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선의 마을 책방을 찾아書] (17) 시옷서점

마을책방은 단순한 기호품을 파는 곳이 아닙니다. 대형서점처럼 책을 어마어마하게 팔아치우는 곳은 더욱 아닙니다. 후미진 도심 골목이나 시골 언저리에서 마을책방을 만난다면 그것은 행운이지요. 마을 초입 팽나무 아래 마을사람들이 모여들듯 책벌레들이 도란도란 어우러질 수 있는 사랑방 같은 곳입니다. 제주도 마을 곳곳에 작은 책방들이 사람을 살리고, 다시 사람이 마을을 살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마을책방의 가치입니다. [제주의소리] 시민기자 고봉선 시인이 바람을 쐬듯 책방마실을 다니고 있습니다. 책과 사람이 만나는 곳 ‘마을 책방’에서 책방지기의 책 살림 이야기를 시인을 통해 듣습니다. [편집자 글] 

 

지구를 턴테이블에 올려놓는다
지구는 자전을 하고
아득한 우주로 음악이 퍼진다 

외삼촌이 내게 준 지구 레코드 이제는 지구가 된 외삼촌 나는 지구 레코드를 듣는다 기억은 지구의 위성이다 깊은 밤, 다리  
밑으로 떨어진 외삼촌 나의 지구는 오토바이 헛바퀴에서 자전을 하고 있었다 음악은 45RPM에서 33RPM으로 서서히 시들어갔다 병원에서 마지막 자전을 한 외삼촌 나는 지구 레코드를 쓴다 

지구를 턴테이블에 올려놓는다
지구는 자전을 하고
아득한 우주로 음악이 퍼진다

- 현택훈, 지구 레코드 전문

오후 일곱 시, 이미 캄캄한 밤이다. 그래도 내 마음은 환한 대낮이다. 익히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얼굴은 모르던, 시옷서점 책방지기인 현택훈 시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유쾌했다. 내가 만난 시인은 그야말로 순댕이(순둥이)를 떠올리게 하는 영락없는 오래비였다. 시옷서점의 책방지기 현택훈·김신숙 씨는 현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시인 부부다. 다만 서점을 같이 운영하는 김신숙 시인을 만날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사진=고봉선.
서호동 막동산의 시옷서점 입구. 사진=시옷서점

“잘근잘근 씹으며 책을 읽었던 시인”

고교 시절, 내성적이었던 학생을 선생님은 문예부로 이끌었다. 선생님이 시를 쓰는 분은 아니셨다. 하지만 그날의 결정은 한 학생을 시인으로 만들었다. 문예부에 가입하면서 시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비록 늦깎이지만 이를 계기로 대학도 문예창작학과로 갔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현택훈 씨는 시를 쓰게 되었다.

어린 시절, 시인이 혼자서 조용히 할 수 있는 것은 책 읽기였다. 어린 시인은 잘근잘근 음식을 씹듯 천천히 소화 시키며 책을 읽었다. 남의 집에 가면 무슨 책이 있는지 궁금해서 살펴보기도 하고, 책을 읽는 동안은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읽다가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은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했으며 다시 앞으로 되돌아가기도 했다. 이처럼 시인은 일찌감치 제대로 된 책 읽기 방식을 밟아왔다.

번갯불에 콩을 볶으면 겉은 타고 속은 익지 않는다. 책도 마찬가지다. 간혹 유창성이 확보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속독하는 아이들을 볼 수 있다. 이는 질에 있어서 정독을 따를 수 없다. 생각할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다독 또한 마찬가지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도 생각 없이 읽으면 소용없다. 중요한 건 정독이다. 정독하면서도 시인은 여러 번 읽는 걸 좋아했다. 이처럼 시인은 어릴 때부터 책의 맛을 음미하며 읽었다. 

