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호의 짧은 글, 긴 생각] 스물 두 번째

시간이 지날수록 제주다움의 가치는 더욱 빛난다. 제주출신의 공학자, 이문호 전북대학교 초빙교수가 '제주의소리' 독자들과 만난다. 제주다움과 고향에 대한 깊은 성찰까지 필자의 제언을 ‘짧은 글, 긴 생각’ 코너를 통해 만나본다. / 편집자 주

제주4.3특별법 개정안이 2월 26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그 장면을 보니 문상길 중위와 소개령이 떠오른다.

"제주도 폭동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선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주장하며 ‘초토화 작전’을 밀어붙였던 학살 주동자 박진경(1920-1948) 연대장을 암살한 문상길 중위(1925-1948, 경상북도 안동). 다음은 1948년 7월 12일 서울로 압송돼 법정에 선 문상길 중위의 최후 진술이다.

“이 법정은 미군정의 법정이며 미 군정장관의 딘 장군의 총애를 받던 박진경 대령의 살해범을 재판하는 인간들로 구성된 법정이다. 우리가 군인으로서 자기 직속상관을 살해하고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을 결심하고 행동한 것이다. 재판장 이하 전 법관도 모두 우리 민족이기에 우리가 민족 반역자를 처형한 것에 대하여서는 공감을 가질 줄로 안다. 우리에게 총살형을 선고하는 데 대하여 민족적인 양심으로 대단히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다. 이 법정에 대하여 조금도 원한을 가지지 않는다. 안심하기 바란다. 박진경 연대장은 먼저 저 세상으로 갔고, 수일 후에는 우리가 간다. 그리고 재판장 이하 전원도 저 세상에 갈 것이다. 그러면 우리와 박진경 연대장과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저 세상 하느님 앞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인간의 법정은 공평하지 못해도 하느님의 법정은 절대적으로 공평(公平)하다. 그러니 재판장은 장차 하느님의 법정에서 다시 재판하여 주기를 부탁한다.”

1948년 8월 14일, 고등군법회의에서 문상길 중위는 사형을 언도받고​ 9월 23일 사형이 집행됐다.

제주4.3이 발발한 후 8개월이 지난 1948년 11월 21일, 국방부는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틀 후인 11월 23일에는 중산간 주민들에게 소개령(疎開令)을 내렸다. 나는 다섯 살로 서광에서 덕수리로 소개했다. 초토화 작전이 전개되면서 중산간 마을은 불에 타 잿더미가 됐다.

우영팟 대나무 넘어 타는 집이 시뻘건 불빛과 타닥타닥 타는 소리는 지금도 눈에 선하다. 소개령이 시작되면서 4.3은 대학살의 광풍이 몰아쳤다. 우리 윗마을이 동광인데, 안덕지서의 소개령을 동광마을에선 전달 받지 못했다. 

영화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2’은 소개령으로 동굴에 숨어 지냈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영화는 1948년 11월 안덕면 동광리 도너리오름 ‘큰넓궤’ 동굴에서 주민 120명이 2개월 동안 숨어 지냈던 실화다. 당시 지슬(감자)로 끼니를 연명하며 은신했던 주민들은 결국 토벌대에 발각돼 전부 희생됐다. 1948년 12월에는 토벌대들이 구좌읍 다랑쉬 오름을 수색하던 중 동굴 입구를 발견했다. 숨어있던 주민들이 나오지 않자 메밀짚에 불을 피워 굴에 집어넣었다. 아홉 살 난 아이와 여자 셋을 포함해 모두 11명이 연기에 질식해 숨졌다. 사건 발생 다음날 동굴을 찾은 주민들은 연기에 질식된 사람들이 눈·코·귀에서 피를 흘리고, 고통에 몸부림치며 돌 틈에 머리를 박고 숨져 있는 참혹한 장면을 목격했다. 

초토화 작전이 전개된 1948년 11월 중순부터 이듬해 3월 초까지 4개월 동안 제주에는 피바람이 불었다. 이 기간 희생자는 9709명으로 4.3당시 전체 희생자 1만4533명의 67%에 달했다. 목숨은 살려준다는 귀순 공작에 양민들이 자수를 했다. 1948년 12월과 1949년 6~7월 두 차례 열린 군사재판에서 2530명에게 형(刑)이 선고됐다. 수형인 중 18~19세 청소년을 포함 민간인 384명이 사형 당했다. 당시 제주에는 교도소가 없어서 2146명은 전국 형무소에 뿔뿔이 흩어져 수감됐다. 밤엔 산사람 세상, 낮엔 경찰 세상, 웃드르와 알드르, 중산간 경계인(境界人)이 겪은 비극의 역사다.

3월 16일은 제주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한 역사적인 날이었다. 배·보상과 특별재심 내용이 포함된 제주4.3특별법 전부개정안이 대통령이 참여한 가운데 국무회의에서 의결됐고, 제주지방법원에서는 4.3 당시 군사재판을 받고 육지형무소로 끌려갔다가 한국전쟁으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도 없이 행방불명이 됐던 333명에게 72년만에 재심을 통해 '무죄'가 선고됐다. 재판부는 4.3 당시 군사재판이 증거가 없는 '불법 재판'으로 판단했다. 이번 재판이 중요한 이유는 4.3 수형인에 대한 명예회복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3월 16일 오후 6시30분 제주지방법원 정문에서 4.3 행불인 333명 무죄 판결에 유족회가 환영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3월 16일 오후 6시30분 제주지방법원 정문에서 4.3 행불인 333명 무죄 판결에 유족회가 환영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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