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기획-모두를 위한 길](中) 평소 의식 못했던 ‘인도 경계석’, 휠체어에선 ‘성벽’ 같아

우리가 무심코 걸어왔던 길, 어느 누구에게나 안전할까요? 장애인, 비장애인, 교통약자 가릴것 없이 [모두를 위한 길]이어야 합니다. 보행권은 장애, 성별, 나이, 종교, 신분, 소득에 관계없이 모든 국민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보행할 권리를 최대한 보장 받도록 국가가 법률로 정한 권리입니다. 그러나 교통약자들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특히 제주의 도로 현실은 교통약자들에게는 고난의 길이 되곤 합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교통약자들과 동행한 생생한 현장을 세 차례에 걸쳐 진단해봤습니다. / 편집자  

“탈만할 것 같다.” 

휠체어를 타고 거리로 나선 지 1분여 남짓, 차와 보행로가 구분되지 않은 이면도로를 벗어나 보행로에 진입하는 순간 저 말을 내뱉은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20cm도 안 되는 보도블록 경계석 턱은 절벽같이 느껴졌고, 경사로를 오르기 위해 휠체어 바퀴를 굴리는 두 팔은 젖 먹던 힘까지 힘이란 힘은 모조리 쥐어짜야 했다. 휠체어 바퀴를 너무 꽉 쥔 탓에 손아귀에선 힘이 빠져나갔고, 넘어지지 않게 애쓰느라 온 신경을 집중하다 보니 꽃샘추위를 비웃듯 어느새 등줄기를 타고 비지땀이 흘러내렸다. 

교통약자의 현실을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는 그 실상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판단으로 지체장애인을 중심으로 한 교통약자들과의 현장·동행 취재를 위해 기자는 지난 8일 직접 휠체어에 올랐다.  

제주장애인인권포럼의 도움으로 활동형 휠체어를 빌려 제주시 노형동 한라대학교 인근에서 출발해 제주장애인인권포럼이 있는 일도2동까지 이동을 체험해봤다. 이동 경로는 노형동 주민센터와 우편집중국, 식당, 카페 등 편의시설을 방문하는 일상으로 구성했다.

휠체어를 빌릴 때 김통일 제주장애인인권포럼 팀장은 휠체어를 처음 타본다는 기자의 말에 “뒤로 넘어가지 않게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다. 경사로를 올라갈 때 무게중심을 앞으로 두지 않을 경우 뒤로 잘 넘어간다는 것. 이 말은 실제로 이동할 때 많은 도움이 됐다. 

사진=최윤정 기자. ⓒ제주의소리
제주시 노형동 한라대학교 인근을 출발하자마자 이면도로를 벗어나 인도에 올라서려는 순간, 차도와 인도를 구분하는 경계석의 아주 낮은 턱에도 걸려 휠체어의 인도 진입이 순탄치 않았다. 그 낮은 경계석이 마치 높은 성벽 같았다. 기자는 인근 우편집중국에서 부모님께 5kg의 귤상자 소포를 보내기 위해 휠체어로 이동하던 중 수십번 귤 상자를 길바닥에 떨어뜨려야 했다. 그 정도로 보행로는 그 이름이 무색할 만큼 울퉁불퉁하고 환경이 좋지 않았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의 경우에 이 정도의 일상생활도 쉽지 않으니 가능하면 집 밖으로 나서지 않으려 한다는 말이 왜 그런지 절절하게 가슴에 와닿았다. 휠체어 체험은 김찬우 기자, 영상과 사진 취재는 최윤정 기자가 맡았다. ⓒ제주의소리
사진=최윤정 기자. ⓒ제주의소리
횡단보도 녹색 신호등에 맞춰 정상적으로 출발했지만 휠체어가 횡단보도 중간쯤 왔을까? 눈앞에 보이는 보행 신호등의 남은 시간은 3초였다. 초조한 마음으로 다급히 휠체어 바퀴를 굴렸지만 결국 빨간 불로 바뀌고 한참 뒤에야 건너편 인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휠체어 운전이 서툰 기자 탓도 있으나 인터뷰에 응했던 노인들께서 횡단보도 신호가 너무 짧다는 지적이 그제야 이해가 됐다. 휠체어 체험은 김찬우 기자, 영상과 사진 취재는 최윤정 기자가 맡았다. ⓒ제주의소리

노형동 자택에서 출발, 주민센터와 우체국을 방문하기 위해 휠체어를 타고 보행로로 진입하는 순간 첫 번째 고비를 맞았다. 5cm 남짓한 아주 낮은 턱에 휠체어가 걸려 올라갈 수 없었던 것. 요령을 몰라 진땀을 흘리다 앞바퀴를 살짝 공중에 띄워 안착할 수 있었다. 

