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선의 마을 책방을 찾아書] (19) ‘깊이 보는 서점 인터뷰 interview’ 강시영·현순안 부부

마을책방은 단순한 기호품을 파는 곳이 아닙니다. 대형서점처럼 책을 어마어마하게 팔아치우는 곳은 더욱 아닙니다. 후미진 도심 골목이나 시골 언저리에서 마을책방을 만난다면 그것은 행운이지요. 마을 초입 팽나무 아래 마을사람들이 모여들듯 책벌레들이 도란도란 어우러질 수 있는 사랑방 같은 곳입니다. 제주도 마을 곳곳에 작은 책방들이 사람을 살리고, 다시 사람이 마을을 살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마을책방의 가치입니다. [제주의소리] 시민기자 고봉선 시인이 바람을 쐬듯 책방마실을 다니고 있습니다. 책과 사람이 만나는 곳 ‘마을 책방’에서 책방지기의 책 살림 이야기를 시인을 통해 듣습니다. [편집자 글] 

삐악삐악, 어미 닭의 뒤를 졸졸 따르는 병아리가 금방이라도 눈앞에 나타날 것처럼 봄 햇살이 화창하다. 책방 근처에 차를 세웠을 때, 노란 튤립이 병아리 대신 날 반긴다. 유채밭을 스치며 책방 앞에 도착한 내 마음도 노랗다.

하지만 왜일까? 분명히 책방지기와 이야기를 나눌 땐 유쾌했다. 그런데 집에 와서는 자꾸만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이란 노래를 읊조리고 있다. 우울해서가 아니다. 일어서고 싶지 않았던 책방 ‘깊이 보는 서점 인터뷰  interview’(이하 인터뷰)의 분위기에 압도당한 것이다. 산뜻한 내부, 게다가 한라산과 바다를 한 번에 볼 수 있는 전망은 공짜 옵션이다. 맑은 날은 맑은 날대로, 비가 내리는 날은 또 비가 내리는 대로 다양한 정서를 암암리에 안겨주는, 책방 인터뷰는 그런 곳이었다. 비 오는 날,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이 흐르는 책방 창가에 앉아 있으면 마치 영화 속 주인공이 될 것 같은 분위기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깊이 보는 서점 인터뷰  interview’ 근처에 주차했을 때, 이웃집 담장 밑 화단에서 노란 튤립이 날 반겨주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전직 기자 출신 부부 책방지기”
사회부에서 활동하다가 환경 전문기자로 방향을 튼 남편 강시영 씨는 평생 직업이라 여기던 신문기자 생활을 2년 전에 내려놓았다. 천직이라 여겼던 기자를 때려치우고 인생2막을 부인 현순안 씨와 함께 책방 인터뷰의 책방지기로, 또 농부의 삶을 살기로 했다. 그 때문에 난 강시영 씨를 만날 수 없었다. 4월은 그에게 유독 바쁜 달이기 때문이다.

기자를 그만둔 강시영 씨는 요새 한라봉 농사에 여념이 없다. 비닐하우스 안의 한라봉은 요즘 막 꽃이 피기 시작했다. 몽글몽글 여문 꽃망울을 보며 얼마나 설렐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식물을 키우고 가꾸려면 정성과 노력이 필수다. 하지만 경험치만 갖고 농사짓던 시대는 이제 지났다. 과학의 힘을 무시할 수 없는 때다. 책방지기 현순안 씨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귤꽃 향기가 스멀스멀 내 콧속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이 또한 운명이었을까. 처음부터 책방을 하겠다고 생각했던 건 아니다. 그야말로 어쩌다가 책방을 하게 되었다. 책의 향과 관엽식물의 정서가 어우러진 책방은 평화로웠다. 알록달록한 꽃보다 관엽식물의 초록이 안겨주는 정서는 컸다. 

책방이 자리한 호근동은 부인 현순안 씨가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지낸 곳이다. 이후 20년을 제주시에서 살았다. 그리고 50대 중반에 접어든 어느 날, 남편이 갑자기 은퇴를 선언했다. 쉬어가라는 신호였던지 때마침 현순안 씨도 아팠다. 본의 아니게 부부는 동시에 실업자(?)가 되었다. 

