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가게, 고치가게] (2) 강만희 정금사 대표...“귀금속 세공은 무궁무진한 예술”

창간17주년을 맞은 [제주의소리]가 오랜 기간 제주 곳곳을 지키며 이어온 공간과 인물을 소개하는 연중 기획 [이어가게, 고치가게]를 2021년 시작합니다. 오래된 점포(老鋪)와 그 속에 숨은 장인(匠人)들이 소개됩니다. 과거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고 미래의 나침반입니다. 제주의 기억을 이어가고 앞으로도 함께 지켜감으로써, 제주의 미래를 같이 가꾸고 조명하자는 취지입니다. 세월만큼 켜켜이 쌓인 이야기는 제주 현대사를 관통하는 타임캡슐과 같습니다. 이들의 기억을 공유하는 일이 제주의 오늘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주춧돌이 됐으면 합니다. [편집자 주]
강만희 정금사 대표. 50년 경력의 귀금속 세공사다. ⓒ제주의소리
강만희(67) 정금사 대표. 금은방 일이 신기했던 열일곱 소년은 어느덧 50년 경력을 가진 최고의 귀금속 세공사가 되었다. 시대가 변하고 흘렀지만 장인은 한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다.  ⓒ제주의소리

1970년대 초 6촌형을 따라 애월 봉성리에서 제주시 칠성로로 나온 열일곱 소년은 어느새 나이 칠십을 바라보는 초로(初老)를 맞았다. 벌써 50년. 금세공 장인으로 외길을 걸어온 그의 삶은 금보다 더 빛나 보인다. 

중산간 농촌 마을 봉성리에서 들과 밭에 둘러싸여 살던 그는 제주 원도심을 첫 마주한 당시에 대해 “관덕정 같은 큰 기와집이나 4층 짜리 건물들이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고 회상한다. 마치 시골 소년이 상경해 서울 도심의 빌딩을 마주했던 기억처럼 당시 칠성로를 중심으로 한 제주 최대 번화가는 그에게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귀금속 세공 작업실에서 본 광경이었다. 불꽃 사이로 물처럼 녹아내린 금을 두드리고 깎았더니 어느새 반지가 탄생했다. “금을 물처럼 녹여서 반지를 만든다는 게 엄청나게 신기했습니다. 목걸이를 만들기 위해 실처럼 뽑아내고, 팔찌를 만든다는 게 신기했어요. 정말 생각도 못했던 거죠” 

세공사로 일하던 6촌형을 따라 시작한 귀금속 세공이 50년 평생의 업이 될 줄은 그 자신도 몰랐다. 1954년생 강만희(67) 정금사 대표의 세공 인생이 시작된 순간이다.

그가 처음 일을 시작한 곳은 칠성통 제일극장 동쪽, 청탑다방 근처에 위치했던 금은방 옥상회. 들뜬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막내 생활은 쉽지 않았다. 긴 노동시간에 잔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어깨 너머로 배우며, 작은 일을 하나하나 하면서 세공사로서의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금과 보석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이 그는 즐거웠다. 이 마음으로 일을 하다 보니 실력이 금세 늘었고, 스카웃 제의도 왔다.

두 번째 일하게 된 곳은 금광사라는 금은방. 좀 더 전문적인 기술을 익히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평생의 배필도 만나 결혼도 했다. ‘내 가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게 이 때쯤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도전을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그는 그만의 조그마한 가게를 열었다. 이름은 ‘정금사’. 38년 전 일이다.

하루에 13~14시간을 일요일도 없이 열심히 일하다보니 더 넓은 점포로 옮겨갈 여유도 생겼다. 노하우를 전하고 싶은 마음에 세공 기술자도 고용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즈음이 이 곳의 전성기였다.

과거 정금사의 모습. ⓒ제주의소리
과거 정금사의 모습. ⓒ제주의소리

칠성로와 함께한 50년

“옛날엔 결혼예물로 쌍반지를 선호했어요. 그 이후에는 알반지라고 해서 보석이 있는 반지를 선호했어요. 보석도 여러가지로 시대에 따라 바뀝니다. 처음에는 합성석을 많이 했다가, 그 이후에는 천연보석으로, 다이아몬드로 바뀝니다.”

이 곳에서 마주친 사람, 경험한 일 하나하나가 그의 머리 속에 남아있다. 처음 가게를 마련하고 열심히 돈을 모아 전셋집을 마련한 것이 가장 행복한 기억 중 하나라고 한다.

