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199) 나종석, '대동민주 유학과 21세기 실학-한국민주주의론의 재정립' , 도서출판 b, 2017.

나종석, '대동민주 유학과 21세기 실학-한국민주주의론의 재정립' , 도서출판 b, 2017. 출처=알라딘.

1. 문화변용과 철학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타고, BTS가 빌보드 차트 1위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유튜브에는 소위 ‘국뽕’ 콘텐츠가 넘쳐난다. 그런 유튜브를 보고 있노라면 한국은 이제 선진국이 되었으며, 한국의 문화 콘텐츠가 세계를 선도하는 것 같아 기분이 우쭐해진다. 코로나 블루로 우울한 마음을 달래기에 그리 나쁘지 않다. 그러나 ‘국뽕’에 취해 유튜브의 AI 알고리듬이 권하는 동영상을 계속해서 보다보면 어느새 한국에서 외국으로 건너간 가물치가 그 나라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에까지 국가적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그런 지경에 이르면 올바로 평가해야 할 문화산업 분야의 성취도 맑은 눈으로 보기 어렵게 된다. 그러나 한국의 영화, 드라마, 웹툰, 게임, 가요 등이 글로벌 시장에서 훌륭한 성취를 보여주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자부심을 느껴도 좋다고 생각한다. 나름 그 분야의 문제들이 없지는 않겠으나 적어도 우리의 문화산업이 외국의 것들을 모방하는 수준을 넘어서 새로운 규범을 만들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많은 모방이 행해졌을 것이고, ‘우리의 것’을 만들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과정은 모든 문화 변용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학문의 발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문화에 속한 학문을 받아들이고 자기 문화의 맥락 속에서 그것을 재해석하고 재서술하는 가운데 독창적인 학문적 관점이 만들어진다. 우리의 근대학문은 BTS와 같은 스타를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꾸준히 전진해 왔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연구자들의 고된 노력을 통해 동서양의 많은 고전들이 번역되었다. 외국의 학문을 수입하는 데 그친다는 비난 속에서도 외국 학자들의 주장을 우리의 맥락에서 재해석하고 재서술하는 시도가 이루어져 왔다. 

철학에 국한해서 말한다면 해외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는 학자들이 많이 늘어나는 추세이고, 자신의 이론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학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철학’이라는 문화적 영역에서 ‘우리의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적절한 문화 변용을 위한 충분한 토양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 논의할 담론의 영역이 형성되어야 한다. 학문 공동체에서 지속적으로 논의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뛰어난 이론이라 하더라도 누군가의 독백으로 끝나고 학문의 발전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삶의 맥락에서 발생하므로 문제를 설정한다는 것 자체가 고유한 해석학적 지평을 마련하는 것이며 문화 변용의 토대를 만드는 것이다. 둘째 그러한 해석학적 지평 위에서 다양한 이론들의 재해석과 재서술을 통해 문제 상황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오늘날 사회철학은 자본주의 시스템이 가져온 경제적 양극화의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서구의 근대가 만들어낸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경제적 계급에 의해 세습되는 새로운 신분제를 만들어냄으로서 불평등을 제도화하고 소외 계층의 경제적, 정치적 자유를 박탈한다. 그와 같은 글로벌한 사회 문제가 한국의 맥락에서 논의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특수한 문제들이 함께 고려될 필요가 있다. 산업재해 사망률이 다른 나라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높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출산률이 세계에서 가장 낮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가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서구적 가치들이 도움이 되는지 검토해야 할 것이다. 그런 작업에는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전승된 세계관에 대한 재해석이 요구될 것이다.  

2. 우리를 구성하는 것을 재서술하기

나종석의 '대동민주 유학과 21세기 실학-한국민주주의론의 재정립'(도서출판 b, 2017)은 한국의 사회철학 분야에서 주목해 볼 만한 중요한 책이다. 1055쪽에 달하는 이 책은 한국의 가족, 시민사회, 민족주의, 유교적 정치문화 등을 민주주의의 문제와 결부시켜 총16장으로 구성하여 서술한 역작이다. 제목이 시사하듯이 저자의 주장은 유학의 핵심적인 가치인 ‘대동’을 한국민주주의를 재정립하기 위한 이론적 토대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런 주장이 한국철학 전공자가 아니라 독일에서 헤겔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평생 헤겔 연구자로 학문 활동을 했던 학자에 의해서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사회철학자로서 나종석은 한국사회의 민주주의가 발달할 수 있었던 정신사적 토양이 외부에서 이식된 서구의 이론이 아니라 한국의 유학 전통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시스템이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그 속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유롭고 자율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가 현실에서 작동하는 체제의 문제들을 이식된 서구의 이론이 올바로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칸트와 헤겔을 뒤로한 채 유학으로 눈을 돌린다. 예컨대 칸트의 법철학이 나온 1797년은 조선의 정조 말기에 해당하는데 당시 조선은 노비를 해방시키기 위한 첫걸음인 종모법을 법제화한 상태였던데 반해 칸트는 여전히 하인을 물건과 같이 취급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런 비교를 통해 나종석은 “서구중심주의적 사유 방식이 가정하는 단선적인 역사발전 도식에 따른 전근대사회의 야만성과 서구 근대사회의 문명 사이를 날카롭게 가르는 이원론적 대립 패러다임이 아무런 학문적 타당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506쪽)을 강조한다.

