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210) 정월 초하룻날도 오줌 허벅 지고 밭으로 내닫는다

* 정월 초호를날 : (음력) 정월 초하룻날, 설날, 정월 대명절 날
* 오줌허벅 : 오줌을 담은 허벅. 허벅은 제주 여인들이 물 귀한 시절에 우물물을 긷고 등에 지어 나르던 배 불룩한 용기
* 졍 : 지어, (등에) 지어서
* 밧더레 : 밭에, 밭으로
* 돋나 : 달린다. 달려간다(走)

1986년 마당에서 곡물을 타작해 곡식 알을 고르고 있는 제주도 사람들. 저녁에 음식을 만들 물을 허벅에 담아 등에 지고 집안으로 오고 있다. 출처=강만보, 제주학연구센터.
1986년 마당에서 곡물을 타작해 곡식 알을 고르고 있는 제주도 사람들. 저녁에 음식을 만들 물을 허벅에 담아 등에 지고 집안으로 오고 있다. 출처=강만보, 제주학연구센터.

이 글을 쓰며, 옛날 어머니 생각에 가슴 아려 숨이 막혀 온다. 아무리 제주 여성들이 근면하다고 하지만, 아마 이 정도인 걸 뭍(육지)의 사람들은 차마 모를 것이다. 

같은 제주도 내에서도 내가 나고 자란 구좌 쪽이 특히 그랬던 것 같다. 초등교사가 돼 조천에서 하숙집 아주머니에게 ‘정월 초호를날도 오줌허벅 졍~’ 얘길 했더니, 어이없다며 웃었다. 구좌는 토지가 척박한데 조천 지경은 비옥했다. 보리 알맹이부터 차이가 났다.

정월 초하룻날은 설날, 민족의 큰 명절날이다. 아침부터 조상 신위께 차례를 지내고 웃어른에게 세배 올리고 모처럼 가족이 한자리에 앉아 덕담을 나눈다. 물론 친족 집을 돌며 차례 지내고 과세하면서 집안의 화목을 도모했다. 모처럼의 명절날이니 곤밥에 갱으로 끓인 고깃국에 산적(散炙)과 해어(海魚)며 갖은 나물무침 등 풍성한 안주에 음복 몇 잔 해 거나하게 취해 흥얼거리기도 했다. 그날 하루는 일에서 떠나 일문권속이 모여 함께 즐기는 명절날이다.

한데 그런 설날에 오줌 허벅을 등에 지고 밭에 간다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 농사로 바쁘다 하나 명절날 하루쯤 쉬면서 해야 하는데…. 

믿어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분명 있었던 일이다. 지어낸 말이 아닌, 있었던 일이므로 ‘정월 초호룻날도 오줌허벅 졍~’ 한 말이 생긴 게 아닌가.’

오줌 허벅은 집식구들 오줌을 받아 낡은 항아리에 담아 썩혔다 밭에 가 밑거름으로 뿌렸던 재래식 비료의 하나다. 설날은 한겨울이니 보리가 퍼렇게 자랄 절기다. 추위에 강한 보리밭에 오줌을 주면 청보리 시절 보리밭이 하늬바람에 넘실거렸다. 그만큼 수확량을 올릴 수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대명절 날, 여인들이 그것도 냄새 풍기는 오줌을 지고 밭에 가 뿌렸다. 나도 어릴 적에 동네 몇 분이 그랬던 분명한 기억을 갖고 있다. 친족 집에서 명절 먹고 돌아오는 길에 오줌 허벅 지고 밭으로 내닫는 어른을 만난 적이 있다. 어린 내 눈에도 참 가혹해 보였다. 설날 하루쯤 쉬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뒷모습이 안쓰러웠다.

우영팟(텃밭)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큼직한 항아리를 땅속 깊이 파묻고 거기다 요강에 받은 오줌을 매일 부었다. 몇 달 썩히면 좋은 비료가 됐던 것인데, 그걸 밭에 뿌리면 보리가 무성했던 것이다.

아무리 보리에 좋다 하나 일손 놓고 쉬는 날, 오줌 허벅 지고 밭으로 오르다니. 우리 선인들은 그만큼 밭농사에 매여 살았다. 조금이라도 부지런하면 쌀 몇 되(升·승)라도 더 거둘 수 있다고 집착하며 살았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설 명절날에 밭에 갔겠는가. 그것도 썩은 오줌 허벅을 등에 지고서….

오늘의 풍요가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다. 옛날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이 하루라도 일 않고는 못 배기던 근면한 삶이 일궈 놓은 결과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 김길웅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자리>, 시집 <텅 빈 부재>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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