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시선] 일본 원전 오염수 방류 저지 위한 민간 차원의 국제 연대 필요

떡 한 접시

“떡 가게 이웃에 가난한 홀아비 사무라이와 어린 아들이 살고 있었다. 하루는 아이가 떡 가게에서 놀다 돌아왔는데 떡장수가 찾아와 떡 한 접시가 없어졌다며 돈을 달라고 사무라이에게 말했다. 사무라이는 ‘아무리 가난할망정 내 자식이 사무라이 자식인데 남의 가게에서 떡을 훔쳐 먹을리 만무하다’며 항변했지만 떡장수는 수긍하지 않았다. 이에 사무라이는 그 자리에서 어린 아들의 배를 갈라 떡을 먹지 않은 증거를 내보인 후 그 칼로 떡장수를 죽이고 자신도 할복 자결해 버린다.”

일본이 군국주의 시절, 그러니까 일왕이 태평양전쟁의 패배를 선언한 1945년까지 일본의 모든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사무라이 이야기다. 내용의 사실성 여부를 따지기에 앞서 제대로 머리가 박힌 사람이라면 황당한 서사적 인과관계에 결코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사소한 오해야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풀릴 수도 있고, 그만한 일에 진실이 굳이 밝혀지지 않아도 그만일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하잘것없는 오해를 집단 살인으로 되갚는 무지막지한 이야기가 명예를 죽고 사는 좌우명으로 삼는 무사도(武士道) 정신을 보여주는 미담으로 통하는가 보다.

이쑤시개

우리에게는 체면에 병적으로 집착한 사이코패스의 괴기스런 행동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일본에서는 이른바 ‘이름에 대한 기리(義理)’로서 목숨과도 같이 소중한 명예를 지키는 일로 간주된다. 일본어사전에 의하면 ‘기리’는 “올바른 도리이며 사람이 좇아야만 하는 길”을 뜻하면서 또한 “세상에 대한 변명 때문에 본의 아니게 하는 일”을 의미한다. 그래서 덕(德)이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인(仁)이나 도(道)의 발현이라면, 일본은 기리를 행하는 것에 달려있다. 이로 인해 우리가 성찰의 시선이 내부로 향한다면 일본인은 외부, 즉 타인에게 두게 된다는 것이다.

일본 문화의 특성을 예리하게 분석한 ‘국화와 칼’의 저자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인의 기리가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게 아니라 ‘기리를 모르는 인간’이라는 사회적 수치와 비난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단언한다. 본심이 아니라 체신에 치중하는 행동은 ‘보여주기’ 식 겉치레에 빠지기 쉽다. 굶주림에 굴복하지 않는 것을 중요한 행동원칙으로 삼는 사무라이의 스토이시즘(stoicism), 즉 견인주의(堅忍主義)가 대표적 사례다. 사무라이들은 먹을 것이 없어 배고파 죽을 지경일 때도 방금 식사를 끝낸 만족스러운 시늉으로 이쑤시개를 입에 물고 다녔다고 한다.  

부채

일본 영화에 단골 테마로 등장하는 사무라이의 할복(割腹) 의식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배를 가르고 자결하는 행위’는 점차 형식적으로 변질되면서, 결국 당사자에게 칼 대신 접이식 부채를 줘서 배를 긋는 시늉만 하게 만들고 다른 방식으로 처형을 한 후 할복으로 인정하고 공식 선포하는 경우가 흔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썰’은 전문(轉聞)일 뿐이다. 설사 사실일지라도 모든 경우에 적용하는 것은 ‘일반화의 오류’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세간의 시선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일본인의 의식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썰’인 것은 분명하다. 

일본의 원전 오염수 방류 전격적 결정과 이에 대한 우리 정부의 무기력한 대책 발표를 접하면서 모두가 한 번쯤은 들었을 이 사무라이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것 중 가장 위험한 물질인 방사능으로 범벅이 된 수백만 톤의 오염수를 인류 모두가 공유하는 생명의 원천이며 삶의 터전인 바다에 방류하기로 결정하면서 일본은 인접 국가들과 일체의 협의도 하지 않았단다. 쉽게 말해서 마을 사람 모두가 물을 길어다 먹는 마을 우물에 독극물을 왕창 풀겠다는 것인데 평소 “예의바른 민족”이라며 자찬하던 일본의 자부심은 온데간데없다. 

