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술사 수작 ‘아일랜드 조르바’

[서울=한형진 기자] ‘자유’는 모든 제약을 뛰어넘을 것 같지만, 현실에서는 제한적이고 상대적으로 해석되기 마련이다. ‘표현의 자유’라는 잣대를 들이대며 일본군위안부, 광주5.18, 제주4.3 등의 역사적 아픔에 대해 왜곡을 일삼는 세력들이나,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내세우며 마스크 착용을 거부하다 못해 불태우는 먼 나라들의 코로나19 대응, 위구르-티베트 지역을 대하는 중국의 태도 등을 봐도 자유가 얼마나 주관적으로 해석돼 쓰이는지 짐작할 수 있다.

지난 6~7일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한 소극장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에서는 연극 작품 하나가 올려졌다. 연극술사 수작이 주최·주관하고 유현 작, 명가윤 연출의 ‘아일랜드 조르바’이다. 

연극 아일랜드 조르바 출연진. 맨 왼쪽 윗부터 시계방향으로 조석준, 이동건, 양승한, 김민규, 홍지인, 김민혜, 신소영. 

외래어를 조합한 제목에서 알겠지만, 이 작품은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1946년작 장편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 연극 내용도 소설의 주인공 격인 ‘알렉시스 조르바’를 등장시켜 그의 말을 대사로 풀어낸다. 동시에, 제주4.3 당시 도민들을 탄압하는데 앞장선 서북청년회 출신 ‘노두박’을 등장시킨다.

그리스인 알렉시스 조르바와 서북청년회 노두박. 작품은 두 존재가 상반된 행동으로 보여주는 자유 의지를 통해 '역사 앞에 진정한 반성'이란 무엇인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

연극 아일랜드 조르바의 시대 배경은 그리스와 제주로 나뉜다.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1910~20년 그리스, 그리고 크게 4.3 봉기 전후와 1980년대를 오가는 제주도. 두 배경은 치열한 무력 투쟁이라는 공통점이 나타나는데, 이런 특징은 조르바와 노두박을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다.

문학과 지성사 그리스인 조르바 번역을 맡은 유재원 한국외국어대학교 그리스학과 명예교수 설명에 따르면, 알렉시스 조르바는 네 번째 크레타 독립 전쟁(1896~1898)과 마케도니아 투쟁(1904~1908)에 참전한 게릴라 군인이다. 크레타 독립 전쟁 때는 터키군을 상대했고, 마케도니아 투쟁는 불가리아인들과 맞섰다. 생사가 오가는 순간 속에서 조르바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눈앞의 적군을 물리치는데 매진했다.   

“한때는 이놈은 터키 놈, 저놈은 불가리아 놈, 또 이놈은 그리스 놈 하고 구분했었죠. 대장, 난 조국을 위해서라면 대장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못된 짓을 저질렀다우. 멱을 따고, 약탈을 하고, 마을을 불태우고, 여자들을 강간하고, 온 가족을 몰살하고…… 왜냐고요? 그건 그들이 불가리아 놈들이고 터키 놈들이었으니까죠.”

- 그리스인 조르바, 393쪽

오직 조국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았던 조르바를 멈춰 세운 것은 본인의 행동이 가져온 결과를 마주한 순간이다.

조르바는 낮에는 성당 신부, 밤에는 그리스인 마을을 습격한 불가리아 남성을 살해한다. 얼마 뒤 장사꾼으로 변장하고 불가리아 마을을 다시 방문하는데, 어린 아이 5명을 마주한다. 알고 보니 그 아이들은 자신의 손으로 해친 남성의 자녀들이었다. 충격을 받은 조르바는 가진 모든 것을 아이들에게 건네준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길에 오른다.

“조국으로부터 벗어나고, 신부들로부터도 벗어나고, 돈으로부터도 벗어나고, 탈탈 먼지를 털었죠. 세월이 흐를수록 난 먼지를 털어냅니다. 그리고 가벼워집니다.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까요? 난 자유로워지고, 사람이 돼 갑니다. …… 불가리아인인가 그리스인인가 하는 게 문젭니까? 이제 내게는 다 똑같아요. 이제는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인가 아닌가만 묻죠.”

- 그리스인 조르바, 393쪽

자신을 속박해온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도망쳐 자유인이 된 조르바. 이제 그를 사로잡는 것은 포도주와 음식, 현악기인 산투리, 그리고 “(남자들에게) 절대 끝나지 않을 주제”인 여자뿐이다. 