뭔가를 하기는 해야 했다. 그런데 특별히 잘하는 게 없다. 2019년, 고민 끝에 책방을 시작했다. 책을 좋아한다기보다 싫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특별히 잘하는 게 책 읽기였는지도 모른다. 부부는 책을 친숙하게 여겼고,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현순안 씨 역시 강시영 씨와 마찬가지로 전직 기자 출신이다. 하지만 일찍 그만두었다. 육아라는 몫이 있었기 때문이다. 육아하는 동안 현순안 씨는 지인들과 함께 아이들 그림책 읽어주기, 동화 읽는 어른 모임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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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관련 작가의 책들이 진열된 코너에는 극락조가 함께하고 있다. ‘깊이 보는 서점 인터뷰  interview’ 내부 모습.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책방을 다니다 보면 종종 제주란 곳에 반해서 이주했다는 이들을 본다. 해외 그 어느 곳보다 매력이 넘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다. 제주는 세계 어느 곳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풍광을 가지고 있으며 학술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한라산과 용암동굴, 성산일출봉처럼 수려하고 아름다운 경관은 물론 독특한 지형이 매력적인 제주도다. 지난 2007년, 이처럼 매력적인 제주도의 가치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등재로 인정받았다. 여기엔 남편 강시영 씨가 관여한 공도 크다. 

세계자연유산이라는 용어조차 낯설던 때, 사회부 소속이었던 강시영 기자는 외국에 나간 일이 있었다. 가서 보니 해외는 세계자연유산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한 관심을 보며 그 어떤 생각이 기자의 두뇌를 강타했다. 제주로 돌아온 후 강시영 씨는 환경 전문기자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은퇴할 때까지 20여 년 동안 환경 전문기자로 활동했다. 게다가 지금은 환경 전문기자 출신답게 (사)제주 환경문화원을 출범시켰다. 물론 책방도 제주도의 환경과 생태를 중심으로 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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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마시며 종일이라도 책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원탁 옆엔 아레우카리아 트리가 함께하면서 공기를 더 맑게 정화하고 있다. ‘깊이 보는 서점 인터뷰  interview’ 내부 모습.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나도 하고픈 말이 있다”
환경문제에 천착하고 있는 책방지기 강시영·현순안 씨 부부를 보면서 생태 환경이라면 나 역시 하고픈 말이 있다. 고픈 말이기에 길어지더라도 양해해주시라. 2010년 3월, 우연히 장수물에 갔다가 도롱뇽알을 보게 되었다. 지금은 마실 수 없는 물이지만, 그래도 1급 청정수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 같아 이들이 더더욱 반가웠다. 순대처럼 생긴 도롱뇽알은 알주머니 한쪽이 바위에 붙어 있다. 물에 떠내려가면 안 되기 때문이다. 

알은 조그만 우물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런데 몇 개의 알주머니가 물 밖에서 말라가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도롱뇽알, 맘 놓고 살게 해 주세요”란 제목으로 기고했다. 그 후 해마다 장수물로 도롱뇽알을 보러 갔다. 

올해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지난 2월 하순, 아이들과 멸종되어 가는 동물들에 대하여 수업하다가 퍼뜩 생각났다. 아이들과 함께 갔다. 하지만 장수물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우물 안에 있어야 할 도롱뇽알은 모두 바깥에서 뒹굴고 있었다, 아이들과 난 도롱뇽알을 물속에 넣어주었다. 그리고 3일 뒤에 다시 갔다. 세상에! 성체 도롱뇽이 와 있었다. 

갑자기 성체 도롱뇽의 흐느낌이 들리는 듯했다. 잃어버렸던 자식이 돌아왔다며 얼싸안고 꺼이꺼이 우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건 한마디로 꿈보다 해몽이었다. 지금은 산란기 때다. 성체 도롱뇽은 산란을 준비하고 있을 뿐이었다. 

매년 1월 말에서 3월까지는 제주도롱뇽 산란 시기다. 도롱뇽은 무리 지어 알을 낳는다. 한 마리당 두 개의 알주머니를 낳으며, 알주머니 하나에는 100여 개에 가까운 알이 들어 있다. 이 알들은 체외수정으로 부화하게 되는데, 부화까지는 수온에 따라 시간이 다르다. 

알 낳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문제는 수분이 부족하면 알은 부화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시사철 물이 흐르는 장수물은 도롱뇽이 알을 낳고 부화하기엔 최적의 장소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가 지켜본 바로는 최악의 장소이기도 했다. 도롱뇽은 장수물에서 산란기가 끝날 때까지 계속 알을 낳았다. 하지만 단 한 개도 남아 있지 않다. 50일 동안 드나들며 관찰한 결과다. 

