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제주 4.3 73주년에 부치는 박산의 '폭낭의 기억'을 읽고

사진=오마이뉴스.
제주에서 팽나무는 폭낭으로 불린다. 사진=강정효, 오마이뉴스.

'폭낭'이 뭘까? 폭낭은 제주 방언으로 마을을 지키는 신령이 있다 여겨 제사를 지낸다는 당나무(신목) 중 하나인 팽나무를 말한다. 나는 2011년부터 제주 생활을 시작했던 터라 10년 안목에 알 법도 했지만, 전혀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아내를 포함한 제주 출신 지인 몇 사람에게 물었더니 모두들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것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얘긴 제주 사람들만의 언어마냥 그들의 가슴 깊숙한 곳에 접어둔, 지우려야 지울 수도 없는 오랜 기억들의 파편이란 걸.

T.S 엘리엇의 '황무지'

책장을 펼치며 곧바로 전해지는 묵직한 기운. 학살의 시간을 피해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이 침묵과 굴종의 언어로만 전해야 했던 수천 수만의 이야기들, 산 자와 죽은 자가 부둥켜안은 채 서로의 운구를 하며 마을 그늘진 어느 곳에 묻어야만 했던 사연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각 마을의 폭낭이 기억했다가 긴 세월 서러운 아침을 깨웠을 터. 그러곤 선연한 기억 가지가지에 새긴 뒤 저 너머 한라의 장엄한 시선과 눈빛을 나누었으리라.

책 속으로 들어가면서 문득 T.S 엘리엇의 대표작 '황무지'의 역설을 떠올리게 된다. 아주 오래전 제주 4.3의 항쟁과 수난사를 책으로 만났던 지점이기 때문이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었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가냘픈 목숨 마른 구근을 먹여 살려주었다.

총 434행으로 이뤄진 그 시의 첫 행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구절.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엘리엇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욕망과 검은 상흔만 남은 유럽 문명에 비수 같은 촌철을 날렸다. 생명의 기운을 소실한 황무지가 바로 유럽인의 자화상이라면서. 동토의 땅에서도 기어코 뚫고 일어나 긴 기다림의 세상에 손짓하는 봄보다 차라리 땅속에 누워 있는 겨울이 따뜻했다는 이 짙은 역설! 해마다 4월이 되면 새순이 돋아나는 경이로움 대신 절망과 파멸을 다시금 기억해내야 하기에 잔인해진다는 그 말에 전율했던 시간이 있었다.

80대 중반 3월이 다 기울어가던 어느 오후, 막걸리 한잔을 들이켜며 독백처럼 내뱉던 어느 선배의 그 말에 파리하게 떨던 작은 영혼에까지 전이되던 잿빛의 요동. 우리의 근현대사는 그토록 참혹한 것이었다고, 돌이킬 수 없는 절망 속에서 싹트는 희미한 희망일 뿐이라고, 그리하여 순환하는 계절이 올 때면 여지없이 피어나는 진달래처럼 붉은 것이라고.

사진=오마이뉴스.
박산의 제주4.3 역사소설 '폭낭의 기억' 1.2권(총 5권 발간 예정). 사진=간디서원, 오마이뉴스.

분명한 가해자

제주 4.3 기록과의 첫 만남은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이고 공포였다. 부르르 흔들리는 숨결을 간신히 붙잡고서도 도저히 이름조차 삼킬 수 없었고, 진혼의 선율 한 자락도 차마 부를 수 없을 것 같았다. 가해자는 분명했다. 거대한 권력이었고 제국주의였다.

그들은 압도적 힘의 우위를 총동원하여 총칼로 학살했다. 미군 함대의 경적이 섬 전체에 울리는 가운데 '악마의 살인귀' 서북청년단 토벌대가 온 마을을 휘저으며 '빨갱이'들을 색출하고 도륙했다. 살인적인 고문과 약탈이 이어졌고 어린 소녀들이 윤간을 당한 채 바다에 던져졌다. 그들이 짓밟은 것은 희망의 조국을 꿈꾸었던 제주 민중들의 함성이었고 가족의 꺼져가는 생명을 지키려는 눈물겨운 몸부림이었다. 또 마지막 남은 인간의 존엄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학살의 골짜기마다 제주인의 심장들을 생매장했다. 거기에 광기의 못질까지 더했다. 관 뚜껑보다 무거운 족쇄를 채운 후 '빨갱이들의 최후'라는 시뻘건 낙인을 그 위에 새겼다. 그 결과, 살아남은 자들은 말할 수 없었고 광란의 이데올로기는 '빨갱이 세상'의 종언을 고했다.