턱을 넘기 위해 자칫 무게중심을 뒤쪽으로 조금만 더 기울였으면 뒤로 완전히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가까스로 오른 보행로는 여기저기 튀어나온 보도블록으로 가득해 그야말로 가시밭길이었다.

내리막 속도를 조절하기 위해 바퀴를 꼭 붙들어 맬 수밖에 없었고, 앞바퀴가 걸려 물건을 떨어뜨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됐다. 이 모든 일은 10분도 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났다. 

신호등이 있는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미처 다 건너가기도 전에 빨간불이 들어와 황급히 이동 해야만 했다. 우여곡절 끝에 노형동주민센터에 도착한 뒤 시계를 보니 평소 걸었을 때와 비교해 두 배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사진=최윤정 기자. ⓒ제주의소리
제주시 노형동 주민센터에서 민원을 요청하고 있는 취재기자. 민원인 데스크 아래로 무릎이 들어갈 수 있도록 설치돼 있어 휠체어를 타고도 원활히 업무를 볼 수 있었다. 휠체어 체험은 김찬우 기자, 영상과 사진 취재는 최윤정 기자가 맡았다. ⓒ제주의소리
ⓒ제주의소리
인도를 따라 이동하던 중 인도를 점령한 공사 차량에 가로막혀 어쩔 수 없이 차도로 돌아가야 했다. 차도로 내려가는 순간에도 바닥 요철과 지나가는 차량들 때문에 실제로 등골이 오싹했다. 경계석이나 작은 돌부리에 걸려 앞으로 낙상할 경우 여지없이 차도에 쓰러질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 보행로를 신뢰할 수 없다던 지체장애인 준협 씨의 말이 떠올랐다. 휠체어 체험은 김찬우 기자, 영상과 사진 취재는 최윤정 기자가 맡았다. ⓒ제주의소리

민원처리를 위해 방문한 노형동주민센터와 우편집중국은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길이 비교적 괜찮았다. 하지만 제주시청 인근으로 가는 315번 버스를 타기 위해 원노형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에서 두 번째 고비를 맞았다. 

원노형마을 버스정류장을 지날 때 보행로를 차지한 공사 차량 때문에 차도로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 공사 차량 옆으로 길이 있었지만, 도로가 다 깨진 데다 폭이 좁은 탓에 휠체어는 지나갈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차도로 내려 앞으로 가는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는 실제로 등골이 오싹할만큼 큰 위협으로 느껴졌다. 뒤를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차량이 이쪽으로 다가온다면 속수무책으로 사고가 날 수밖에 없는 상황. 공사장 앞에는 현장 관계자도 있었지만, 휠체어 이동자가 다가감에도 아랑곳 않아 차도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인도가 막힌 곳에서 교통약자의 안전을 담보해주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버스정류장 역시 난국이었다. 정류장 좌우로 세워진 가로수와 가로등 때문에 저상버스가 휠체어가 서 있는 위치에 멈추지 않는다면 탑승 자체가 불가능한 구조였다. 예상대로 도착한 저상버스는 위치를 빗겨 섰고, 기사님이 위치를 확인한 후에야 다시 버스 위치를 이동한 끝에 저상버스에 오를 수 있는 경사로 판을 펼쳐놓았다. 

버스 기사님은 저상버스 운영 수칙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안전장치를 제대로 채웠고, 목적지까지 불편 없이 이동할 수 있도록 도왔다. 역시나 문제는 버스정류장이었다. 

사진=최윤정 기자. ⓒ제주의소리
저상버스를 타기 위해 기다리던 버스정류장은 가로수에 막혀 버스에 제대로 오를 수 없었다. 버스 역시 승차지점을 맞추지 못해 정차했다가 재차 앞으로 이동하는 등 위치를 조정하고 나서야 경사로 판을 펼쳐 탑승할 수 있었다. 휠체어 체험은 김찬우 기자, 영상과 사진 취재는 최윤정 기자가 맡았다.ⓒ제주의소리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돌아다닌 제주시청 대학로. 사람이 많은 곳이니만큼 휠체어가 진입할 수 있도록 경사로도 많이 있겠지라는 생각은 처참히 무너졌다. 대부분 가게는 턱과 계단이 있어 휠체어로는 들어갈 수 없었고, 그나마 있는 경사로는 혼자서 올라갈 수 없는 높이였다. 휠체어 체험은 김찬우 기자, 영상과 사진 취재는 최윤정 기자가 맡았다. ⓒ제주의소리

