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호의 짧은 글, 긴 생각] 스물 네 번째

제주 지명과 4.3사건 967명 대학살과 연관이 있는 곳이 세 곳이 있다. 성산포의 터진목, 모슬포의 절울이, 서귀포의 정방 폭포, 가슴에 총 맞은 것이 이런 마음일까.

성산의 터진 길목은 사람의 터진 목(喉, Neck)

설촌 200년인 성산리는 제주도 동쪽 끝에 반도처럼 튀어나온 섬 아닌 섬. 지금은 해안도로 등이 있어 다른 지역으로 통할 수 있는 길이 많지만, 일제 말엽 194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성산리는 물때에 따라 육지길이 열리고 닫혔었다. 즉, 고성리에서 성산일출봉으로 이어지는 '터진목'의 좁은 길만 막아버리면 오갈 수 없는 곳, 사람의 목에 해당 된다. 4.3 당시 목이 터져 467명이 희생됐다. 이런 지리적 여건 때문에 성산리에는 4․3 발발 초기에 한 번의 지서 습격이 있었으나 인명 피해는 없었고, 그 이후로도 무장대로부터 이렇다 할 기습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서청특별중대의 존재는 성산면, 구좌면 지역주민들에겐 악몽이었다. 툭하면 잡혀가 곤욕을 치르는가 하면, 그 곳에 한번 잡혀가면 살아 돌아오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자기도 무슨 혐의를 뒤집어 써 특별중대 주둔지에 몇 번 끌려갔었다는 이기선(남, 77세) 씨는 “거기서 취조는, 그 뭐, 입으로 말할 수 없어요. 좌우간 무조건 잡아놓으면 두드려 패는 게 일이고. 죽어나가는 사람도 많았어요”라고 말했다. 이렇듯 성산면과 구좌면 등을 관할했던 특별중대는 잡아 온 주민들을 혹독하게 고문하다가 대부분 총살했는데, 그 장소가 성산리의 '터진목'과 '우뭇개동산'이었다. 때문에 성산리민들은 날마다 잡혀온 주민들이 고문 받는 비명소리를 듣고 총살당한 시체의 모습을 볼 수밖에 없었다.

성산일출봉 전경.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성산일출봉 전경.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터진목은 특별중대에 끌려온 성산, 구좌면 관내 주민들이 감자공장 창고에 수감되어 고문당하다 총살됐던 학살터였다. '터진목'이란 지명은 터진 길목이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실제 194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성산리는 물때에 따라 육지길이 열리고 닫혔었다. 이후 주민과 행정당국이 공사를 벌여 육지와 완전히 이어지게 됐는데, 지금도 이 일대를 '터진목'이라 한다. 

성산면의 온평리, 난산리, 수산리, 고성리 등 4․3 당시 희생된 성산면 관내 주민 대부분이 이 곳 터진목에서 희생됐다. 그들은 대부분 인근 지서에 끌려갔다가 성산포에 주둔하던 서청특별중대에 끌려오거나, 토벌대의 포위 습격에 걸려들어 역시 서청특별중대에 끌려와서 고문 취조를 당하다 터진목에서 총살됐던 것이다. 성산면 이외에도 구좌면 세화, 하도, 종달리 등에서도 붙잡혀온 주민들이 이 곳에서 희생된 경우도 많았다. 고성리에서 성산포로 성산일출봉으로 1㎞쯤 가다 보면 우측에 해녀공원을 볼 수 있다. 그 곳에서 500m쯤 가면 성산리 바로 못 미쳐 오른쪽에 소나무 군락을 볼 수 있는데, 그 소나무 건너 해변에 암반이 드러난 곳이 속칭 '광치기여'고, 그 앞 모래사장이 '터진목'이다. 지금은 소나무로 가려져 길에서는 '터진목'을 볼 수 없으나, 당시에는 지금처럼 소나무가 없었기 때문에 훤히 터진목 해안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당시의 풍광과 다를 바 없는 해안으로 남아 있다. 또 성산일출봉의 위용을 남동쪽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곳이어서 관광객들도 자주 찾는다. 당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현재 터진목 초입에는 성산읍 4.3희생자 유족회가 2010년 11월 5일에 세운 위령비가 자리하고 있다. 이 위령비에는 추모글과 함께 성산면 4.3희생자 467위의 이름이 마을별로 새겨져 있다. 한편 이곳에는 2008년 프랑스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르 클레지오의 ‘제주기행문’ 일부가 새겨진 빗돌이 자리해 ‘어떻게 이 아름다운 곳이 학살터로 변했는지?’ 그 연유를 우리에게 묻고 있다. 

절울이 항공 사진.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절울이 항공 사진.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모슬포 송악산 절 울이(숨결, 呼吸, Breath) : 백조일손(百祖一孫) 

모슬포 송악산 바다는 동남풍이 불 때는 바다 절이 운다. 절은 ‘물결, 숨결’의 제주 고유어, 숨결이 울고 있으니 4.3때 학살 현장 터, 1950년 8월 20일, 제주 4.3사건의 막바지이자 6.25 전쟁 초기에 제주도 남제주군 송악산 섯알오름에서는 '적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자'를 미리 잡아 가두는 경찰의 예비검속 과정에서 252명이 대량 학살되었다. 6년 후에야 이들에 대한 유해 발굴이 이루어졌지만, 뼈들이 뒤엉켜 있어 누구의 시신인지 알 수 없었다. 결국 당시 유족들은 공동으로 부지를 매입하여 유해들을 안장한 후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라고 이름을 지었다. '백조일손(百祖一孫)'이란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날한시에 죽어 누구의 시신인지도 모르는 채 같이 묻혀 무덤도 같고, 제사도 같이 치르니 그 자손은 하나다.'라는 의미이다.

정방폭포.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정방폭포.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서귀포 정방 : 사람이 바다로 떨어진다

정방폭포는 동홍천 상류 ‘정방연(正方淵)’ 이형상 목사(1653-1733)가 ‘바다를 향해 똑바로 물이 떨어진다’며 정방(正方)으로 탐라순력도 1702년에 표기돼 있다. 그 후 웬일인지 1899년 제주군읍지에 정방(正房, 집채방)으로 변했다. 오기(誤記)다. 正房은 제주의 한라산, 그 주인이 한라산으로부터 바다로 내려온다는 말, 4.3사건 때 동광, 상창 주민 등 248명이 이 폭포위에서 학살 당해 바다로 떨어졌다. 正房 이름처럼 된 것이 우연인가? 정방(正方)폭포가 4.3의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 글을 4.3 영령들에게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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