김건과 김율 형제

소설의 시작은 일제의 1941년 진주만 기습으로 야기된 태평양전쟁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극에 달한 군국주의 망령이 극한으로 치달을 때다. 동남아 전투에서 일본이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전황이 막바지에 이르자 섬 곳곳이 이미 군사요새화되어 있던 제주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제주에 주둔했던 58군의 최후 발악은 고스란히 제주도민의 고통으로 전가된다.

소설의 1권에는 미군 함대가 출몰하면 어뢰정을 타고 자폭했던 인간어뢰 부대 '가이텐'의 군사기지 복원을 위해 육지의 노무자들을 끌어와 강제노역을 부리는 장면이 잘 묘사되어 있다. 건장한 청년들은 모두 강제 징병과 강제 징용으로 끌려가 머나먼 이국땅으로 내팽개쳐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전황이 불리해지자 일본군은 제주도 120여 개 오름에 지하 갱도 진지를 만들며 옥쇄를 준비했다고 전해진다. 게다가 1930년에 준공되어 1937년 난징대학살 비행거점으로 악용되었던 알뜨르비행장을 확장하고 7만 명이 넘는 엄청난 군대가 제주에 집결하는 등 섬 전체가 미군 함대를 대비한 전쟁기지로 전진 배치되었다.

전쟁은 모든 것을 초토화시킨다. 남는 것은 폐허와 살아남은 자의 아우성 그리고 상실이다. 그런데도 태평양전쟁의 종식과 해방은 새로운 희망을 움트게 하는 국면이다. 소설 속에 비치는 제주의 해방정국은 긴박감이 고조되면서 도피, 징병, 징용으로 제주를 떠났던 청년들이 속속 귀환하는 모습이 펼쳐진다. 어떤 이는 귀환과 함께 만세운동을 조직하고 또 어떤 이는 기금을 마련하여 교육활동에 진력한다.

이 책 제주 4.3 역사소설 <폭낭의 기억> 1, 2권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김건, 김율 형제는 각각 1944년에 징병, 징용되었다가 천신만고 끝에 귀환을 시도하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한다. 형 김건은 오키나와 전투에 참전했다가 미군의 포로가 되어 하와이수용소로 이감되고, 동생 김율은 미쓰비시 조선소에서 노무자 생활을 하다가 해방 이후 귀환을 시도하지만 연합군 사령부의 조선인 차별 귀환방침에 막혀 하카타에서 발이 묶이게 된다.

사진=오마이뉴스.
제주 서귀포에 있는 알뜨르 비행장 격납고. 사진=간디서원, 오마이뉴스.

해방, 뜨거운 제주

총 5권으로 구성된 이 소설의 1, 2권은 징용과 징병으로 인해 제주를 떠나가는 사람들과 해방과 함께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끝을 맺고 있다. 이는 제주 4.3의 시대적 배경을 해방 이전까지로 확장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그대로 반영된 결과다. 그것은 소설을 준비하기까지 걸린 9년이 넘는 오랜 탐사와 분투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럼으로써 제주의 수난사를 4.3사건 혹은 4.3항쟁이라는 좁은 틀에서 벗어나 우리의 근대사 전체를 살피는 확대된 시선을 제공할 수 있다.

실제로 해방정국에서의 제주는 그 어느 지역보다 뜨거운 곳이었다. 섬 전체가 전장이 되고 언제든지 총알받이가 될 처지에 놓였지만 불구덩이 속에서도 일어나 해방 이후 새로운 나라 건설에 불꽃 같은 열정을 태운 곳이 바로 제주도다. 여러 자료에 의하면 해방 이후 제주의 인구는 급격히 증가했다. 20만 명 정도였던 인구가 30만 명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이는 해방 직후 6~7만 명에 이르는 청년들이 속속 제주로 돌아온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들 대부분은 진보적 지식인이었고 전쟁의 참상을 몸으로 겪은 노동자들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뛰어난 정치의식을 바탕으로 제주읍에서부터 시작된 인민위원회 결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청년치안대를 결성하여 자율적인 치안을 책임졌다. 전국적으로 가장 강력한 조직 대오를 유지하며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에 대항했다.

