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념식장에서 만난 사람] 비바람 뚫고 평화공원 찾은 유족들...“무죄 판결, 한(恨) 조금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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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평화공원을 찾아 작은아버지 표석에 음식을 올리는 행불인 유족 현말옥 씨. ⓒ제주의소리

“오등동에 살았다는게 죄야, 죄라면 그게 죄야”

밤새 몰아치던 비바람이 아침까지 이어진 3일 제주4.3평화공원, 1946년생 현말옥 씨는 ‘현상구’ 아버지 이름 석 자가 적힌 행방불명인 표석에서 한참 동안 두 손 모아 울부짖었다. 

제주시 오등동이 고향인 현 씨는 4.3으로 아버지와 작은아버지(현상순)를 떠나보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아버지 모습은 “바지저고리 챙겨 입은 아버지를 세 사람이 잡아가는 장면”이다. 그의 나이 3살 때 일.

누군가에게 끌려간 아버지는 ‘대구형무소에 있다. 금방 돌아가겠다’는 엽서를 끝으로 소식이 끊겼다. 현 씨를 포함해 세 자매는 불타버린 오등동 마을에서 생존해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세찬 비바람 속에서도 몸이 불편한 3살 많은 언니를 챙기면서, 동시에 준비한 음식과 술잔을 올린 현 씨. 지난 3월 16일 제주지방법원이 무죄 선고한 4.3행불인과 재판 수형인 335명 이름에는 아버지 ‘故 현상구’ 이름이 포함됐다. 

그는 “그동안 연좌제니 뭐니 기를 못 피고 살았다. 좋은 세상이 와서 감사한 일”이라며 “불법군사재판으로 희생당한 아버지가 무죄라는 소식을 받아드니 맺힌 한이 조금은 풀린 것 같다. 앞으로 위자료 지급 같은 절차가 남아있다고 하는데 정부가 4.3희생자들의 명예 회복에 계속 노력해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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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평화공원을 찾은 행불인 유족 강서경 씨. ⓒ제주의소리

“너무나 외롭게 자랐어...억울해”

또박또박 옛 기억을 기억하던 주름진 얼굴에 금세 눈물이 고인다. 안덕면 동광리 무등이왓이 고향인 1948년생 강서경 씨는 4.3 때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등 가족들을 졸지에 떠나보낸 기억이 지금도 뽑히지 않는 한으로 남아있다. 

그는 “음력 1948년 9월이었다. 할머니 제사가 9월 20일인데, 그날 할머니 제사를 보러 간다고 아버지(강원철)가 형제들이 사는 한경면 조수2리로 나섰다. 그 뒤로 아버지를 만날 수 없었다”고 기억했다.

아버지 소식을 접한 때는 무려 51년이 흐른 1999년. 대전형무소에서 2년 형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게 해서 강 씨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위패봉안실, 아버지는 행방불명인 표석에 모셔져 있다.

남아있던 유일한 피붙이인 어머니는 곧 재가하면서 4.3 이후 그의 삶은 지독히 외로운 기억 뿐이다. 성인이 돼서 슬하에 딸 5명, 아들 1명이란 대가족을 꾸린 것도 “자식이 귀하니 나라도 많이 낳으려”는 일종의 트라우마다. 

강 씨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나오고 고아처럼 컸다. 너무 많은 한이 맺혀서 억울하다”면서 “새로운 희망이 있다면 정부가 4.3의 완전한 명예회복과 보상을 약속한 부분이다. 다시는 4.3 같은 일로 희생자가 생겨나면 안된다”고 힘주어 전했다.

그러면서 “지금 미얀마 사태를 보면 4.3이 생각난다. 하루 빨리 사태가 종결되고 세계 어디에서도 학살이 없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남겼다.

제주시 구좌읍 행원리 출신인 이영자(80) 할머니가 제73주년 4.3희생자 추념식이 열리는 제주4.3평화공원 행불인표석에서 아버지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제주시 구좌읍 행원리 출신인 이영자(80) 할머니가 제73주년 4.3희생자 추념식이 열리는 3일 제주4.3평화공원 내 행불인표석에서 아버지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아버지 시체 일부라도 찾고 싶어”

제주시 구좌읍 행원리 출신인 이영자(80) 할머니는 집에서 버스에 몸을 실어 추념식장으로 향하는 내내 눈물을 흘렸다. 

해마다 반복되는 4월의 봄이 오면 이 할머니는 괜스레 가슴이 먹먹해지고 70여년 전 그날의 아픔이 떠오른다.

이 할머니는 1945년 광복후 부모님과 구좌읍 행원리에 터를 잡았지만 3년도 지나지 않아 4.3의 광풍이 마을 덮쳤다.

총과 칼을 들이대는 군경이 마을 곳곳을 헤집고 다니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김 할머니의 아버지를 산으로 보냈다. 당시 김 할머니는 세 살배기 아이였다.

이 할머니는 “산으로 간 아버지가 어디로 어떻게 끌려갔는지 아무도 몰라. 가족들이 아버지 시체를 찾아다녔지.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는 얘기는 한참 후에 알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부모님을 잃고 할아버지까지 돌아가시면서 할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랐다. 부디 지금이라도 아버지의 신체 일부라도 찾아서 좋은 곳에 모시고 싶다”며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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