버스 하차도 고난의 연속이긴 매한가지. 하차하려는 정류장 역시 그루터기 등 방해물 때문에 버스가 처음 멈춘 곳에는 휠체어가 내릴 수 없었다. 기사님은 버스를 다시 앞으로 이동한 뒤 경사로 판을 펼쳤다. 버스에 오를때도 내릴때도 휠체어가 자유롭게 오르내릴 수 있는 정류장 환경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버스에서 내린 뒤 늦은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제주시청 대학로 인근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이 역시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곳곳에 맛집 간판들이 즐비했지만 정작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음식점 찾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평소였다면 아무렇지 않게 올랐을 한 칸의 계단은 휠체어에 앉은 순간 공간을 분리시키는 장벽이 됐다. 수십 분을 헤맨 끝에 점심을 겨우 해결하고 나니 카페를 찾는 일은 ‘어차피 못갈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자연스레 관두게 됐다. 

그러다 보니 이동하면서도 어느새 튀어나온 곳을 피하고 완만한 경사를 찾기 시작했다. 빠른 길보다 안전한 길을 찾기 시작했고, 눈앞에 있는 모든 것들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평소보다 두 배 이상 걸리는 데도 편하고 안전한 길이라면 우회하고 싶어졌다.

당초 계획한 길은 이미 무용지물이 됐다. 보행로 위로 세운 차량과 깨진 보도블록, 이동하기 힘든 턱으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5시간여 만에 노형동에서 일도2동까지 도착했다. 포털 길찾기 서비스를 통해 같은 방법으로 같은 경로를 이동했을 경우를 예측해보니 1시간 50여 분으로 나타났다.

민원 처리 시간과 점심시간을 1시간으로 잡았을 때 약 2시간 50분. 차이는 극명했다. 휠체어를 타고 한가하게 주변을 구경하며 다니지 않고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부지런히 움직였음에도 약 5시간이 걸렸다. 

사진=최윤정 기자. ⓒ제주의소리
목적지까지 가는 중에도 사진과 같이 잠시 비상깜빡이를 켜고 보행로에 걸쳐 세워진 차량이 많았다. 통과 방법은 차도로 내려가 돌아가거나 언제 돌아올지 모를 차주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었다. 휠체어 체험은 김찬우 기자, 영상과 사진 취재는 최윤정 기자가 맡았다. ⓒ제주의소리
사진=최윤정 기자. ⓒ제주의소리
5cm 남짓 높이의 철제 레일도 휠체어 이동자에겐 큰 장벽이었다. 정면을 바라보며 턱을 넘어보려 십수번 시도했지만 실패하고선, 결국 휠체어를 후진 방향으로 이동해 겨우 진입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도심 곳곳의 보행로 환경과 비교하면 그나마 이 정도는 이동하기 쉬운 편이었다. 휠체어 체험은 김찬우 기자, 영상과 사진 취재는 최윤정 기자가 맡았다. ⓒ제주의소리

휠체어를 반납하고 일어선 순간 눈앞의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평소였다면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을 요철과 보행로 턱, 그곳에 걸쳐 세운 차량, 좁디좁은 폭 등 모든 것이 신경 쓰였다. 휠체어를 미느라 애쓴 손은 고생을 증명하듯 여기저기 긁힌 잔 상처와 바퀴를 통해 묻은 거뭇거뭇한 때로 가득했다.

그들의 시선으로 처음 세상을 바라봤다. 이렇게 불편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 편리를 앞세워 그들의 권리를 침해한 적은 없는지 돌아보게 됐다. 반나절도 안 되는 체험으로 교통약자들의 불편함을 모두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통행을 보장하는 보행로는 자유를 앗아갔고, 어디서 무엇을 하겠다는 목표는 사치가 됐다. 갈 수 있는 곳을 먼저 찾게 됐고, 거리보다 이동하기 편하고 안전한 길을 우선하게 됐다. 

제주장애인인권포럼 산하 제주장애인자립생활센터 임연정 대리는 “2000년대 초반 서울 지하철 리프트 승강기에서 한 중증장애인이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엘리베이터 설치 투쟁이 시작됐다”며 “당시 사람들은 왜 저러냐는 시선과 이기적이라는 말을 내뱉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자 노약자와 임산부, 어린이 등 다양한 교통약자들이 모두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라며 “제주에 지하철은 없지만, 이 같은 내용이 시사하는 바는 이동권 문제는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보편적 문제라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모두가 이동제약 없이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기 위해선 사소한 것에서부터의 관심이 필요하다. 잘 닦은 보행로를 만들어 이동에 불편함이 없도록 하는 것은 특정된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다. 장애인 비장애인 구분 없는 '모두를 위한 길'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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