사진=고봉선.
서점 내부엔 제주 시인의 시집뿐만 아니라 제주 관련 책을 비치하고 있다. 시인의 제주 사랑이 돋보였다. 사진=시옷서점

“시집 전문서점 시옷서점의 탄생”

아라동 인다마을에서 시작하고 이제 4년, 서귀포로 이사한 지도 1년이다. 아라동은 주택가였지만 이곳은 약간 외진 곳이다. 그래서 그런지 은근히 혼자 여행 다니는 분들이 많다. 코로나19 영향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손님은 이곳이 더 많다. 따지고 보면 동네 책방은 ‘지역주민보다는 관광객이 있어야 산다.’라는 뜻이기도 하다.

어느 날 현택훈·김신숙 부부는 서점을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서점 이름은 뭐라고 지을까. 현택훈 시인은 ‘제비꽃 서점’을 내놓았다. 작으면서 또한 낮은 곳에 있어 눈에 잘 띄지 않는 제비꽃이 소외당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부인 김신숙 시인은 ‘시옷서점’을 내놓았다. 시집 전문서점이라는 걸 바로 알릴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시는 여러 뜻을 내포하고 상징하며 은유한다. 게다가 ‘시옷’이라고 하면 뒤가 열려 있다. 예를 들면 ‘시옷이 뭐지? 세상? 사랑? 세월인가?’ 등 상상을 유도하는 요소가 많다. 시옷 자체가 시의 특징이 되었다. 거듭 생각해 보니 시옷은 ‘시의 옷’이 되기도 했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티셔츠에다가 시 문장을 새겨서 전시회를 열기도 하고 판매도 했다. 

사진=고봉선.
시에 옷을 입힌? 옷에 시를 입힌? 아무튼 시옷이다. 시옷서점이란 타이틀에 어울리게 실제 티셔츠에 시를 새기고 전시하면서 판매도 했다. 사진=시옷서점

작년까지만 해도 책방은 일주일에 세 번 열었다. 그러나 새해가 되면서 잠시 평일은 저녁에만 열기로 했다. 이도 사전에 문자로 연락을 받았을 경우다. 서점만으로는 먹고살 수 없기 때문이다. 

먹고살 수 없는 일, 서점을 포기하면 그만이 아닌가. 그러나 이들 부부는 미치도록 책이 좋다. 책을 놓을 수가 없다. 책을 매개로 한 사람들과 만남도 좋다. 책에서 만나는 좋은 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고도 싶다.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한다. 다른 일을 해야만 하는 이유다. 

시인은 왜 하필 잘 팔리지도 않는 시집 전문서점을 하게 되었을까. 2012년에 등단한 부인 김신숙 씨나 현택훈 씨 부부는 모두 시를 쓴다. 하지만 집에서는 시가 잘 써지지 않았다. 

부부는 제주도 동네 서점의 출발이나 다름없는 탑동 “라이킷 서점”과 종달리 “소심한 책방”을 즐겨 찾았다. 서점에서 차를 마시며 글을 쓰는 건 너무 좋았다. 본인들한테도 이런 공간이 있으면 싶었다. 고민 끝에 부부는 서점을 하기로 했다. 

서점을 하기 전, 시인은 서울에 있는 책방 몇 군데를 갔었다. 마침 시집 전문서점이 있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누구나 다 아는 시인이거나, 대형출판사에서 나온 시집만 있었다. 시인은 지방이나 수도권이라 해도 알려지지 않은 시인의 시집을 팔고 싶었다. 거기서 보석을 캘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도내 큰 서점에도 시집은 별로 없었다. 이런 사실이 안타까웠던 부부는 ‘다른 서점과 차별화해서 시집 전문으로 해 보자’라고 의견을 모았다.  

부부는 도내 시인들의 시집만은 서점에 꼭 비치하기로 했다. 의도대로 서점엔 제주 시인들의 시집이 진열된 코너와 제주 시인이 쓴 산문집, 그 외 제주 문인들의 책들이 진열된 코너도 마련했다. 서가에 꽂힌 책들을 보니 제주도에 문인이 많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시인은 “라움”이라는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서귀포로 옮긴 뒤 막동산 문학회도 만들었다. 서점이라는 공간을 활용할 수 있어서 더없이 좋았다.

