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예술칼럼, Peace Art Column] (51) 토미야마 카즈미

제주도는 평화의 섬입니다. 항쟁과 학살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주4.3이 그렇듯이 비극적 전쟁을 겪은 오키나와, 2.28 이래 40년간 독재체제를 겪어온 타이완도, 우산혁명으로 알려진 홍콩도 예술을 통해 평화를 갈구하는 ‘평화예술’이 역사와 함께 현실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들 네 나라 예술가들이 연대해 평화예술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들의 평화예술운동에 대한 창작과 비평, 이론과 실천의 공진화(共進化)도 매우 중요합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네 나라 예술가들의 활동을 ‘평화예술칼럼(Peace Art Column)’을 통해 매주 소개합니다. 필자 국적에 따른 언어가 제각각 달라 영어 일어 중국어 번역 원고도 함께 게재합니다. [편집자 글]

도쿄 올림픽에 대해 지지하는 통신사가 4월에 실시한 일본 국내 여론 조사에서는 39.7%가 중지, 25.7%가 재연기라고 회답했다. 70% 가까이가 개최를 바라지 않지만, 그래도 일본 정부는 코로나19가 만연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국내 각지에서 121일간 성화 봉송을 전개하고 있다. 오키나와에서도 5월 1, 2일 이틀간 200여 명이 100m씩 달려 성화를 봉송하는 퍼포먼스가 벌어졌다. 일본 조직위원회는 희망의 길을 이어가자는 캐치프레이즈를 한다. 그러나 이 성화는 정말로 ‘희망’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1964년 도쿄 올림픽이 열렸던 때만 해도 성화 봉송은 희망의 상징이었다. 1964년 도쿄올림픽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이었던 일본이 평화국가로 되살아나고 기적적인 경제성장과 부흥을 이뤄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얻었음을 보여주기 위한 국가위신을 건 민관 프로젝트였다. 더욱이 이 도쿄 대회는 사상 처음으로 아시아가 개최국이 된 올림픽이었고 일본이 아시아 지도자로서의 자신감을 회복하는 의미에서도 큰 의미를 가졌을 것이다. 이때도 성화는 그리스 올림피아에서 채화돼 세계 각국을 릴레이됐으며 홍콩 대만을 거쳐 오키나와에 도착했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성화를 환영했다.

1964년 9월 오키나와에서의 도쿄 올림픽 성화 봉송(오키나와현 공문서관 소장).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1964년 9월 오키나와에서의 도쿄 올림픽 성화 봉송(오키나와현 공문서관 소장).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1964년 9월 오키나와에서의 도쿄 올림픽 성화 봉송(오키나와현 공문서관 소장).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1964년 9월 오키나와에서의 도쿄 올림픽 성화 봉송(오키나와현 공문서관 소장).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1964년 9월 오키나와에서의 도쿄 올림픽 성화 봉송(오키나와현 공문서관 소장).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1964년 9월 오키나와에서의 도쿄 올림픽 성화 봉송(오키나와현 공문서관 소장). 사진=토미야마 카즈미.

오키나와의 이 열광에는 독특한 이유가 있다. 1964년 당시 오키나와의 시정권은 미국에 있었다. 1945년 점령 이후 미군의 가혹한 지배에 시달리던 오키나와 주민들은 미국 통치를 이민족 지배라고 칭하며 같은 민족인 일본 밑으로 돌아가면 부조리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동포인 오키나와와 일본이 미국에 의해 분단되어 있다는 인식이다. 이리하여 ‘일본 복귀’는 오키나와 주민의 열망이 되었지만, 전략상 중요하고도 편리한 이 섬을 미국이 포기할 리는 없었다. 현실이 이처럼 절망적이었기에 사람들은 오키나와에 올림픽 성화를 맞아 오키나와 청소년들이 일장기를 차고 뛰는 모습에 열광했다고 할 수 있다. 미군은 일본기를 자유롭게 게양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지만 주민들은 이때다 하고 무수한 일장기를 성화봉송 길가에 펄럭였다. 당시 언론은 오키나와 전체가 '조국과의 일체감'에 도취됐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때 나카야 고키치라는 26세의 청년은 이렇게 수기를 쓰고 있었다.