나종석은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서구적 근대의 이원론뿐 아니라 조선 후기 사회 변동의 역사를 이데올로기적으로만 접근하거나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동만으로 설명하려는 관점도 일면적이라고 비판한다. 거기에는 “유교적(성리학적) 민본주의가 안고 있었던 평등 이념 및 인본주의의 사회적 확산”(506쪽)이 근저에 있었다는 것이다. 유교적 민본주의란 공자가 실현하고자 한 천하위공의 대동사회의 이념을 뜻한다. 천하가 만인에게 속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이 군자가 될 수 있다는 공자의 사상에 기초한 유교적 대동 이념은 능력주의를 포함하기는 하지만 그 능력조차 천하의 공공성에 기여하는 관점에서만 정당화된다는 점에서 단순히 “멸사봉공이나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찌든 가족 이기주의”(515쪽)와는 거리가 멀다. 나종석은 이런 대동사회의 이념이 오늘날 우리를 구성하는 주요한 전승의 내용이며, 시민의 민주적 참여 문화의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인권이나 민주주의라는 관념이 서구에 어울리는 가치라는 인식을 극복해야 하며 “백성의 삶을 책임지지 못하는 정치지도자는 참다운 지도자일 수 없기에, 심각한 경우에는 그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해야 한다는 유교적 민본주의 이념에 바탕을 둔 역성혁명의 전통 없이 우리 사회의 시민 참여형 광장민주주의 정치 문화를 이해”(523쪽)할 수 없다고 말한다.

나종석은 대동 민주주의라는 역사적 전승이 허구적인 관념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대동계를 조직하여 대동사회를 구현하려는 이상을 가졌던 정여립으로부터 그것을 이어받아 대동사회론을 펼친 율곡 이이, 그런 이상을 계승했던 반계 유형원, 담헌 홍대용 그리고 정약용의 사상을 살피고, 그런 대동사회의 이념이 백성이 정치적 주체라는 자각으로 표출된 갑오농민전쟁을 거론하고 있다. 성리학의 경천애인 사상은 동학의 인내천 사상으로 이어지며, 그 바탕은 유교적 민본주의라는 것이다. 

저자의 전승에 대한 재서술은 일제 강점기의 지식인이었던 신채호와 박은식의 사상에 대한 재해석으로 이어진다. 이들이 당시 유행했던 사회진화론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한국의 독립을 동양평화라는 보편적 대의와 연결시켜 사유할 수 있었던 것도 유교적 대동사상이라는 정신적 자산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나종석은 신채호와 박은식이 “서구 근대식 국민국가 위주의 사유 방식을 넘어서서 조선의 독립을 세계평화 및 억압으로 고통 받는 모든 민족 및 민중의 해방이라는 관점으로까지 밀고 나갈 수 있었던 사유의 배경에는 유교적인 천하관과 대동적 이상의 지속적인 영향사가 존재”(566쪽)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나종석은 18세기 이후 오늘에 이르는 우리의 근현대사를 재규정할 기본적인 사유 패러다임은 “유교 전통의 민주적 변형과 민주주의의 유교적 전환의 이중 과정”(584쪽)이라고 요약한다.

천 페이지가 넘는 이 책의 내용을 여기서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어 필자의 생각에 문화적 변용이라는 우리의 주제와 잘 부합된다고 여겨지는 “제9장 조선 후기 대동세계 이상과 한국 민주주의 정신사적 조건”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해 보았다. 유교의 대동 이념이 민주주의와 잘 결합될 수 있다는 주장은 아마도 나종석만의 주장은 아닐 것이고, 유교적 민본주의의 이념이 조선 후기부터 갑오농민전쟁을 거쳐 오늘에 이어진다는 연구가 이 책에서만 전개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저자가 한국에서 철학을 하고자 하는 학자의 학문적 규범을 모범적으로 실천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저자의 대동 민주주의 이론은 아마도 더 정교하게 다듬어져야 할 것이고, 이미 수많은 비판을 받았겠지만 앞으로도 지속적인 비판을 견뎌야 할 것이다. 독일어로 헤겔을 읽던 학자가 한문을 익혀 공맹을 공부하고 한국의 근현대사를 연구하여 자기주장으로 연결시키는 일이 얼마나 많은 노고를 감수해야 하고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인지는 필자와 같이 게으른 사이비 철학자로서도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 이유선

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 철학박사
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