이처럼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는 조국·혁명·투쟁 같은 거대한 담론에 휩쓸리다 비로소 자신을 찾은 한 인물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온전히 기억하며 달라진 마음가짐과 행동으로 살아가는 조르바의 모습에서, 인간이 과거에서 극복하는 방법은 외면과 부정이 아니라는 교훈을 소설은 전해준다. 비록 어두운 지난날을 지녔다고 해도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본인을 성찰할 때 고귀한 자유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의미다.

책과 이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소설 속 화자와 달리 “채석장 인부에서 광산의 폭파 기술자, 행상, 옹기장이, 게릴라, 산투리 연주자, 볶은 콩 장수, 대장장이, 밀수꾼” 등 온갖 직업으로 온갖 사람들과 만난 조르바의 경험이야 말로 살아있는 지식이자 진리라는 조언 역시 소설은 말하고 있다.

“나는 늦게까지 잠을 잘 수 없었다. 내 삶은 실패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펀지 하나를 들고서 그동안 읽은 모든 것을, 보고 들은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조르바의 학교에 다시 들어가 위대하고 진정한 알파벳을 배울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전혀 다른 길을 갔을 것이다!”

- 그리스인 조르바, 138쪽

# 연극 '아일랜드 조르바'

아일랜드 조르바는 자유인 조르바의 금언들을 배우의 입을 통해 전달한다. 조르바와 화자가 만나 탄광 사업을 벌이는 동안 나누는 무수한 이야기와 헤어짐까지, 539쪽에 달하는 원작의 핵심만 뽑아 20분 정도로 요약했다.

그렇게 인사말을 전하는 조르바가 암전에 사라지고, 무대는 그리스에서 제주로 옮겨진다. 제주는 현재, 1989년경, 1948년 전후라는 각기 다른 세 시점을 오가면서 ‘노두박’이라는 인물을 쫓아간다. 

낭독극 마냥 대사에 집중한 그리스 시대와 달리 제주 이야기는 더 많은 인물, 몸짓을 이용한 표현 등으로 비교적 복잡한 구성을 보인다. 눈에 띄는 점은 4.3 학살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인물을 통해 역사를 풀어낸다.

4.3 학살 당시 친오빠를 여의고 평생 한(恨)이 맺힌 양순덕(배우 신소영), 마을 사람들의 신임을 얻고 있는 실세 주민 지명수(이동건), 4.3으로 부모를 모두 잃고 고모 가족(양순덕·지명수) 손에서 자란 양지은(홍지인), 현재는 대변 행위 하나도 마음대로 조절 못하는 늙은 몸뚱이지만 4.3 때는 군경과 서북청년회를 등에 업고 활개 치던 고병순(김민규) 등 작품 등장인물마다 과거와 현재가 얽히고설켜 있다.

단순한 학살 재현은 순간적으로 강렬한 인상을 주겠지만, 역사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아일랜드 조르바는 등장인물마다 사연이 하나씩 풀리면서, 4.3이란 역사를 여러 시선에서 바라보게 한다.

이 같은 ‘인물로서 역사에 접근하는’ 구성은 다른 작품에서도 등장한 바 있는데, 최신작 가운데 지난해 7월 남산예술센터에서 선보인 김지나 작·연출의 연극 ‘아카시아와, 아카시아를 삼키는 것’을 꼽아본다. 광주5.18부터 시작해 한국의 근·현대사를 훑는 시대 배경과 피해자의 자녀를 거둔다는 설정은 아일랜드 조르바에서도 나타난다. 다만, 특정 작품을 참고 했다기보다는 사건 자체를 단순 재현하는 방식을 탈피하려는 동시대 연극인들의 고민으로 보는 편이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아일랜드 조르바는 다른 시대에 살았어도 ‘학살자’라는 같은 처지를 경험한 지명수와 고병순, 그리고 조르바를 대비시킨다. 자신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빨갱이’ 누명을 씌워 주민을 죽이고도 반성 없는 고병순, 그리고 표리부동한 태도로 주위 사람들을 기만한 지명수. 두 사람은 과거를 부끄러워하지 않거나 능력껏 숨기며 자유를 가졌지만, 진실 앞에서 언젠가 부서질 껍데기에 불과한 자유였다. 이런 모습은 다른 인생을 택했지만 지난날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은 조르바와 정 반대다. 