“금은방에는 좋은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어요. 명절을 앞두고 갑자기 금을 판매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어요. 명절 때 먹을거리를 해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 어려워서 온 거죠. 보기에 정말 안타까웠어요. 은행에도 돈이 없으니 반지라도 파는 겁니다.”

그는 두 번 가게 터를 옮겼지만 칠성로를 떠난 적이 없다. 원도심의 쇠퇴도 누구보다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이런 흐름을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한다”면서도 “관광객들이 연계해 이 곳을 찾아올 수 있는 거리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IMF 때 말도 안되게 힘들었어요. 다들 금을 팔려고만 하지 사려고는 안했으니까요. 어떻게 어떻게 하다보니 그 때를 버텼어요. 사실 지금도 어려워요. 금은방 한다고 하면 남들은 풍족한 줄 아는데 천만의 말씀이에요. 금은방은 계속 물건에 투자를 해야하는 특성이 있어요. 돈 벌면 들어가야 하는 곳이 많아요. 남는 게 많지 않아요.”

젊은 시절 강만희 대표의 모습. ⓒ제주의소리
젊은 시절 강만희 대표의 모습. ⓒ제주의소리

시대가 변해도 장인은 살아있다

그가 작업실로 안내했다. 금덩이 하나를 꺼내더니 순식간에 작업대 위에서 녹이기 시작했다. 깎고 광을 내기까지의 손놀림은 아주 신속하고 섬세했다. 길지 않은 시간에 9돈짜리 반지가 눈 앞에 나타났다.

이번엔 금목걸이를 실제 제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구멍이 숭숭 뚫린 작업대는 발을 딛고 올라간 뒤 허리를 숙인 뒤, 녹여 유연해진 금을 재빨리 빠져나오게 하는 방식이었다. 엿가락처럼 금이 늘어지면, 다시 더 작은 구멍 사이로 통과시키는 일을 반복했다. 그는 이 과정을 ‘실로 뽑아낸다’고 표현한다.

50년 장인은 고온의 금속을 제 몸처럼 자유자재로 다뤘다. 

사실 개인 세공사들이 운영하는 금은방은 사양산업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대량으로, 최신 기계를 통한 디자인을 세공사들이 하나하나 만들어내도 경쟁이 쉽지 않다.

그는 귀금속 세공을 ‘무궁무진한 예술’이라고 설명한다. 머리속에서 생각하는 것을 섬세함으로 구현해낸 작품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이 시간이 갈수록 무궁무진한 예술에만 몰두하기는 어려워지고 있다.

강만희 정금사 대표가 작업실에서 금반지를 만들고 있다. ⓒ제주의소리
강만희 정금사 대표가 작업실에서 금반지를 만들고 있다. ⓒ제주의소리
강만희 정금사 대표가 작업실에서 금반지를 만들고 있다. ⓒ제주의소리
강만희 정금사 대표가 작업실에서 금반지를 만들고 있다. ⓒ제주의소리

“시대가 많이 변했어요. 주물을 대량으로 하는 공장이 육지에는 있지요. 옛날엔 손으로 녹이고 때려서 만들었는데 요새는 그런 디자인 수요가 많지 않아요. 자부심은 있지만, 제가 디자인도 하고 공장을 하든지 하면 더 할 수도 있는데.... 초로 틀을 만들고 쉽게 부어서 모양을 만드는데 우리는 그런 시스템은 없어요. 이젠 옛날처럼 일일이 손으로 만드는 게 아니에요”

일흔을 눈 앞에 두고 있는 그에게 언제까지 이 곳을 운영할 것이냐고 물었더니 ‘손님 한 명이라도 있다면 계속 하겠다’고 답했다. 그런 그에게 소망을 물었다. 귀금속 세공 장인다운 대답이 돌아왔다. 

“사실 저는 가게 장사 안하면 그렇게 하고 싶어요. 작업도구들을 차에 실어서 가져가서 어디 학교에서라도 이런 걸 어떻게 만드는 지 한 번 보여주고 싶어요. 아이들도 ‘아, 이런 것도 있었구나’하고 호기심을 가질 거 아닌가요? 공감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에요. 아이들도 신기해하지 않을까요?”

38년 전 정금사의 시작과 함께한 작업 도구들. 곳곳에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제주의소리
38년 전 정금사의 시작과 함께한 작업 도구들. 곳곳에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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