사진=고봉선.
서점 내부. 이곳에선 문학 관련 모임을 하기도 한다. 사진=시옷서점

시집 전문서점인 만큼 아무래도 손님들은 시집을 많이 찾을 것이다. 그런데 아니다. 시집이 인기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손님들은 시집을 찾지 않았다. 그저 작은 서점 자체가 궁금해서 찾아올 뿐이었다. 한술 더 떠서 실수로 주문한 책들, 즉 철학책이나 다른 책들이 의외로 팔렸다. 왜일까.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시는 소설과 달리 낯선 이미지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새롭게 표현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기존에 없던 표현을 쓰자니 난해해질 수밖에 없다. 이게 시를 찾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시인은 말했다.

처음엔 야심 차게 이달의 시집을 선정하기도 했다. 시집은 베스트셀러로 선정되기 힘들다. 시인은 이곳에서만이라도 시집 베스트셀러를 선정하고 싶었다. 그래서 고작 두세 권이 팔릴지라도 순위를 매겼다. 여기에 다시 매달 철학자도 선정했다. 시에는 철학이 들어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인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손님들은 철학책만 찾았다. 

7080시대 아니 그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우리 곁엔 늘 시집이 있었다. 다이어리를 들고 다니며 시를 옮겨 적었고 암송했다. 어느 집이나 시집 몇 권쯤은 당연한 것처럼 있었다. 선물도 시집이 으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문화가 사라졌다. 시인은 안타까울 뿐이다.

“도서관을 이용하는 사람들”

책방지기인 현택훈 시인은 서귀포시 ‘폭낭 작은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고 있다. 시인이 근무하는 작은 도서관엔 하루 약 20명의 사람이 드나든다. 물론 코로나19 유행 전이다.

도서관에 드나드는 계층은 다양하다. 부모가 아이들 손을 잡고 오는 경우 대부분 자녀가 미취학이거나 저학년이다. 한두 살 된 아기를 안고 오는 엄마도 있다. 아기에게 책을 읽어주기 위함이다. 아이 혼자 오는 경우는 고학년이거나 중학생들이다. 혼자 오는 어른들도 있다.

자녀에게 책 읽어주는 모습을 볼 때 시인은 저도 모르게 엄마의 마음이 되어 아이를 향한다. 엄마들은 아이에게 소곤소곤 속삭이듯이 책을 읽어준다. 주변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다. 이때 아이는 암암리에 전달되는 엄마의 표정, 제스처 등에서 배려는 물론 경청의 힘을 키운다. 엄마가 읽어주는 책은 아이에게 상상력의 원천이다.

수업할 때 아이들 목소리가 작으면 내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커진다. 아이들이 귀를 기울이도록 해야 하는데, 오히려 난 아이들 귀에 소리를 집어넣으려고 애쓰고 있음을 발견한다. 귀에 넣어야 할 건 소리가 아니라 호기심을 향한 자극이다. 엄마가 소곤소곤 책을 읽어줄 때 아이는 호기심을 향한 자극, 즉 몰입과 경청의 힘을 서귀포 작은 도서관에서 키운다.

사진=고봉선.
시점 내부. 시집 전문서점이란 이미지에 맞게 시집과 시인의 산문집을 주로 판매한다. 사진=시옷서점

“책은 어디서 나오나요?”

도서관에 드나드는 아이 중 8~9세 정도의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에겐 글자를 모르는 쌍둥이 여동생이 두 명 있었다. 이 쌍둥이 동생들은 언니가 책을 읽을 때면 그 옆에 앉는다. 그리고는 책장을 넘긴다. 누가 봐도 글을 읽는 아인 줄 알겠다. 그런 모습을 볼 때 시인의 얼굴에 흐뭇함이 번지면서 가슴이 따뜻해진다. 쌍둥이 동생들은 언니를 보고 행동을 배웠다.

도서관 단골 중 초등학교 2학년 정도의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책을 보다가 궁금한 게 있다는 듯 시인에게로 왔다. 그리고는 “이 책들은 다 어디서 오나요? 혹시 저 안에서 나오나요?”라면서 시인이 앉아 있는 뒤쪽 사무실을 가리켰다. 아이의 부모님은 빵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아이의 부모는 매일 주방에서 빵을 만들어 굽고, 매장에 내놓아서 판매한다. 노상 그런 모습을 봐왔던 아이는 책 역시 빵처럼 주방에서 만들고 밖으로 내놓는 건가 생각한 모양이다.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궁금증인가. 아이의 궁금증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저 먼 곳이라고 할까, 아주 가까운 곳이라고 할까. 참으로 아이다운 기발한 발상이다. 