지난 2월 24일부터 꾸준히 살폈는데 도롱뇽은 쉬지 않고 알을 낳았다. 어제 두 개였던 알주머니가 이튿날엔 네 개가 있기도 하고, 때론 더 많기도 했다. 하지만 며칠 버티지 못했다. 길어야 3일이다. 알을 낳는 족족 누군가는 떼버렸다. 그래도 도롱뇽은 다시 알을 낳았다. 어쩌면 이솝 우화에 등장하는 늑대 같은 존재가 도롱뇽에게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주변에 물이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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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지기 현순안 씨가 카운터를 지키고 있다. ‘깊이 보는 서점 인터뷰  interview’ 내부 모습.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대책이 필요했다. 보호 표지판이라도 세워야 한다. 멸종위기종은 아니어도, 제주도롱뇽이 제주 특산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보호의 필요성은 충분했다. 내가 직접 표지판을 세울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의 공허한 부르짖음으로 끝날 것 같았다. 정책의 힘이 필요했다. 환경실천연합회며 환경부 민원실, 제주환경운동연합 등 여기저기 알아보았다. 쉽지 않았다. 

두드리면 열린다고 했던가. 비로소 길이 보였다. 돌고 돌아 도청 환경정책과로 연결되었다. 담당 주무관은 친절하게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었다. 그리고 전문가와 함께 답사까지 해 주셨다. 그들이 본 장수물은 제주도롱뇽 최대 서식지였다. 담당 주무관은 사람이 알을 떼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내년 산란기를 대비하여 보호 표지판을 세우겠다는 약속도 하셨다. 

2010년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후 똑같은 상황을 보면서도 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안타까워만 했다. 그러던 내가 이들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도롱뇽의 생태도 조금 알게 되었다. 그래서 움직였다. 그랬더니 되었다. 지금은 산란이 끝났는지 3월 30일 이후 새로 낳는 알은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에 낳은 알도 4월 1일엔 없었다. 알을 떼면서 잘려 남은 부분만 지금까지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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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드라세나류 관엽식물이 어우러진 ‘깊이 보는 서점 인터뷰  interview’ 내부 모습.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미션, 그리고 글의 힘”
책방을 시작하면서 어려움은 없었을까. 물론 어디에 기준을 두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하지만 어느 쪽으로든 어려움은 있게 마련이다. 의외다. 정작 어려운 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경제적인 면이나 책 선정, 고객 유치를 위한 홍보가 아니었다. 책방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주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다행히 이곳에 책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그분들은 필요할 때마다 책방에 와서 토크를 해주셨다. 그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책방은 어림없었다. 처음 일 년은 이렇게 주변의 도움으로 버틸 수 있었다. 

자영업이란 걸 해 본 적이 없다. 서점 유통이나 출판이라는 개념조차 모르고 시작한 책방이다. 그저 ‘좋아하는 책을 갖다 놓고 팔면 되겠지.’ 딱 거기까지 생각하고 시작한 책방이다. 공모사업이 있는 줄도 모르고, 모든 건 자비로 했다. 포스터 하나도 제작하려면 헤맸다. 정보공유가 필수인데, 맹목적으로 시작한 책방이다. 

전직 기자인 강시영 씨는 자신이 나고 자란 제주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환경 전문기자로 방향을 틀었는지도 모른다. 강시영 씨는 책으로 제주의 자연유산이나 문화유산, 제주의 가치를 알리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1년 동안은 꾸준히 전문가를 모시고 토크했다. 작가분들도 계시지만 분야별로 제주와 관련된 일을 하는 분들을 모셨다. 예를 들어 제주의 새에 관해서라면 김완병 박사님을 모셨고, 물에 관해서는 제주 지하수연구센터장인 박원배 박사님을 모셨다. 이처럼 전문가를 모시고 분야별로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는 식의 토크였다. 밭담이나 제주 신화 등도 모두 책방에서 만든 네트워크를 이용했다. 모두 주변에서 발 벗고 책방을 빛나는 공간으로 만들어주셨다. 

이렇게 주변 도움으로 1년을 이끌어 오면서 인터뷰 책방은 사회적 가치 실현을 위한 네트워크에 진입했다. 육성과정부터 시작하여 작년 11월 말 사회적기업가 육성사업 창업팀에 최종 선정돼 협약을 맺고,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자연스레 부부에겐 미션이 주어졌다. 이제까지 해오던 제주 자연유산의 가치를 알리는 관련 서적인 대중서(大衆書)를 만들어내고, 또 그것을 지역민들과 관광객들에게 알리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이다. 미션은 주어졌고, 부부는 지금 미션 수행 중이다.

