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기획-모두를 위한 길](下) 교통약자 돼보니 비로소 보인 ‘문제투성이’ 도로

우리가 무심코 걸어왔던 길, 어느 누구에게나 안전할까요? 장애인, 비장애인, 교통약자 가릴것 없이 [모두를 위한 길]이어야 합니다. 보행권은 장애, 성별, 나이, 종교, 신분, 소득에 관계없이 모든 국민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보행할 권리를 최대한 보장 받도록 국가가 법률로 정한 권리입니다. 그러나 교통약자들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특히 제주의 도로 현실은 교통약자들에게는 고난의 길이 되곤 합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교통약자들과 동행한 현장을 세 차례에 걸쳐 진단해봤습니다. / 편집자  

휠체어에 오른 순간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울퉁불퉁한 보행로와 그 끝을 막아 세운 차량, 짧은 횡단보도 신호, 불편한 버스정류장. 도로는 위협적이었고, 갈 수 있는 곳은 점점 줄어들었다. 

교통약자의 이동권 문제는 해마다 되풀이된다. 그 가운데 대중교통을 대표하는 버스 문제도 마찬가지다. 제주도는 해마다 저상버스 도입을 늘리고 있지만, 아직은 부족한 수준이다. 

2019년 12월 기준 도내 저상버스는 총 103대로 제주시 38대, 서귀포시 65대였다. 지난해 12월엔 이보다 25대 늘어난 제주시 63대, 서귀포시 65대 총 128대가 됐다. 

제주시 인구가 약 50만 명, 서귀포시 인구가 약 19만 명인 것을 고려했을 때 수요 불균형은 물론 차량 대수도 현저히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저상버스 노선 역시 동 지역을 벗어나기 어려워 읍면지역 교통약자의 소외가 심각하다. 

ⓒ제주의소리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라 치부할 수 있을까. 버스정류장 앞에 설치된 가림막이 때로는 누군가의 버스 탑승을 가로막는다. 저상버스가 제 위치에 멈추지 못할 경우 휠체어나 유아차 이용자는 버스 이용이 불가능하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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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과 비장애인 가릴 것 없이 교통약자의 문제는 나와 우리의 문제다. 무심코 이용하던 버스 정류장을 교통약자의 시각에서 살폈더니 개선할 문제가 여기저기서 보인다. 버스가 정류장과 떨어진 채 정차할 경우 바닥과 출구 간 경사가 심해 교통약자들이 경사로를 간신히 내리더라도 혼자서 승차할 수 없게 된다. ⓒ제주의소리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곳을 기준으로 제주시와 서귀포시 저상버스 노선을 살펴보면 제주시는 동쪽 조천읍 함덕리, 서쪽 애월읍 하귀2리(번대), 서귀포시는 동쪽 남원읍 하례리, 서쪽 안덕면 창천리(대평)까지 갈 수 있다. 그 외 지역은 버스로 갈 수 없다.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버스로 오간다는 것은 생각해 볼 수도 없다. 

이 같은 이유로 2019년 제주장애인인권포럼 부설 제주장애인정책모니터링센터의 설문조사에서는 설문 대상자 300명 중 저상버스를 이용하는 장애인 당사자가 10명에 불과하다는 결과가 나타나기도 했다.

버스를 이용할 수 없는 지역을 가기 위해 교통약자들은 이동지원 차량을 이용해야 하는데 이마저도 쉽지 않다. 전화를 걸어 배차받는 방식으로 이뤄져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약속에 늦을까 일찍 교통약자이동지원차량을 부르거나, 늦을 땐 죄송하다는 말을 연신 내뱉어야만 하는 상황에도 놓인다. 급한 일이 생길 경우 가슴 졸이며 기다려야 하는 것은 다반사다. 휠체어를 트렁크에 실어서라도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택시를 잡아봐도 쉽게 잡히지 않는다. 심지어 전동휠체어의 경우 택시 탑승은 불가능하다.

택시를 잡아 어떻게든 목적지로 이동한다 해도 수동휠체어로 보행로를 다니는 것은 만만찮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니 외출은 단단히 마음먹어야 할 수 있는 일이 됐다. 지난 8일 수동휠체어를 타고 제주시내를 돌아다녀 보니 그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길 안내 서비스의 ‘최단거리’ 안내는 있으나 마나 한 기능이었다.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길을 찾기보단 갈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가 본 길이 아니라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몰라 두려웠다.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는 없어졌고, 남아있던 의지는 희미해져 갔다. 