책방지기인 현택훈 시인도 출판사를 낸 상태다. 그러므로 아이가 이야기한 것처럼 직접 출판하고 팔 수 있다면 주방에서 빵을 굽고 매장에 내놓아서 파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게 아닐까. 아이의 궁금증이 참 신선하다. 그러던 아이가 한동안 도서관 출입이 뜸했다. 다시 왔을 때, 아이는 학원에 가야 해서 시간이 없다고 했다. 

“잊지 못할 손님”

아라동에 있을 때 드나들던 큰손 손님을 시인은 잊지 못한다.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어떤 손님인지 알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한 달에 한 번 정도 오는 그 손님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많은 책을 샀다. “이렇게 가끔 와서 왜 키다리아저씨처럼 많은 책을 사주시나요?” 하고 시인이 여쭤보았다. 여기서 시인의 표현이 이상했다. 손님이 책을 사는 게 아니라 사주신다고 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일부러 사주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50대 초반쯤 되는 그 손님은 20대 초반에 자주 갔던 서점이 있었다. 그런데 그 서점이 문을 닫았다. 경영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손님은 그 사실이 못내 안타까웠다. 그런 찰나에 시옷서점을 만났다. ‘모처럼 생긴 서점이 사라지면 어쩌나.’ 손님은 염려되었다. 그래서 많은 책을 사는 것이었다. 물론 읽기 위해 사겠지만 시인의 느낌대로 사준다는 표현도 틀린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이런 손님이 계시는 한 아무리 어려워도 책방은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날 서울에서 온 세 명의 대학생도 있었다. 영화를 찍고 싶어서 대학에 들어갔다는 그 친구들은 영화가 무엇인지, 어떤 영화를 촬영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아 나섰다고 했다. 제주로 와서 다큐멘터리를 찍는다던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당장 잘 곳도 없었다. 전날은 야외에서 텐트 치고 잤다고 했다. 이 사실이 안타까웠던 시인은 차라리 서점에서 자라고 말했다. 가구들을 밀어내고 공간을 확보하면 야외보다는 낫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들은 시인의 마음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하룻밤을 넘기고 1년 뒤 그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인연의 끈은 질겼다. 그들은 꾸준히 연락하고, 제주도에 올 때마다 시인을 찾아왔다. 

사진=고봉선.
서점 옆 해바라기 벽화. 이 벽화는 시옷서점을 사랑해서 요일을 나눠 책방을 대신 봐주는 돌킹이 세 분과 자녀들이 함께 그렸다. 사진 속 아이들은 돌킹이 자녀들과 그 친구들이다. 사진=시옷서점

“지구 레코드와 막내 외삼촌”

2007년 ‘시와 정신’으로 등단한 현택훈 시인은 2009년에 첫 시집 “지구 레코드”를 냈다. 제목에서 보다시피 그가 시를 쓰게 된 건 음악의 영향이 컸다. 음악을 좋아했던 막내 외삼촌(이하 외삼촌으로 칭함)은 어린 시인에게 음악, 별자리, 책, 옛날이야기 등을 많이 들려주셨다. 그렇게 어린 시인의 가슴으로 외삼촌은 젖어 들었다. 그런데 그만 외삼촌께서 돌아가셨다. 오토바이 사고였다. 

외삼촌 방에서 음반을 만지던 시인의 눈에 지구레코드라는 로고가 들어왔다. 젖은 가슴을 풀어헤치며 레코드판을 만지던 시인은 ‘어찌 보면 사람이 죽는다는 건 지구에서 사라지는 것과 같을 텐데…… 과연 죽음이 무엇일까?’ 하는 고민이 생겼다. 이 고민은 이후 시로 연결되었다. 외삼촌을 잊지 못했던 시인은 첫 시집 제목을 꼭 ‘지구 레코드’로 하고 싶었다.

