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시선] 김헌범 논설위원·제주한라대 교수

소리시선’(視線) 코너는 말 그대로 독립언론 [제주의소리] 입장과 지향점을 녹여낸 칼럼란입니다. 논설위원들이 집필하는 ‘사설(社說)’ 성격의 칼럼으로 매주 수요일 정기적으로 독자들을 찾아 갑니다. 주요 현안에 따라 수요일 외에도 비정기 게재될 수 있습니다. / 편집자 글

ADPi 조사결과 투명한 재검증 과정도 반드시 필요하다 

첫 단추 다시 꿰기

제주 제2공항 문제에 대한 해법이 결국 도민들의 선택으로 넘어갔다. 이렇게 손쉽고 당연한 길을 놔두고 애써 먼 길을 돌고 돌아 결국 여론조사로 귀착된 것이다. 제2공항이 모든 도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대사인 만큼, 여론조사는 오랜 기간 사업추진이 교착상태에 빠진 현 상황에서 가장 유효한 방법이었다. 아무리 급하더라도 첫 단추를 잘못 채웠으면 처음으로 돌아가야 하는 법이다. 위에 있는 단추를 매만지는 것만 고집하는 동안 아까운 재정과 시간을 소모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찬반을 둘러싼 도민들의 첨예한 대립과 갈등만 애써 키운 셈이다. 

지금까지 많은 토론회가 있었지만 찬반 측을 망라한 참석 패널들의 이구동성은 “제2공항 문제가 왜 이렇게까지 꼬여버렸는지 안타깝다”는 것이었다. 이에는 순리(順理)가 아닌 무리(無理)에 집착한 원희룡 지사의 책임이 크다. 도민이 선출한 도정이라면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도민의 마음으로 사안을 봐야 할 터. 그러나 그는 “국책사업”이라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거나, “전문가의 영역”이라며 여론을 수렴하자는 제안을 묵살하는 태도를 보여 왔다. 지난 해 초에 열린 한 TV 토론회에서 원 지사의 강변이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전문가들끼리도 극과 극을 달리는 문제를 여론조사로 결정하자(는 소리인가)? 그거는 환자가 암수술을 해야 될지, (아니면 다른) 뭘 해야 될지를 수술방법을 여론조사로 결정하자는 것과 마찬가지다”

의사가 강도되기

원 지사의 발언이 적절한 비유처럼 보이지만 사안의 본질을 살짝 뒤틀어 판단을 현혹하는 교묘한 기술이 들어간 것에 불과하다. 제2공항 필요성 여부 자체가 현재의 핵심 쟁점이라는 것은 누구보다 원 지사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수술 과정에서 구체적인 상황과 상태에 맞춰 세부적으로 어떤 의술과 장비를 쓸지를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은 물론 전문가인 의사의 영역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의사의 충분한 정보와 설명을 제공받은 환자와 가족으로부터 수술에 대한 동의를 얻고 난 다음의 일이다. 도민의 의사를 배제하는 것은 허락도 없이 환자의 배에 칼을 대려는 것과 같다. 

더욱이 지금은 세부적인 의술의 선택마저 환자 측의 결정에 맡기는 추세다. 평안감사도 싫으면 그만이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당사자의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억지로 강제할 수는 없는 법. 도민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사안에 대해 전문적인 영역이라며 도민들의 의사를 배제하는 것은 풀뿌리 자치시대의 어엿한 민초들을 “선도해야 할 무지한 백성” 쯤으로 여기는 엘리트주의자의 시대착오적 사고방식이다. 한반도의 영원한 심장이며 생명줄인 4대강이 콘크리트 구조물들로 절단되며 오염수로 전락한 것도 “어용 전문가들만의 리그”의 결과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제주 제2공항 문제는 투명한 정보공개와 함께 신중한 검토와 토론을 거쳐 최대한의 도민들이 수긍하는 결정을 도출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가져야 한다. 흐르는 물은 먼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배 가른 거위 넘겨주기