글은 그 어떤 것보다 힘이 세다. 헤리엇 비처 스토의 “엉클 톰스 캐빈”은 어떤가? 1862년 링컨은 스토 부인을 만나 “이렇게 자그마한 여인이 그토록 큰 전쟁을 일으킨 책을 썼다는 거요?”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 하나가 남북전쟁을 일으켰고, 노예해방까지 이뤄냈다.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은 또 어떤가. 살충제의 대명사인 디디티는 1942년 초에 등장하며 제2차 세계대전 때 열대지방에서 질병을 옮기는 곤충 박멸에 사용되었다. 1944년 몬산토가 생산에 뛰어들며 디디티는 지구촌 곳곳에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디디티 사용량이 증가하면서 동물의 체내에 축적된 화학 물질은 불임과 성장력 저하, 면역력 파괴,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964년,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이 출판됐다. 이 책에서는 디디티가 생태계를 참혹하게 파괴한다는 것과 인류에게 미치는 잠재적 영향을 적나라하게 고발했다. 파장은 컸다. 대부분 국가에서 디디티 사용을 금지한 것이다. 노예해방도 디디티 사용 금지도 모두 글의 힘이었다. 글은 부부가 추구하는 꿈 역시 이룰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2020년 12월 ‘깊이 보는 서점 인터뷰  interview’에서는 (사)제주환경문화원이 마련한 제1회 제주환경 포럼이 열렸다. 이 포럼에서 제주도 세계유산본부 고정군 박사는 “앞으로 50년, 100년 후까지 한라산의 가치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관리역량을 높이고 체계적인 실행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사진 제공=‘깊이 보는 서점 인터뷰  interview’ ⓒ제주의소리

“디어 마이 호근동”
전직 기자인 책방지기 강시영 씨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2020년 2월, 강시영 씨는 제주의 환경, 문화의 중요성과 가치에 주목하면서 자연·인문자원의 가치 제고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과 도민의 문화 향유,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뜻있는 인사들과 법인 설립의 뜻을 모았다. 그리고 사단법인 제주 환경문화원을 공식 출범했다. 이제 강시영 씨는 (사)제주 환경문화원장으로서 농부로서 책방지기로서 바쁠 수밖에 없다. 책방 운영은 오롯이 현순안 씨 몫이다. 책방에서는 현순안 씨를 도와 지인인 유영심 씨가 함께 일하고 있다. 

얼마 전, 책방 인터뷰에서는 마을 어르신들의 삶을 그림과 스토리로 엮은 책 “디어 마이 호근동”을 출판했다. 코로나19로 어르신들의 발이 묶였다. 이 사실이 안타까웠던 현순안 씨는 호근동의 어르신들을 모셨다. 할머니 네 분과 할아버지 두 분이 모이셨다. 평생 색연필을 잡아본 적조차 없으신 분들이다. 처음엔 간단하게 그립엽서나 책갈피 정도를 생각했다. 하지만 어르신들껜 이조차도 막막했다. 10회 정도 진행하면서 길이 보였다. 살아온 이야기가 쏟아지기 시작하며 그림에도 스토리가 들어앉았다. 그러면서 의도하지 않았던 책을 만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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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호근동”의 저자인 어르신들이 ‘나의 삶, 나의 마을’ 원화 전시회에 곱게 차려입고 나오셨다. 사진 제공=‘깊이 보는 서점 인터뷰  interview’  ⓒ제주의소리

색연필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어르신들의 그림은 참 신선했다. 대상을 보면서 따라 그린 게 아니라 평생 봐오던 것들을 이미지화시켰기 때문이다. 같은 마을에서 80년 이상을 같이 지낸 분들이지만 그림은 모두 달랐다. 꽃 가꾸는 걸 좋아하는 할머니는 꽃을 그렸다. 삶에 쫓길 땐 좋아하는 꽃조차 볼 여유가 없었다. 구순을 앞둔 지금, 우리를 가장 위협하는 코로나19는 경로당으로 가는 발길을 붙잡았다. 그러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이 같은 기회를 주었다. 그렇게 어르신들의 그림에 이야기를 덧붙여 책방지기와 유영심 씨는 스토리를 만들었다. 어르신들의 생활사가 책으로 탄생한 순간이다. 아직 배냇저고리조차 입지 못한 책을 받고 어르신들은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눈가에 물기 어린 모습이 눈앞에 훤히 그려졌다. 