진·출입로 부적절·적절 사례. 사진=(사)제주장애인인권포럼.
지난해 제주장애인인권포럼이 진행한 ‘2020 편의시설 모니터링’ 진·출입로 부적절·적절 사례. 사진=(사)제주장애인인권포럼.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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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행로 끝, 구석진 곳에 잠시 차를 세웠으니 괜찮겠지라는 생각으로 주정차할 경우, 누군가는 피해갈 수 있는 사소한 문제일지 몰라도 다른 누군가는 위험한 길을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교통약자들은 이런 힘든 싸움과 매일 마주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시설 이용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8월 1일부터 9월 10일까지 제주장애인인권포럼이 진행한 ‘2020 편의시설 모니터링’ 결과에 따르면 제주지역 주민센터와 우체국에서 장애인 당사자들이 아무런 문제 없이 편의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곳은 5%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1종근린생활시설인 주민센터와 우체국 총 84곳을 대상으로 진행된 조사에서 기준 각도보다 경사가 높아 휠체어 진입이 어려운 곳도 25%에 달했다. 심지어 항상 비워둬야 할 출입구 주변으로 잡동사니를 쌓아 출입 불가능한 곳도 있었다.

제주장애인인권포럼은 조사 결과에 대해 “휠체어 이용 시민 편의를 보장하는 것은 혜택이나 예외적인 배려가 아닌 기본적 이동권과 접근권을 보장하는 것”이라며 “도민 민원을 처리하는 주요 공공시설에서 편의증진법 기준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고 밝혔다. 

대중교통이나 공공시설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도 모든 사람의 이동권을 보장하는 경우를 보긴 힘들다. 더군다나 이 같은 시설을 특정인을 위한 혜택이라고 생각한다거나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신기하게 쳐다보는 등 교통약자를 향안 인식도 남아있다.

지난 4일 동행 과정에서 이준협 씨는 제주시 중앙로 지하상가를 이용하기 위해 휠체어 리프트에 탑승한 순간 모멸감을 느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내려가는 것을 알리기 위한 음악이 울려 퍼지지는 순간 계단을 오르던 사람들이 한쪽으로 붙어 신기하다는 듯 쳐다봤다는 것이다. 

준협 씨는 마치 동물원 원숭이가 된 듯한 느낌이 들어 다시는 중앙로 지하상가를 찾지 않는단다. 다른 지자체 지하상가에선 흔히 볼 수 있는 승강기가 왜 없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승강기만 있어도 지하상가 접근이 쉬워 많은 사람이 찾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승강기는 지난해 12월 제주시와 상점가 간 상생협약에 따라 오는 6월 설치될 전망이다. 지하상가 위 횡단보도 설치 문제를 해결하면서 승강기, 에스컬레이터 설치도 추진하게 된 것이다. 일부는 교통약자를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승강기와 횡단보도는 편히 지하로 오르내릴 수 있게 돕고 이동 거리를 줄이는 등 모두의 보행권 확보를 돕는 장치다. 누구나 편히 이용할 수 있는 ‘유니버설 디자인’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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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 것에 의지해 길을 걸어가는 어르신. 더 넓은 인도가 있지만 턱이 많은 데다 울퉁불퉁한 곳이 많아 골목길을 통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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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취재기자가 직접 체험해본 휠체어. 제주시 노형동에서 일도2동까지 가는 길은 험난했다. 누군가의 일이 아니라 친구, 가족의 일이고 당장 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길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제주의소리

유니버설 디자인은 성별, 나이, 장애 유무 등 상관없이 누구나 손쉽게 쓸 수 있는 제품이나 환경을 뜻하는 용어로 ‘모든 사람을 위한 디자인’이다. 계단이 없는 저상버스도 해당한다. 어린이나 노약자, 장애인, 임산부 등 모두가 타고 내리기 쉬운 것이다. 

승강기 역시 무릎 관절이 좋지 않은 어르신, 유아차에 탑승한 갓난아이, 휠체어를 타고 있는 장애인, 무거운 짐을 든 일반인 등 모두가 이용할 수 있다. 특별한 장치를 필요로 한다기보단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보편적 환경을 만드는 것이 유니버설 디자인의 목표다. 

지난 10일 서울 지하철에서는 이동권을 보장받기 위한 장애인 당사자들의 사투가 벌어졌다. 엘리베이터를 설치해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시위였다. 이로 인해 지하철은 운행이 지연되면서 차질을 빚었다. 

관련 보도가 나간 뒤 지하철이 늦어지는 것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댓글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 가운데 주목할만한 댓글도 달렸다. “하루 이동권을 침해당한 사람들과 지금까지 이동권을 보장받지 못한 사람들, 당신의 하루는 장애인의 매일이다”라는 것. 

교통약자 동행과 직접 체험을 해보니 비로소 제주 도로의 문제점이 분명하게 보였다. 수십 년간 외쳐온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아니 어쩌면 외면해온 것은 아닌가 싶다. 

누군가를 위한 시설이나 도로가 아닌, 제주를 살아가는 모두를 위한 길은 우리 가까이에 있다. 조금의 관심과 배려, 남이나 지인 등 누군가의 일이 아닌 내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크게 와닿는다. 

마음 편히 다닐 수 있는 보행로, 누구나 탑승할 수 있는 대중교통, 어디든 갈 수 있는 환경 등 모두의 제주도를 만들기 위한 관심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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