원 지사는 제2공항이 대규모 국가예산이 투입되는 초대형 사업으로서 제주의 미래가 걸린 백년대계(百年大計)라며 원점으로 돌릴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백년”이 정확히 “100년”이 아니라 “먼 앞날”의 다른 표현이라면, 그렇게 중대한 사안을 서둘러 결정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투명한 정보공개와 함께 신중한 검토와 토론을 거쳐 최대한의 도민들이 수긍하는 결정을 도출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가져야 한다. 길게 보면 제2공항 결정 이후 찬반 간 적극적 의견 개진으로 사업추진이 제대로 진척되지 못한 지난 6년은 결코 시간낭비가 아니다. 

그러나 모처럼 들어온 절호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원 지사의 상시적인 발언엔 조급함마저 느끼게 한다. 그는 “제2공항은 제주경제의 활력이 될 것이며... 균형발전도 견인할 것이며... 제주의 경제 지도를 완전히 바꿀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하지만 그가 백년 후까지 도정으로 있는 게 아니라면 정반대의 결과가 나올 경우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제2공항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지, 아니면 황금알 거위를 배를 갈라 후손에게 넘겨주는 것일지는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 도민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백년 앞을 내다보는 전문가는 아니지 않는가. 

고스톱 짜고 치기

특히 제2공항 사업의 본격화를 위해서는 국책사업에 대한 도민들의 뿌리 깊은 불신을 해소하는 것도 선행돼야 한다. 지금 도민들은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는” 심정이다. 강정의 비극은 아직도 도민의 마음속에서 진행형이다. 그때는 해군기지 사업이 강정을 유럽 지중해에서나 볼 수 있는 호화유람선들이 드나드는 아름다운 항구를 만들기나 하는 것처럼 포장한 바 있다. 청사진으로 내걸었던 “미항(美港)”이 거대한 군함들이 정박하는 해군만을 위한 군사기지에 불과한 것임이 사실로 확인된 것은 정부의 약속으로부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선 당장에 드러날 허언도 마다하지 않던 정부다. 촛불 민주주의로 탄생된 현 정부가 적어도 4대강 공사와 강정 해군기지를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던 MB 정권과 다를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국책사업을 실무적으로 주도하는 고위공무원들의 “관료주의”가 여전한데다, 전관예우 등으로 이어지는 건설, 토목 업계와의 끈끈한 유대관계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사업추진에 있어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작용할 소지가 크다. 게다가 도지사마저 아직도 “새마을”식 개발을 국가경제의 최선의 발전 동력으로 여기는 정당 소속이 아닌가.  

웅덩이 채우기

이런 불신은 제2공항 결정이 무녀 출신 비선실세가 청와대의 음지에서 만기친람(萬機親覽)으로 거의 모든 국정을 주무르며 자신의 잇속을 챙겼던 전 정권에 의해 나온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게다가 제2공항 추진과 동시에 나온 공군의 남부탐색구조부대 창설은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격”이다. 세계적 공항설계전문업체인 파리공항공단엔지니어링(ADPi)이 현 제주국제공항의 확충만으로도 급증하는 항공수요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결과를 내놓았음에도, 국토부가 별도의 공항을 짓겠다고 고집하는 또 다른 유력한 이유라는 의심을 떨칠 수 없다. 

ADPi의 조사결과를 국토부가 별다른 검토조차 하지 않고 감췄던 것도 석연치 않다. 원 지사와 국토부는 ADPi 조사가 사소한 규모의 하부 용역에 불과했다고 폄하하지만, 이에 대한 공개적이고 투명한 재검증 과정을 갖자는 반대 측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여론조사에서 설사 찬성의 결과가 나오더라도, 이를 거부한다면 반대 여론은 여전히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다. 강정의 비극은 그렇게 시작됐다. “흐르는 물은 먼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 김헌범 논설위원, 제주한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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