“망각하지 않으면서도 자유를 갈망하는 조르바. 자유로워지기 위해 망각을 선택하지만 자유롭지 못한 사람. 같은 상황, 다른 행동을 선택한 두 인물을 바라보며 메토이소노(거룩하게 되기)… 인간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져봅니다.”

- 아일랜드 조르바 명가윤 연출의 글

아일랜드 조르바는 서양 문학과 서북청년회를 접목했고, 4.3의 진상규명 과정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 4.3예술의 또 다른 확장으로 기록될 만 하다. 1978년 ‘4.3을 말하다’를 연재하기 시작한 제주신문과 4.3연구소를 등장시키는데, 중요한 인물을 쫓아가는 흐름 속에 녹여내면서 최대한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게 구성했다.

김민혜, 신소영, 이동건, 홍지인, 김민규, 조석준, 그리고 양승한. 젊은 배우들의 에너지는 다소 이리저리 오가는 진행과 긴 공연 시간에도 작품의 힘이 유지된 이유가 아닐까 싶다. 길게는 70년도 더 지난 배경임에도 인물 묘사가 그리 어색하지 않았고, 제주어 연기 역시 기대 이상이었는데 출연진들의 연기력을 높이 평가한다. 고난이도 동작까지 소화하는 몸짓 연기도 인상에 남는다.

이번 공연은 최종 완성본에 앞선 ‘워크숍’ 성격을 가진만큼 향후 완성도 있는 무대를 기대해본다. 특히 작품의 마지막은 뉘우침, 화해, 단죄, 무반성 등 여러 가지 색깔을 입히고 확장이 가능한 열린 결말이다.

이 같은 흥미로운 접근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 조르바는 마치 가지치기 없이 사방으로 뻗어나간 분재처럼 느껴졌다.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집중력 있게 끌고 가기 위해, 가다듬을 부분은 줄이거나 잘라내면 어떨지 관객 입장에서 지켜봤다.

무엇보다 지금은 그리스인 조르바와 제주라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나열해놓은 정도에 그친다. 원작 소설을 읽고 나서 공연을 본다면 그나마 이해가 쉽지만 모든 관객에게 요구하는 건 무리다. 만약 두 이야기를 함께 다루겠다면 지금보다 더 유기적인 연결이 필요해보인다. 

극본을 쓴 유현은 ‘작가의 변(명)’에서 “두 작품을 함께 발표하고 이후 작품의 융합 및 분리 여부는 관객들의 피드백을 통해 결정하기로 했지만, 약속된 날짜가 다가오면서 (일단) 두 작품을 하나로 녹여내야겠다고 생각이 바뀌었다”고 미리 해명(?)을 밝혔다.

더불어 "부디 이번 워크숍 공연을 통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희망과 가능성을 엿볼 수 있기를 바라며, 더욱 새로운 작품으로 태어나기를 기대한다"고 피력했다.  

# 메토이소노(Metoisono)와 수오지심(羞惡之心)

나아가 연극 아일랜드 조르바는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는 인물 속에서 동·서양의 철학이 일맥상통한다. 

포도가 포도주가 되는 화학적 변화를 뛰어넘어 포도주로 사랑이 싹틔우고 성체까지 되는 메토이소노(거룩하게 되기)는, 잔혹한 폭력의 죄를 지닌 조르바가 진정한 자유인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조르바 만큼 큰 죄를 저지른 서북청년회 출신들도 과거를 돌이킬 수 없다면 적어도 잘못을 부끄러워하며 살아야 마땅하다. 바로 맹자의 '수오지심'이다. "올바름에서 벗어난 것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의(義)를 실현한다는 가르침. 바로 조르바가 걸었던 거룩한 변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두 사람은 끝까지 수오지심을 가지지 못했다.

문제는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서북청년회 뿐만 아니라 광주5.18 당시 범죄자들, 일본군위안부와 독립운동사 등을 뻔뻔하게 왜곡-배설하는 이들은 지명수, 고병순과 다를 바 없다.

4.3 당시 서북청년회를 통해 반성 없는 역사를 꼬집는 연극 아일랜드 조르바는 향후 정식으로 공연될 예정이다. 제주 일정 역시 가능하면 계획한다고 하니 더욱 멋진 무대로 찾아오길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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