1948년 남한 내 단독정부를 세우려는 미 군정과 이승만 세력에게 있어 제주의 이 같은 저항과 자치조직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고, 결국 이것으로 인해 제주 4.3이라는 비극적인 서사가 우리 역사에 새겨지게 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도슨 신부와 스님들

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몇 가지 특징이 보인다. 우선 '태백산맥'의 염상진, 염상구 같은 전형적인 인물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작가가 서문에서 밝혔듯 마을 곳곳마다 남아 있는 폭낭의 기억 조각 조각을 여러 인물의 고단했던 삶을 통해 투영하려는 의도와 관련 있어 보인다. 그런 면에서 이 책에 나오는 여러 인물이 모두 주인공이 된다. 전쟁의 소용돌이와 시대의 격랑을 온몸으로 견뎌내며 고뇌하고 분투했던 생생한 모습들을, 곧 기억을 재구성하는 것이 이 책의 내러티브인 셈이다.

그런 이유로 소설적 재미를 떨어뜨리는 측면이 다소 있지만, 한편으로는 제주 4.3 무대를 향하는 각 인물의 역동적인 변화상이 옴니버스식 다큐멘터리로 펼쳐지는 듯한 생경함이 이 책을 읽은 신선한 포인트이다. 이는 또 흩어졌던 개인들이 유기체가 되어 4.3항쟁의 주역이 되는, 3권 이후에 전개될 스토리의 극적 요소가 된다는 점에서 기대감을 갖게 하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역사적 실증이 매우 강하다는 점이다. 이 소설은 어찌 보면 독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실제 역사를 자세히 일러준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1권의 주요 인물로 나오는 아일랜드 출신의 도슨 신부는 실존 인물로서 군사기밀 죄로 기소되어 5년을 선고받은 뒤 광주교도소에 수감된다. 이 외에도 여러 스님과 항쟁 지도부 등 10여 명에 이르는 실존 인물이 소설 속에 등장한다.

잘 다뤄지지 않았던 여러 역사적 사건들도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제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제의 58군이 제주도민이 50일 정도 먹을 수 있는 군량미를 불태우는 만행과 이에 격분해 58군 트럭을 불태우며 저항했던 제주 청년들의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이뿐 아니라 해방 이후 최악의 흉년으로 고통받았던 당시 정황과 악덕 상인들의 매점매석, 미 군정의 조선인 차별 귀환방침으로 재일조선인들의 발이 묶인 사연, 미 군정 고위 간부가 관여된 생활필수품 비리, 식량 공출에 따른 도민들의 불만과 분노, 전국 파업의 발화점이 된 시위와 파업 등등...

사진=오마이뉴스.
제주4.3공원 묘지 풍경. 사진=간디서원, 오마이뉴스.

"광기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고 싶었다"

<폭낭의 기억>은 매우 구체적인 자료에 기초해 빼곡히 기록해 놓은 듯이 역사적 사건을 복원해 냈다. 이 역사적 사건은 제주 4.3 수난사의 엄중한 배경이 되며 기존의 작품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다.

1차분 작품에만 원고지 6000매가 넘는 방대한 기록.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매진했던 작가가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는 작품치고는 너무나 무거운 도전임이 틀림없다. 작가는 말한다.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 광란의 무대로 바뀐 제주에서 시작된 '피의 광기'로 다가온 것이 1980년 <순이삼촌>을 통해서였다고. 이후 40여 년을 살아오면서 광기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더 다가가지도 못했다고 고백하면서 광기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고 싶어서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전한다.

작가의 말처럼 어쩌면 이 작품의 현미경은 간절함일지 모른다. 역사의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 그 물살이 흘러내리고 바다와 닿는 곳, 오랜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어디에서인가는 인류의 비원과 만나 꽃을 피우는 장면을 보고 싶다는 그 간절함 말이다.

제주 4.3을 기억하는 것조차 금기였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많은 이들의 헌신과 투혼으로 4.3의 금역이 조심씩 해체되고 있다. 하지만 그 오랜 유폐의 역사와 봉인된 채 여전히 결박되어 있는 이데올로기의 악령으로는 4.3의 역사를 품을 수 없다. 이 작품이 <순이삼촌>을 읽은 '육지것' 후배 세대의 뒤늦은 헌사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 틈새로 살피는 역사 인식은 73번째 4.3을 맞는 오늘의 독자 몫이 될 것이다.

오늘 바라보는 역사는 언제나 새로워야 하기 때문이다.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와의 협약으로 게재합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