“연도를 가득 메우고, 깃발 없는 자는 소매를 흔들고, 소매 없는 자는 몸뚱이를 흔들고, 흔들고 흔들며 하마터면 내 정신까지 떨칠 수 있는 투명하고 단순한 얼굴의 무리들, 무리들!” 
- 나카야, <이름이여, 일어나 걸어라>에서

일장기에 뿌리쳐지는 ‘자신의 정신’이란, ‘오키나와인의 아이덴티티’로 치환해도 좋다. 나카야는 가난 때문에 내재한 오키나와인의 의존심이 일본에 병합돼 식민지화된 과정에서 더욱 뿌리 깊은 열등감으로 배양됐다고 보았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이 콤플렉스에 밤낮으로 시달리다 주술에 묶인 나머지 마침내 ‘오키나와인 포기 = 일본 복귀 = 일본인 선언’으로 일어섰던 것이다. 이 ‘비 오키나와인 = 일본인 선언’이 운동으로까지 고조되면서 오늘의 조국 복귀 운동을 현상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오키나와와 일본을 ‘이족(異族)’이라고 판단하는 나카야와 같은 언설은 지금도 오키나와에서는 이단이다. 무엇이 나카야를 이 지경으로 이끌었을까? 1939년생인 나카야는 6살 때 오키나와 전투의 참상을 경험했고 1959년 초등학교에서 폭발해 불에 탄 미국 여객기의 잿더미에서 자신의 조카가 '막대기처럼 타버린' 것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았다. 그 후 일본 복귀운동에 투신해 일본 본토 학생 운동가들과의 연대를 경험하고 마르크스주의를 배우면서도 그가 봉착한 것은 일본인이라고 하기엔 너무 오키나와적인 자신이었다. 1964년 나카야는 친미 정권에 항의하는 시위대와 함께 류큐 입법원 의장을 점거했다가 고소당했다. 1966년 6월 26세의 나이로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쟁과 점령의 폭력에 갉아 먹힌 청년은 절망 때문에 자살한 것인가. 대답 없는 질문을 던지면서도 나는 나카야가 원하는 말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는 미국에 종속되어 오키나와를 내미는 일본이나, 일장기를 뿌리는 오키나와인을 단지 단죄한 것만이 아니었다. ‘대중’이 자신의 소망을 정치 목표로 삼은 ‘조국 복귀’로밖에 언어화할 수 없다고 해도, 그 심층에는 자신들의 식민지화된 심성을 해방시키고 싶은 욕망임을 그는 감수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대중의 소원, 즉 사람이 사람을 차별받고, 사람이 사람을 비하하는 일이 없는 자유로운 인간관계의 창조를 실로 실현하는 투쟁은, 반드시 이 운동(필자 주: 일본복귀운동)을 통해서는 가능이 약속될 것 같지 않다. 좀 더 깊은 내용을 가진 또 다른 새로운 운동이 하루빨리 생겨나기를!

나카야가 말하는 ‘새로운 운동’이란, 오키나와인의 정신에 입각한 탈식민지화 운동을 말하는 것이라고 다시 읽고 싶다. 나카야는 그것을, 오키나와인 뿐만이 아니라 일본인도 해방하는 것이라고 꿈을 꾸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계속되는 식민주의 속에서 해방의 길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나카야가 쓴 대로 일본 복귀라는 ‘민족통일’은 오키나와에 해방을 가져오지 않고, 미·일 군사동맹의 질곡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성화 봉송의 공허한 축제 옆에서 나는 나카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고 지금도 동아시아의 여러 곳에 있는 국가 폭력 때문에 정신과 육체의 갈림길에 서 있는 젊은이들을 떠올린다.

# 토미야마 카즈미

토미야마 카즈미(豊見山和美 TOMIYAMA Kazumi) 씨는 도쿄 소재 추오대학교와 류큐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며, 영국 런던대학교 아카이브연구 석사과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오키나와현립공문서관의 아키비스트로 일하면서, 오키나와 전후사를 중심으로 문화평론을 하고 있습니다.


国旗を振ること―解放と呪縛のはざま
豊見山和美

東京オリンピックについて時事通信社が4月に行った日本国内世論調査では、39.7%が中止、25.7%が再延期と回答した。7割近くが開催を望んでいないのだが、それでも日本政府は、COVID19が蔓延する状況にもかかわらず、国内各地で121日間にわたって聖火リレーを展開している。沖縄でも5月1日と2日の二日間、約200人がほんの100mずつ走って聖火をリレーするパフォーマンスが行われた。日本の組織委員会は「希望の道を、つなごう」というキャッチフレーズを躍らせる。しかし、この聖火はほんとうに<希望>に向かっているのだろうか? 