유영심 씨에 따르면, 색연필과 도화지를 드리면서 어르신들께 아무거나 편하게 그리도록 했다고 한다. ‘편하게’, ‘아무거나’, 이는 참 묘한 어휘다. 차라리 무얼 그리라고 대상을 주는 게 낫지 오히려 더 막막하다. 늘 봐오던 콩잎이나 풀잎, 양하꽃이 어떤 색깔인지는 안다. 그런데도 색깔을 선택하고 그리자니 어르신들껜 어려운 일이었다. 어떻게 하면 날것 그대로를 상하지 않게 꾸밀까? 지도 선생님은 최소한의 방법을 전하며 시범을 보였다. 비로소 ‘이걸 그릴까, 저걸 그릴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들이 봇물 터지듯 터졌다.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현순안 씨와 유영심 씨는 어르신들의 그림에 든 배경을 여쭈었다. 어머니 세대인 어르신들의 삶을 지켜봐 왔기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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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이상을 호근동에서 살아오신 어르신들이 직접 그리고 이야기를 담아 출판한 책 “디어 마이 호근동”은 그동안 가슴에 쌓였던 응어리며 아픔을 치유하는 힘이 될 것이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조금 더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없을까. 어르신들의 삶을 손녀 세대가 바라보면 어떨까. 고민 끝에 관점 즉 관찰자를 20대 손녀로 바꿨다. 앞이 환해졌다. 그렇게 20대 손녀가 보는 시각에서 질문하고, 이야기도 나누면서 나온 스토리가 책 속의 이야기다. 

강시영·현순안 부부가 고향에 와서 책방을 하지 않았다면 이 책은 태어날 수 있었을까. 이 한 권의 출판만으로도 책방 인터뷰는 존재가치를 알린 셈이다. 삶의 의미를 고향 어르신들께 안겨드린 것이다. 우리에겐 종종 우연이 찾아온다. 하지만 이유 없는 우연은 없다. 고향에 와서 80년 이상을 그곳에 살아온 어르신들의 책을 출판했다는 건 나를 나고 자라게 해 준 고향에 대한 은혜를 갚음이다. 

평생 손에서 놓지 않았던 골갱이질하듯이 색연필을 잡는다면 그야말로 현란한 그림을 그릴 것이다. 글도 일필휘지로 갈겨댈 것이다. 하지만 골갱이와 색연필은 달랐다. 평생을 일만 해 오신 어르신들은 꿈에서도 그려보지 못한 색연필을 잡았다. 그 색연필로 가슴에 묻어두었던 아픔을 치유할 수 있었다. 책방 인터뷰가 출판한 “디어 마이 호근동”이 명의인 셈이다. 책방에서는 어르신들의 원화로 작은 전시회도 열었다. 꿈엔들 당신들의 그림이 전시된다고 생각하셨을까. 이미 세상을 뜨신 나의 어머니가 겹치며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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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골갱이만 잡던 손으로 처음 잡는 색연필이다. 그래도 요즘 아이들보다 반듯하게 잡으셨다. 꼭 내 어머니 손 같다. 사진 제공 = ‘깊이 보는 서점 인터뷰  interview’ ⓒ제주의소리

“지인 독자와의 인연”
인연이란 참 묘하다. 책방지기를 돕는 유영심 씨도 처음엔 손님이었다. 고향이 같은 지인이라고 할지라도 손님이었던 유영심 씨는 책방에 드나들며 책방 인터뷰만의 가치를 발견했다. 그렇다고 유영심 씨가 책방에서 진행하는 모든 프로그램에 참여한 것은 아니다. 비록 몇 번이지만 프로그램에 참여하다 보니 단지 일회성이 아니라 일관성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더 눈여겨보게 되었다. 토크를 듣다 보니 제주도의 지형이나 생물, 지질, 생태, 환경 등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도민으로서 제주도를 말하라면 무얼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을 되새기는 시간이 되었다. 

사실 이전부터 이런 주제들, 다시 말하면 진짜 제주를 알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 가야 알 수 있는지 몰랐다. 그런데 가까이에 있었다. 지인이 운영하는 책방 인터뷰에서 지역 전문가를 모시고 자신이 늘 목말라하던 주제에 대해 토크하고 있었다. 밭담 다우는 분이 토크할 때는 입이 절로 벌어졌다. 전문분야에 있는 학자들이 책방 인터뷰와 함께 제주의 가치를 알리고 보존하는데 함께하고 계신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런 프로그램이야말로 너무나 소중하고 값진 것이라는 울림이 왔다. 책방 인터뷰에서 특별한 기획을 해서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서 가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만들고 있었다. 

