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홍의 세상사는 이야기] (75) 제주섬은 창조주가 마지막으로 놀다간 땅

1.
연극(drama)의 어원은 드로메논(dromenon, 제사행위)인데, 제단을 만들고 제물을 진설해 절하고 기도하는 절차가 드로메논이다. 신의 내력, 우주의 기원을 알리는 절차가 드로메논이고 이것의 변형된 형태가 오늘의 연극이다.

또한 신화(myth)의 어원은 뮈토스(신의 내력담)인데, 뮈토스는 제사할 때 드렸던 기도문이나 발원문으로 제주굿의 본풀이에 해당하며 이것의 변형된 형태가 오늘의 희곡이다.

제주에는 1만8000의 무속신(巫俗神)이 있었다고 전해져 오는데 이는 일만 팔천개의 본풀이가 있고 그만큼 많은 연극(제사, 굿)이 행해졌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제주를 고대 그리스에 버금가는 ‘연극의 섬’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연극의 섬이므로 이곳에서 프랑스의 ‘아비뇽연극제’나 영국의 ‘에딘버러 공연축제’ 같은 세계적인 연극제를 개최할 필요가 있다.

신에 대한 제사행위(굿)가 연극의 원형이라는 증거는 희랍의 사티로스극(satyric drama)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제주굿 삼공본풀이의 전상놀이와 영감본풀이의 영감놀이에서도 발견된다. 곧, 전상놀이나 영감놀이는 본풀이(굿의 대본)의 극화(劇化)인 것이다. 

말하자면 전상놀이 영감놀이는 ‘굿 속의 극’, 즉 굿극이라고 할 수 있다. 연극평론가 서연호나 연출가 이윤택은 나의 희곡 ‘이어도로 간 비바리’(초혼으로 개명)를 굿극으로 명명했지만 올바른 의미에서의 굿극은 ‘영감놀이류’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제주본풀이에 영감놀이류의 굿극이 존재했지만 그것이 전승되지 않았거나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추정된다. 그래서 제주굿이 연극의 원형이고 놀이굿이 제주굿의 핵심이라는 나의 주장은 민속학, 연극학, 문학, 미학 등 관련 분야에서 학술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굿의 연극성에 관한 연구는 무속학자 문무병의 박사학위 논문이다.)

인류 최초의 문예비평이라고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디오니소스 축제를 언급했는데, 이 축제(제례)가 고대 그리스 연극의 원형이라는 게 정설이다. 디오니소스의 양육자이자 스승이 사티로스인 것을 봐도 전후 사정을 알 수 있다.

제주칠머리 영등굿에서 영감놀이 제차 중 배방선 제차를 하는 모습. 출처=강만보, 제주학아카이브.
제주칠머리 영등굿에서 영감놀이 제차 중 배방선 제차를 하는 모습. 출처=강만보, 제주학아카이브.

2. 
그리스인들은 아폴론 신전이 있는 델포이를 ‘세계의 중심’이라고 했다. 거기에 옴팔로스(세계의 배꼽)라고 불리는 큰 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라산, 더 크게는 제주섬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주장한다. 

왜냐? 중국의 전설에서 봉래산·방장산·영극산을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三神山)이라고 했는데,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해오라고 서복을 한라산에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영주산은 한라산의 옛 이름이다. 제주의 랜드마크인 한라산이 영산(靈山)으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주에는 한라산 말고도 크고 작은 오름 365개가 있고, 땅 아래에는 160개의 용암동굴이 있다. 어떤 동굴 속에는 신비한 호수와 지하궁전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아름다운 종유석이 있다.

작은 섬 안에 이렇게 많은 오름과 동굴, 폭포, 주상절리(기암절벽), 곶자왈(원시밀림)이 있는 곳은 세계적으로 희귀하다. 제주도가 ‘보물섬’으로 불리는 이유는 이 뿐이 아니다. 노인성(老人星)은 남반구 하늘에 있는 용골자리에서 가장 밝은 알파별이다. 수명을 관장하는 별로 여겨졌고, 이 별을 보게되면 오래 산다는 말도 있다. 아시아 지역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별인데 제주도에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제주섬은 천지창조를 끝낸 신이 마지막으로 머물다 간 지상의 안식처요, 낙원이다. 창조주의 체취와 발자취가 남겨진 영화로운 땅이다. 제주섬은 신이 마지막으로 던진 주사위요, 최후에 그린 화룡점정이다.

3. 
제주의 자연은 180만 년 전에 화산 활동으로 형성됐다. 제주의 문화를 대변하는 본풀이는 신의 내력담이고 그것은 우주의 연원을 추적, 탐구하는 일이다.

제주의 자연과 문화는 태곳적부터 ‘신과 함께’ 있었고, ‘우주와 함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제주섬을 ‘우주의 배꼽’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 장일홍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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