けたいと願う。韓国の子どもたちの「アリガトウ」という声の響きが教えてくれたように、平和の礎とは本来、人の心に築かれるものなのだから。

写真1 <平和の礎>遠景 沖縄・平和祈念公園
写真2 <平和の礎>並び立つ刻銘碑
写真3 刻銘場所の検索用端末
写真4 <平和の礎> 大韓民国出身の戦没者
写真5 <平和の礎> 台湾と北朝鮮の戦没者
写真6  韓国人慰霊塔 韓国政府の支援で1975年建立 沖縄・平和祈念公園


和平之礎

豊見山和美當時是2018年12月末,我正在仁川機場等待返回沖繩的航班。 班機滿座,登機門前的幾個家庭,急切地想離開冰冷的半島到溫暖的南方島嶼度過新年假期。 現今 Covid-19疫情已讓跨國旅行遙不可及,這真是一個夢幻般的回憶。 孩子們似乎很興奮,問父母他們要去哪裏。 如何用日語說「感謝」? 在父母教導下,他們重複「阿里阿多」(アリガトウ)的聲音非常可愛。 韓國孩子們學習謝謝的意圖,首先點燃了我心中的溫暖之火,讓我覺得和平應該如此。 就像這些孩子學會說「阿里阿多」一樣,我希望沖繩的孩子們也能夠學會說「感謝」(감사합니다),並相信他們這一代人能夠清除黑暗歷史的負面遺緒。 對日本這個國家來說,仍有太多工作要做。

這專欄讓我意識到的認知基礎,在二戰前經歷了日本殖民統治及其後的冷戰結構所造成的歷史創傷,和人民如何得到治癒和再生的社會問題。 對我而言,沖繩曾經是一個小國,它成爲明治政府併吞的內部殖民地,也符合之後吞併韓國和臺灣的策略。 雖然沖繩不同於韓國和臺灣,因爲它在二戰結束後沒有被「解放」並仍然屬於日本,但它也有着被新帝國主義威脅的相同的情況。 因此,向韓國和臺灣的朋友們學習是非常重要的。 在尋求團結的理由的同時,也應該意識到容易被人等同識別的危險。 因爲它有時會變成無形的暴力。

明確指出這一點的地方是沖繩島和平紀念公園內的《和平之礎》。 這是沖繩縣1995年爲紀念太平洋戰爭結束和沖繩戰役50週年而建造的紀念碑,在17900平方米的遺址上,以同心圓排列116座1204個面體的花崗岩紀念碑,其表面刻有241593個名字(截至2020年6月)。 其概念是,不論國籍、軍事或平民(包括在滿洲事件後因沖繩內外戰爭而喪生的沖繩人)。因此,不僅有149,529名沖繩人,而且還有77,448名日本日本人,464名朝鮮人,34名台灣人和14,091名來自日本和美國的名單,他們是日本的敵人,他們都是根據原籍地一起列出的。設置了韓文,英文和中文檢索系統,以便訪客可以查詢碑文的名稱和位置。

當然,這464名前韓國人也是被強行從韓國殖民地帶走在沖繩去世的犧牲者。 據說至少有3400人被帶到沖繩。但日本政府沒有對此負責的追蹤。 雖然因設置後增加而達到464人,但普遍認爲464人太少,無法反映實際情況。 第464號碑文分別刻有北朝鮮和的82號碑和大韓民國的382號碑。 居住在沖繩的韓國人對出生地符號有各種建議,最後,沖繩縣決定採用聯合國會員國的名字。在1945年的沖繩戰役之時,韓國並未一分為二,但是即使在這個沖繩和平紀念館,戰後南北分裂的荒謬之處也可見一斑。

1995年6月《和平之礎》揭牌時,包括村山首相在內的日本政府高級官員和美國駐日大使都出席了。 日本朝鮮人民解放聯盟沖繩總部的負責人和日本大韓民國總工由於野蠻的強迫搬遷,他們的同胞在陌生的土地上喪生。他們還表示希望,通過進一步澄清沖繩戰役受害者的確切人數,《和平之礎》將對日本的過去產生真實的認識。當然,來自台灣的代表也出席了典禮。在沖繩島,是一個值得紀念的時刻,它是在日本帝國失敗50週年之際重新審查日本的殖民統治。

但是,部分韓國死者遺屬拒絕在《石碑》上刻上遺屬的名字。 這其中的意義極其深遠。 將所有戰爭死難者集合在一起,不論其國籍、軍種或文官職位如何,其概念是基於人人都是民族暴力的受害者這一概念。 但是,這種齊頭平等主義卻引起了「以哀悼的名義混淆犯罪者和受害者」的批評,是對日本戰爭責任未明確界定現狀的肯定。 我也理解,設置《和平之礎》有成爲掩蓋戰爭現實的危險,每個人都是受害者,每個人也同時都是加害者。沖繩人不僅僅是無辜的受害者。 沖繩人也是爲侵略而動員,忠誠地跟隨帝國主義的教育,並透過守衛砲口來支援戰爭。 如前所述,刻有沖繩(中國等亞洲地區)外的琉球戰死者名字。 沖繩人作爲帝國成員也是施暴者,他們在同情韓國國民的困境同時,隨着弱者踐踏弱者,他們也是帝國暴力事件的共謀者。我們可以說那樣的時間,是不可避免的。 但是忘記它是不可接受的。 爲了避免沖繩人陷入受害者的自責心理,他們必須反覆思考,爲什麼刻有名字或留有名字的韓國人和臺灣人必須在沖繩死去?我隨同韓國人一起去了和平紀念公園,在那裡我們站在韓國紀念塔(建於1975年,當時的總統朴正熙親筆題寫)和《和平之礎》前。作為外國人,我可能無法真正地分享我平時愉快朋友的沉默以及他們腦海中浮現的想法。但是作為東亞同胞,我希望繼續努力,以想像他們在解放後對殖民統治和分裂歷史的負擔。正如韓國孩子的「謝謝你「阿里阿多」(アリガトウ)的迴聲所教給我的那樣,《和平之礎》基本上是放在我們心中。

照片1:沖繩和平紀念公園《和平之礎》的遠景
照片2:《和平之礎》的碑文
照片3: 用於定位碑文的終點
照片4:韓國戰爭死難者碑文
照片5:臺灣和朝鮮戰爭死難者碑文
照片6: 《韓國人慰靈塔》韓國政府支持下建立的紀念碑,沖繩和平紀念公園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