어찌 보면 레코드판 돌아가는 게 세상사다. 레코드판이 돌아가면서 흘러나오는 노래 속에 우리 삶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세상사 따라서 시가 흐르고, 시는 레코드판으로 들어가 음악이 되어 흐른다. 다시 말하면 음악이 시고, 시가 곧 음악이다. 삶은 시가 되고 시는 음악이 되고 다시 레코드판을 따라 흐른다. 지금은 아픔도 많이 희석되었겠지만, 문득 외삼촌이 떠오르는 날이면 그리움은 어느새 눈물이 되어 레코드판을 따라 돈다.

사진=고봉선.
지금까지 현택훈 시인은 산문집 “기억에서 들리는 소리는 녹슬지 않는다(한그루)”와 “제주어 마음사전(걷는사람)” 두 권의 산문집을 냈고, “지구레코드(다층)”,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걷는사람)”, “남방큰돌고래(한국문연)” 세 권의 시집을 냈다. 부인 김신숙 시인은 동시집 “열두 살 해녀(한그루)”, 시집 “우리는 한쪽 밤에서 잠을 자고(한그루)” 두 권을 출판했다. 사진=시옷서점

시인의 첫 번째 산문집 “기억에서 들리는 소리는 녹슬지 않는다” 역시 음악의 느낌을 산문으로 쓴 책이다. 이 책은 사실 외삼촌에게 바치는 책이다. 

아라동에 있을 때다. 어느 날 손님 한 분이 오셨다. 책을 둘러보던 손님은 책방지기에게 “혹시 시도 쓰느냐?”라고 물었다. 시인은 자신의 산문집을 보여드렸다. 산문집을 받아본 손님은 책장을 넘기더니 ‘홍기찬?’이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책장 맨 앞에는 ‘막내 외삼촌 홍기찬에게 바칩니다’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알고 봤더니 그 손님은 외삼촌과 대학교 동창이었다. 게다가 고향도 시인과 같은 화북2동 거로마을이었다. 그분도 당연히 친구(외삼촌)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한림읍 상명리에 살던 외삼촌은 제주교육대학교에 다니면서 시인의 집, 즉 누나의 집에서 자취했다. 그때 시인은 초등학생이었다. 

집에는 외삼촌 친구들이 종종 놀러 왔었다. 신기하게도 손님은 그때 놀러 오던 친구 중 한 분이셨다. “맞아! 너희 집에 가면 전축에다 레코드판도 있어서 우리가 춤추러 많이 갔었지. 그때 참 즐겨 놀았었는데…….”라며 손님은 말끝을 흐렸다. 세상이라는 게 참, 내 몸에서 털끝이 오소소 일어서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분은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다. 외삼촌도 살아 계셨다면 초등학교 선생님이실 텐데……, 시인의 기분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이 묘했다.

외삼촌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어린 시인은 어머니와 함께 장례식장으로 갔다. 그런데 영정사진 옆엔 웬 낯선 여자 사진이 놓여 있었다. 어리벙벙하기도 했고 놀라기도 했다. 외삼촌은 결혼도 안 했고, 또 사고 때 같이 사망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 그건 영혼결혼식이었다. 어머니께선 그즈음 죽은 여자를 수소문해서 두 집안 귀신끼리 결혼하는 거라고 알려주셨다. 요단강을 건너는 길이 외롭지 말라는 의미였을까. 아니면 저세상에서 외롭지 말라는 의미였을까. 외삼촌은 장례식과 함께 영혼결혼식을 치렀다. 

사진=고봉선.
작가 초청 북 토크 후 서점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아랫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김신숙 시인이다. 현택훈 시인은 사진을 찍었다. 사진=시옷서점

“아, 어머니”

음악, 영화, 여행 등 이 모든 게 책의 역할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경험을 다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책에서는 무궁무진한 경험이 가능하다. 성 역할은 물론 신분이며 국적도 바꿀 수 있다. 그뿐인가, 악한도 될 수 있고 동식물도 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지 못하고 돈의 노예로 사는 경우가 많다. 돈의 노예로 사는 것보다 책은 훨씬 많은 정신적 여유를 안겨준다.