前回の東京オリンピックが開催された1964年には、聖火リレーはまさに希望の象徴だった。1964年東京五輪は、第二次世界大戦の敗戦国だった日本が平和国家に再生し、奇跡的な経済成長と復興を成し遂げ、国際社会での信頼を得たことを示すための、国家の威信をかけた官民挙げてのプロジェクトだった。さらにこの東京大会は、史上初めてアジアが開催国となったオリンピックであり、日本がアジアのリーダーとしての自信を回復する意味においても多大な意味を持っていただろう。この時も聖火はギリシアのオリンピアで採火され、世界各国をリレーされ、香港、台湾を経て沖縄に到着した。沖縄の人々は熱狂的に聖火を歓迎した。

* 1964年9月 沖縄での東京五輪聖火リレー(沖縄県公文書館所蔵)

沖縄のこの熱狂には独特の理由がある。1964年当時、沖縄の施政権はアメリカにあった。1945年の占領以来、米軍の苛烈な支配に苦しむ沖縄住民は、アメリカ統治を「異民族支配」と称し、同じ民族である日本の下に戻れば不条理から解放されるという希望を抱いた。同胞たる沖縄と日本がアメリカによって分断されているという認識だ。かくて<日本復帰>は沖縄住民の熱望となったが、戦略上重要かつ便利なこの島をアメリカが手放すわけはなかった。現実がこのように絶望的だったからこそ、人々は沖縄に東京オリンピックの聖火を迎え、沖縄の青少年らが日の丸のゼッケンを身に着けて走る姿に熱狂したと言えよう。米軍は日本国旗の自由掲揚を厳しく禁じていたが、住民はここぞとばかりに無数の日の丸を聖火リレーの沿道にはためかせた。当時のメディアは、沖縄中が「祖国との一体感」に酔いしれたと報じている。

しかしこの時、中屋幸吉という26歳の青年は次のように手記を綴っていた。
―沿道を埋めつくし、旗なき者は袖をふり、袖なき者は胴をふり、ふってふって振りまくり、あやうく、自分の精神までふるいおとしかねない透明で単純な顔のむれ、むれ!(中屋『名前よ立って歩け』より)

日の丸に振り落とされる「自分の精神」とは、<沖縄人のアイデンティティ>と置き換えてよい。中屋は、貧困ゆえに内在した沖縄人の依存心が、日本に併合されて植民地化された過程でさらに根深い劣等感へ培養されたと考えた。
―沖縄の人々は、このコンプレックスに朝な夕なに悩まされ、呪縛されたあまり、ついに沖縄人放棄=日本復帰=日本人宣言に立ち上がったのである。この非沖縄人=日本人宣言が運動にまで高まって、今日の祖国復帰運動を現象せしめているのだ。

沖縄と日本を<異族>と断ずる中屋のような言説は、いまも沖縄では異端である。ここに至るまでの中屋の思索の軌跡はいかなるものだったか。死後に友人たちが上梓した遺稿集だけが、中屋の心に近づく唯一のよすがだ。1939年生まれの中屋は6歳で沖縄戦の悲惨を体験し、1959年には墜落した米軍機が小学校で爆発炎上し、灰の中から「棒切れみたいな焼死体」で発見された姪の姿に大きな衝撃を受けた。その後、日本復帰運動に身を投じ、日本本土の学生活動家たちとの連帯を経験し、マルクス主義を学びながらも、彼が逢着したのは「日本人というには、あまりにオキナワ的なボク」だった。1964年、中屋は親米政権に抗議するデモ隊とともに琉球立法院の議場を占拠して告訴された。自ら命を絶ったのは1966年6月、26歳の短い生涯だった。

戦争と占領の暴力に蝕まれた青年は絶望ゆえに自死したのか。答えのない問いを投げながらも、私は中屋の希望の言葉を見出そうと努める。彼はアメリカに従属して沖縄を差し出す日本や、日の丸を振りまくる沖縄人をただ断罪しただけではなかった。<大衆>が自らの願いを、政治目標としての<祖国復帰>という風にしか言語化できないとしても、その深層にあるのは自分らの植民地化された心性を解放したいという欲望であることを彼は感受していた。

―そして、これらの大衆の願い(人が人に差別され、人が人に卑下することのない自由な人間関係の創造)を、真に実現する闘いは、必ずしもこの運動[筆者注:日本復帰運動]を通しては、可能が約束されそうもない。もっと、深い内容をもった別の、新たな運動が一日も早く、生れんことを!」

中屋の言う「新たな運動」とは、沖縄人の精神に立脚した脱植民地化のムーブメントのことだと読み直したい。中屋はそれを、沖縄人だけでなく日本人をも解放するものとして夢想したように思う。しかし、継続する植民地主義の中で解放への道はまだ見えない。中屋が書いた通り日本復帰という<民族統一>は沖縄に解放をもたらさず、日米軍事同盟の桎梏を背負い続けている。聖火リレーの虚ろな祝祭の傍らで、私は中屋の声に耳を澄まし、そして今も東アジアのさまざまな場所にいる、国家暴力のために精神と肉体の瀬戸際に立っている若者たちを思い浮かべる


Waving a National flag : liberation or spellbound? 
TOMIYAMA Kazumi

In April, Jiji Press conducted a poll in Japan regarding the Tokyo Olympics, 39.7% of the respondents said that the games should be cancelled and 25.7% said that they should be rescheduled. Nearly 70% of the respondents do not want the games to be held, yet the Japanese government has been conducting a 121-day torch relay around the country, despite the spread of COVID19. There was also a two-day performance in Okinawa on 1 and 2 May, where around 200 people ran just 100 metres each to relay the torch. The catchphrase given to the torch relay by the JOC is "Let's connect the road of hope". But is this torch really heading to 'hope'?