프로그램 외에도 유영심 씨가 평소 관심 있었던 오름에 관한 책이나 소설도 있었다. 오래전에 읽었지만 이제 기억조차 희미해진 그 책들, 다시 읽고 싶은 책들도 이곳에 다 있었다. 유영심 씨가 보는 책방 인터뷰는 존재 자체로 서귀포 지역 사회에서 의미 있는 공간이었다. 그렇게 책방에서 진행되는 일들을 보면서 과정도 결과도 뿌듯함을 알 것 같았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약 83㎡의 ‘깊이 보는 서점 인터뷰  interview’는 사방이 탁 트여 있어 마음이 편안해진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이 책을 추천합니다”
손님은 자신이 원하는 책도 있지만, 추천을 원할 때도 있다. 그렇다면 책방 인터뷰에서는 어떤 책을 추천할까? 이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본인이 읽을 책이면 취향이 있겠지만 선물이라면 추천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취향을 모르는 경우 추천하는 사람도 애매하다. 딱히 취향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유영심 씨는 주로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인 “아침의 피아노(저자 김진명, 출판 한겨레)”를 추천한다. 김진영의 첫 산문집이자 유고집인 “아침의 피아노”는 작가가 투병 생활 중 쓴 글로 아포리즘이 가득하다. 여기엔 작가의 모든 생이 들어 있다.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진솔하다. 우리가 놓치고 사는 것을 일깨워주기도 한다. 추천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좀 더 쉬운 책을 원할 때는 “아몬드(저자 손원평, 출판 창비)”를 추천한다. 

하지만 최근 유영심 씨가 진짜로 추천하고 싶은 책은 장편소설 “파친코(저자 이민진, 역자 이미정, 출판 문학사상)”이다. 한국계 1.5세인 미국 작가 이민진의 장편소설 “파친코”는 내국인이면서 끝내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던 재일동포들의 처절한 생애를 담아낸 작품이다. 

1.5세 한국계라면 아무리 작가라 해도 한국의 역사나 정서를 잘 모를 거라고 우리는 예상한다. 그런데 아니다. 책을 펼치면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빠져드는 한국의 정서가 함께한다. 휙 휙, 숨 가쁘게 전개되는 사건과 생생한 묘사는 내가 마치 책 속의 그 시대를 사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작가는 흐름에 따라 울렸다 웃겼다 제멋대로 독자의 감성을 뒤흔든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우리보다 더 적나라하게 한국의 정서를 드러낸다. 문득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가 생각났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발 닿은 곳에 뿌리를 내리는 한국인들의 이야기는 애플 TV+에서 드라마로 제작되고 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앉아만 있어도 절로 힐링이 될 것 같은 탁자 옆으로 파키라와 드라세나류의 관엽식물이 분위기를 더해주고 있다. 사진=고봉선. ⓒ제주의소리

“깊이 보는 서점 인터뷰 interview”는
제주의 문화유산, 지질, 환경 등을 알고 싶지 않으세요? 온종일 앉아 있어도 물리지 않을 것 같은 곳, 책방 인터뷰를 찾아가 보세요. 한라산 혹은 바다를 마주하여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제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기회가 됩니다. 제주의 가치를 알리는 주제도 파헤칠 수 있습니다. 나만의 정서 또한 맘껏 누릴 수 있습니다. 

찾아가는 길 : 서귀포시 중산간동로 8353 2F
영업시간 : 화~토 11:00~19:00(일, 월 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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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봉선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나 식물과 함께 자랐다. 지금은 허름한 고향 시골집에서 꽃과 함께, 독서지도사를 하며 아이들과 지내고 있다. 한국해양아동문화연구소 운영위원, 애월문학회 회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독립언론 [제주의소리]에서 [고봉선의 마을 책방을 찾아書]를 통해 격주로 독자들을 만난다. 마을 책방에 깃든 사람과 책 이야기가 소개된다.저서로는 시집 ‘詩를 먹고 자라는 식물원’, 꽃과 함께 사는 이야기 ‘詩가 사는 기행식물원1, 2, 3, 4’, 동화집 ‘지우개’가 있다. 식물원 시리즈로 전자도서관에 식물원을 꾸미는 게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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