시인의 어머니는 중학교 중퇴다. 남동생, 즉 시인의 외삼촌은 대학에 보냈다. 하지만 어머니는 집안이 어려워지자 여자라는 이유로 중학교마저 중퇴해야 했다. 어머니는 그 사실을 평생 서운해하셨다.

초등학교 때 시인은 어머니가 정리한 가계부를 본 적이 있었다. 물론 제대로 쓴 가계부는 아니었다. 그런데 거기엔 항상 어떤 메모가 있었다. 

시인이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님이 돌아가셨다. 외삼촌이 돌아가시고 2년 후였다. 당연히 외삼촌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탓이다. 연탄가스 중독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1년 전, 학교 숙제로 독후감 쓰기가 있었다. 그런데 집엔 읽고 싶은 책이 없었다. 어린 시인은 어머니께 책을 사달라고 했다. 어머니께선 흔쾌히 알았다고 하시더니 시내 갔다가 책을 사고 오셨다. 이원수 동시집이었다. 어린 시인은 ‘동시집으로 어떻게 독후감을 쓰라는 거지?’ 하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숙제는 해야 했다. 어떻게 독후감을 써야 할지 난처해하는 시인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여 괜히 웃음도 터졌다.

스무 살이 넘어서 시를 쓰던 시인은 문득 그때가 생각났다. ‘그때 어머니는 왜 하필 시집을 사 오셨을까? 혹시 어머니가 가계부에 썼던 그 메모들이 시는 아니었을까? 어쩌면 어머니도 시를 쓰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자 시인은 어머니 몫까지 더 열심히 시를 쓰게 되었다. 

사진=고봉선.
시옷서점 앞. 시인은 가끔 책들을 밖에 진열한다. 이때 책들은 해바라기를 한다. 사진=시옷서점

“승부수를 걸지 않는다”

시인 부부는 평일엔 일상으로 나가고 휴일엔 서점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며 글을 쓴다. 서점이 부부에겐 원동력이다. 아쉬운 건 야심을 갖고 시작한 책방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탑동의 ‘라이킷’도 말은 잠시 접는다고 했지만 사실 비싼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어서였다.

서점을 하겠다고 하자 주위에서 말렸다. 하더라도 책맥을 하라고 했다. 책맥이란 책과 맥주를 같이 취급하는 건데 실제로 제주도에 책맥살롱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시인은 시집 전문서점을 고집했다. 그랬더니 오광석 시인이 시세의 1/3로 빈 점포를 내주셨다. 그렇게 시집 전문서점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일을 즐기는 게 우선인 현택훈·김신숙 부부를 이해한 사람이 오광석 시인이었다. 그건 아마 오광석 시인도 시를 쓰는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코로나19도 한몫했지만, 한때는 서점을 접을까도 생각했었다. 그러면서도 해 보겠다고 블라인드북 등 여러 아이템을 도입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오로지 시집만 파는,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유지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책방에 승부수를 걸지 않는다.”라고 정한 영업 방침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난 그저 동네 책방이 우뚝 설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빌 뿐이었다. 

“영화 ‘시인의 사랑’”

영화 “시인의 사랑”에서 주인공의 모델은 현택훈 시인이다. 그때 제주에 이주하여 살던 김양희 감독은 생계를 위해서 영화교육프로그램 강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만든 단편영화 시사회에 참여했던 현택훈·김신숙 씨 부부는 뒤풀이에 함께하게 되었다. 인연이었을까, 마침 현택훈 시인은 김양희 감독의 맞은편에 앉게 되었다. 시인은 감독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방에 있던 두 번째 시집 “남방큰돌고래”를 건넸다. 

그 후 단편영화에 조연출로 참여했던 김신숙 시인과 김양희 감독은 자주 만나게 되었다. 친해지면서 인생사가 오갔다. 김신숙 시인은 자연스레 현택훈 시인과의 여러 가지 에피소드도 이야기하게 되었다. 