In 1964, when the last Tokyo Olympics were held, the torch relay was a true symbol of hope. The 1964 Tokyo Olympics was a project of national prestige to demonstrate that Japan, a defeated nation in the WW2, had rebuilt itself into a peaceful nation, achieved miraculous economic growth and reconstruction, and gained confidence in the international community. Furthermore, the Tokyo Olympics were the first ever Olympic Games to be hosted by an Asian country, and would have been of great significance in restoring Japan's confidence as a leader in Asia. At that time, the torch was lit in Olympia, Greece, and was relayed around the world, passing through Hong Kong and Taiwan before arriving in Okinawa. Okinawa welcomed the torch with great enthusiasm.
There is a particular reason for this enthusiasm in Okinawa: in 1964, the US was in control of the island, and the Okinawans, who had suffered the brunt of US military rule since the occupation in 1945, called US rule "alien domination" and hoped that a return to Japan, a nation of their own, would free them from this absurdity. The perception was that their fellow Okinawans and Japan were being divided by the US. Thus, the "reversion to Japan" became the aspiration of the Okinawans, but the US would not give up this strategically important and convenient island. It was precisely because the reality was so desperate that people were so excited to see the Tokyo Olympic torch arrive in Okinawa and to see Okinawan youths running in uniforms with the symbol of Japanese flag on them. Although the US military strictly forbade the free display of the Japanese flag, residents took the opportunity to display countless Japanese flags along the torch relay route. The media at the time reported that the whole of Okinawa was intoxicated with a "sense of unity with the motherland".

At this time, however, a young man named NAKAYA Kokichi wrote the following,

“The streets were filled, and those without flags waved their sleeves, and those without sleeves waved their bodies, and waved and waved. It's a crowd with transparent, simple faces that could easily sift through your own spirit!” (Nakaya "Name, Stand Up and Walk")

The "own spirit" that is shaken off by the Japanese flag can be put in other words, the "Okinawan identity". Nakaya believed that the inherent dependency of the Okinawans due to poverty was cultivated into a deeper-rooted sense of inferiority during the process of colonization by Japan. He also wrote,

“The Okinawans were so tormented and spellbound by this complex that they finally abandoned being Okinawans = hope reversion to Japan =the declaration of being Japanese. This declaration has grown into a movement, and given rise to the phenomenon we know today as the homeland return movement.”

His view of Okinawa and Japan, defining them as 'different peoples' is still a heresy in Okinawa. What led Nakaya to this point in his contemplation? Born in 1939, Nakaya experienced the horrors of the Battle of Okinawa at the age of six, and in 1959 he was shocked to see his niece found "burnt like a stick" in the ashes of a crashed US plane that exploded and burned at a primary school. He later threw himself into the movement for the reversion to Japan, experienced solidarity with student activists on the Japan mainland, and studied Marxism. In the end, he found that "I am who was too Okinawan to be Japanese." In 1964, Nakaya was charged with occupying the floor of the Ryukyu Legislature with demonstrators protesting against the pro-US government. In June 1966, at the age of 26, he took his own life.

Did this young man, consumed by the violence of war and occupation, commit suicide out of despair? While posing this unanswerable question, I try to find Nakaya's words of hope. He did not only condemn Japan for subordinating Okinawa to the US and the Okinawans for waving the Japanese flag around. He sensed that even if the "masses" could only verbalize their wish as a political goal of "reversion to the motherland", what lay deep in their hearts was the desire to liberate their colonized minds.

“And the struggle for the people’s aspirations (the creation of free human relations in which people are not discriminated against and people and are not demeaned) is not necessarily going to be possible through this movement to return to Japan. I do hope that a new movement with a deeper content will be born soon!”

"New movement" refers to a decolonization movement based on the Okinawan spirit. Nakaya seems to have dreamed of a movement that would liberate not only the Okinawans but also the Japanese. However, the road to liberation under the continuing colonialism is not yet clear. As Nakaya wrote, the "national unity" (the reversion to Japan) has not brought liberation to Okinawa, which continues to bear the fetters of the Japan-US military alliance. Beside the empty festivities of the torch relay, I listen to Nakaya's voice and think of the young people who are still standing on the brink, spiritually and physically, of state violence in many places of East 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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