환경운동연합 바다위원회 활동가들이 지난해 11월 26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 정부의 방사능 오염수 해양 방류 계획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출처=오마이뉴스.

장물

원전 오염수 방류를 결정한 것에 대해 일본에 비난과 분노를 아무리 퍼부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모두가 공멸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바다에 쏟아 붇는 쪽을 선택했지만 방류보다 훨씬 안전한 다른 대안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오염수를 가열해서 기체로 만들어 공기 중으로 날리는 것과 오염수에 시멘트를 부어 고체로 만들어 보관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해양 방류로 결정한 것은 돈이 가장 싸게 먹히기 때문이란다. 또 다른 이유로 한 환경단체는 일본이 원전 사고에서 완전히 회복했음을 세계에 보여주고 싶은 의도가 숨어 있다고 지적한다. 

이웃국가들에겐 아예 안면을 몰수하던 태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름에 대한 기리’가 다른 나라들에 대해선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가장 공을 많이 들인 곳은 물론 미국일 것이다. 미국은 오히려 일본의 투명한 결정에 감사하다는 입장까지 공식 표명한 바 있다. 이어서 일본총리는 방류결정 직후 열린 미일정상회담에서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대만문제와 신장의 인권문제에 대해 이례적으로 미국의 입장을 옹호했다. 1905년 미국과 일본이 필리핀과 대한제국의 식민 지배를 사이좋게 나눠 먹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재판(再版)이 아닐까 싶다. 

강아지

‘탈(脫) 아시아’는 19세기 중후반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래 일본의 국가적 지상 과제였다. 하지만 본질은 외면한 채 서양의 눈치만 보는 것으로 해결하려 든다면 서구화가 아니라 서구의 애견(愛犬)으로 비웃음만 살 뿐이다. 선진국으로 인정받는 것은 다른 나라가 아니라 바로 일본 자신에 달려있다. 우리가 종량제 봉투를 사서 버리는 것처럼 자신의 집에서 발생한 쓰레기는 자신이 책임지고 처리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법. 기본적인 국가적 도리마저 제대로 지키지 않는 지금 일본의 모습을 보면 선진국은커녕 지구촌의 일원으로서 자격조차 있는지 의문이다.  

현재 일본정부는 원전 오염수 대신 ‘처리수’라는 용어를 사용하라며 자국 언론들의 입을 틀어막느라 혈안이 돼 있다. 칼 대신 부채를 건네받아 배를 긋는 시늉만 하고 할복으로 인정하기 위해 증인의 눈을 가리는 격이다. 그들의 없는 양심과 명예에 호소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러나 포기는 이르다. 자신의 의사에 반하지만 세상의 시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기리를 행할 수밖에 없다는 일본의 문화는 바꿔 말하면 국제 여론의 향배에 따라서 일본의 계획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저지 운동이 어디에 집중돼야 하는지를 가리키는 대목이다. 

일말의 기리

서구의 주요 국가들, 그중에서도 특히 미국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 그것이다. 이를 위해 물론 정부 차원의 외교적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이 평소 환경론자임에도 국익 프레임에 발목이 잡혀 운신의 폭이 없는 것을 감안하면 더 유효한 것은 민간차원의 노력일 것이다. 정부에만 기대지 말고 미국 민주당의 전통적인 지지층인 환경운동 단체와 진보단체, 그리고 어업관련단체 등과 연대해 미 정부와 의회에 강력한 압박을 가하는 것이 시급해 보인다. 

떡 한 접시에 불과한 오해를 대범하게 넘어가지 못하는 옹졸한 사무라이가 부채를 들고 배를 긋는 할복 시늉을 하는 것도 이름에 대한 일말의 기리는 남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 김헌범 논설위원, 제주한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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