몇 달 후, 김양희 감독은 시나리오를 하나 썼다면서 셋이 보자고 했다. 얘길 들어보니 현택훈 시인을 모티프로 해서 ”시인의 사랑”이라는 영화를 찍고 싶다는 것이다. 당연히 단편인 줄 알았다. 게다가 독립영화라서 허락했다. 상영될 줄도 몰랐다. 비록 영화는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가치는 인정받았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이며 주목도 받았고, 제42회 토론토국제영화제에도 초청받았다. 

얼떨결에 승낙은 했지만, 자신을 모티프로 해서 영화를 찍고 싶다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지역의 무명시인에 불과하고, 보편적으로 영화는 인물이 작고한 다음에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어차피 상업 영화도 아니고 돈 없이 만드는 영화다. 그래서 자신의 시도 저작권 없이 허락했다. 그렇게 영화 “시인의 사랑”은 만들어졌다. 주인공 현택기가 영화 “시인의 사랑”에서 읊는 시 중에는 현택훈 시인의 ”남방큰돌고래“에 수록된 시와 기형도의 시, 그리고 김소연의 시와 감독이 직접 쓴 시도 있다. 

김양희 감독은 외모는 뚱뚱해도 감성적인 시를 쓰는, 어찌 보면 어울리지 않는 그런 느낌의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감독은 뚱뚱한 연극배우를 캐스팅하려고 했다. 그런데 제작사 측에서 반대했다. 뚱뚱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양익준 배우가 캐스팅됐다. 

시인은 양익준 배우와 딱 한 번 만나서 차를 마셨다. 그런데 놀라웠다. 배우는 시인의 행동이나 분위기를 정말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잘 보여주었다. 감탄할 연기였다. 시인은 자신을 모티프로 한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자체가 영광일 뿐이었다. 

결혼 9년 차의 부부. 영화가 촬영될 당시 김신숙 시인은 서귀포에서 편의점을 하고 있었다. 영화에서는 편의점이 아닌 다른 가게로 나오지만, 김신숙 시인은 생활력이 강한 사람이다. 시인도 실제로 초등학교 방과후만 유일하게 하고 있었다. 이처럼 영화 “시인의 사랑”은 캐릭터나 에피소드 모두 실제 있었던 상황을 배경으로 깔았다. 

사진=고봉선.
건물주가 키우는 다육식물이다. 쉬운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키우기 힘든 게 다육식물이다. 얼마나 잘 키웠는지, 건물주의 정성이 다육식물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다육식물에 쏟는 마음처럼 건물주는 책방지기 부부한테도 마음 써 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책방을 나서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사진=시옷서점

시인은 문학 동호회에서 김세홍 시인의 소개로 김신숙 시인과 만나 1년여 교제 끝에 결혼했다. 시인 부부라서 서로의 주장이나 고집도 있겠지만 소통되는 것도 많다. 시를 쓰면 부부는 서로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고 의견을 듣는다. 부디 이 부부의 사랑이 위대한 작품으로 승화되기를 빈다.

“시옷서점은”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가을이 아니어도 사색을 즐길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주말엔 그 사색을 찾아 시인 부부가 운영하는 서귀포 시옷서점으로 훌쩍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내가 시에 옷을 입히고, 나는 시옷을 입어보는 기회도 마련할 수 있습니다. 

찾아가는 길: 서귀포시 막동산로 19 
블로그: https://blog.naver.com/bookshsa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siotbooks
영업시간: 월, 화, 목(오전 10시~오후 1시), 일요일(오후 1시~오후 6시)

# 고봉선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나 식물과 함께 자랐다. 지금은 허름한 고향 시골집에서 꽃과 함께, 독서지도사를 하며 아이들과 지내고 있다. 한국해양아동문화연구소 운영위원, 애월문학회 회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독립언론 [제주의소리]에서 [고봉선의 마을 책방을 찾아書]를 통해 격주로 독자들을 만난다. 마을 책방에 깃든 사람과 책 이야기가 소개된다.저서로는 시집 ‘詩를 먹고 자라는 식물원’, 꽃과 함께 사는 이야기 ‘詩가 사는 기행식물원1, 2, 3, 4’, 동화집 ‘지우개’가 있다. 식물원 시리즈로 전자도서관에 식물원을 꾸미는 게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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