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현장] 4.3 당시 유해 3구 발굴 현장설명회...4.3 당시 움집, 토굴 추정지에 대한 추가 조사 진행

표선면 가시리에서 발견된 4.3희생자 추정 유해 3구

제주 가시리에서 발견된 4.3 유해 3구는 가시리마을 출신 강원길(당시 48)씨와 김계화(32), 김계화의 아들 강홍구(11)일 확률이 매우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 

31일 오후 3시부터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서 ‘4.3희생자 유해발굴 현장 보고회’가 이뤄졌다. 현장 보고회가 이뤄진 곳은 가시리 한 감귤과수원 귀퉁이에서 4.3 당시 희생자로 추정되는 두개골 3개가 발견된 장소다. 

이날 발견된 유해 3구는 제주 중산간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초토화 작전이 진행되던 1948년 12월21일 가시리마을 내 토굴과 움막으로 피신했던 도민으로, 30대 여성과 10대 소년의 유해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제주도와 제주4.3평화재단, 제주4.3희생자유족회는 강군섭(79) 할아버지와 감귤과수원 토지주의 증언을 바탕으로 유해 발굴 작업을 벌였다. 

강 할아버지는 먼 친척인 강원길(당시 48) 일가족과 또 다른 먼 친척 강태춘(당시 33)의 아내와 자녀가 4.3때 목숨을 잃었다고 전했다. 

4.3위원회 희생자 신고자료와 4.3사건 추가진상조사보고서 등에 따르면 강원길은 아내 고열평(47), 딸 강대열(12, 이명 강순열), 아들 강봉일(7), 딸 강태일(5), 둘째 아내 오차여(46) 등과 함께 몰살당했다. 

또 강태춘과 아내 김계화, 아들 강홍구(11), 아들 강홍주(1)도 4.3 당시 목숨을 잃었다. 다만, 딸 강순자(10), 아들 강홍권(6)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강군섭 할아버지가 4.3 당시 기억을 더듬으면서 해당 구역에 유해 4구가 묻혀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날 현장 보고회에서 강씨는 어릴 적 아버지와 친척들에게 들었던 얘기를 기억하면서 4.3 당시 목숨을 잃은 먼 친척인 강원길과 다른 친척 강태춘의 아내 김계화, 아들 강홍구, 이름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신원 불상 1명 등 총 4명의 시신의 머리만 감귤과수원에 묻혔다고 증언했다. 

반면, 감귤과수원 토지주는 온전한 시신 5구가 묻힌 사실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발굴 결과, 두개골 3개가 현장에서 발견됐다. 연구진은 두 사람의 증언을 바탕으로 추가 발굴 작업을 진행할 계획이다. 

4.3 당시 가까스로 죽음을 모면한 강홍권의 유족은 살아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전자 감식 등을 통해 유가족을 찾는 작업도 진행할 예정이다. 

강군섭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가시리마을 사무장을 맡았고, 4.3 당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버지는 먼 친척의 제사까지 한번에 지냈고, 나에게 제사를 물려줬다. 먼 친척의 제사까지 지내다보니 4.3 당시 다양한 얘기를 들었다. 여러 사람들 덕에 유해가 발굴됐다. 감사하다”고 말했다. 

유해 발굴을 진행한 일영문화유산연구원 박근태 원장은 “두 사람의 증언을 바탕으로 발굴 작업을 벌이고 있다. 현재 두개골 3개가 발견됐고, 고무신 등도 나왔다”며 "현재 가시리 주민 증언을 바탕으로 4.3 당시 쓰였던 움집과 토굴 추정지에 대한 조사도 벌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유해 유전자 감식을 맡은 이숭덕 서울대학교 법의학교실 교수는 “새로운 유전자 감식 기술이 4.3 유해 신원 확인에 도움이 됐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신원 확인이 안된 유해가 많아 제주에 올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고 말했다. 

이어 “유가족을 찾기 위해서는 도민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4.3 당시 증언과 함께 유가족들은 유전자 시료 채취에 적극 참여해달라”고 당부했다. 

가시리는 73년 전 4.3 당시 초토화작전과 소개령으로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이다. 당시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 송요찬(소령)의 포고문이 초토화작전의 신호탄이 돼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내 지역을 제외한 중산간마을 사람들이 무자비하게 학살됐다.  

1948년 당시 가시리에는 360여 가구가 살 정도로 제주에서 규모가 큰 마을이었지만 4.3으로 완전히 폐허가 됐다. 4.3 당시 중산간마을 82곳 중 100명 이상의 주민이 희생된 마을은 35곳에 달한다. 가시리도 이 중 한 곳이다.  

현재까지 가시리에서는 421명의 민간인이 희생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는 노형리(538명), 북촌리(446명)에 이어 3번째로 양민 학살이 많은 곳이다. 

4.3 당시 가시리 주민들은 마을을 지키기 위해 고야동산에서 보초를 서기도 했지만, 한모살과 버들못 등에서 집단 학살당했다. 

1948년 12월22일 하루에만 ‘버들못(표선변전소 인근)’에서 90여명이 집단 총살당한 사실만 보더라도 가시리 일대를 휩쓴 4.3의 광풍을 유추할 수 있다. 

가시리마을은 1949년 5월 재건됐으나, 주민들은 여전히 4.3의 아픔을 잊지 못하고 있다. 

박근태 원장이 유해 발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숭덕 교수가 4.3 유가족의 시료 채취가 더 많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제주도는 제주4.3평화재단, 4.3희생자유족회와 함께 지난 22일 유해발굴 개토제를 갖는 등 4.3희생자 유해발굴 사업을 재개했다. 개토제는 유해발굴 전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발굴에 참가하는 사람의 안전을 기원하는 행사다. 4.3 유해발굴은 2018년 이후 3년만이다.

제주도는 4.3 당시 학살·암매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가시리와 색달동, 상예동, 영남동, 시오름, 노형동 등 7개 지역에서 유해 발굴작업을 진행할 계획이다. 

유해발굴 지역 7곳은 기초조사와 주민들의 증언·제보를 토대로 결정됐다. 

한편 2006년부터 시작된 4.3희생자 유해발굴을 통해 지금까지 총 408구의 유해가 발견됐다. 이 중 133구의 신원이 확인돼 가족 품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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