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학교’를 제대로 졸업한 준수에게 응원을
‘길 위의 학교’를 제대로 졸업한 준수에게 응원을
  • 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 (news@jejusori.net)
  • 승인 2021.05.14 09:00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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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숙의 길 위에서 전하는 편지] (13) 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코로나 시국으로 서로 거리를 두고 온전한 마음을 나누기 어려운 지금, 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이 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길이 품고 있는 소중한 가치와 치유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서명숙의 로드 다큐멘터리 <길 위에서 전하는 편지>를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한다. / 편집자

어느 날 낯선 여자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고3인 아들이 대학을 왜 가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답을 구하기 위해 제주올레를 걸으러 한 달 동안 제주에 내려가는데, 이 길을 낸 이사장님이 응원하는 차원에서 초반에 한 번만 만나서 격려해달라는 것이었다. 

살짝 당혹스러웠다. 걸으러 오는 올레꾼을 일일이 따로 만날 시간도 없거니와, 그러다 보면 정작 올레에 꼭 필요한 일을 해낼 시간을 확보하기도 어렵기에. 하지만 고3 수험생이 한 달이나 시간을 내서 길을 걸으러 온 것도 놀라웠고, 간절한 엄마의 요청을 단박에 거절하기도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타협안을 제시했다. 아들이 초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잘 걷는다면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서 완주증을 꼭 직접 전달하겠다고. 

한참이 지난 뒤 다시 소식이 왔다. 아들 준수가 드디어 내일이면 전 코스를 완주하고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 들르게 된다고. 아. 그 친구가 결국은 해냈구나. 근데 이렇게 빨리? 그 엄마가 이야기한 출발 날짜에서부터 내일까지 계산해보니 겨우 18일. 그 짧은 기간에 26개 코스 425km, 섬 세 군데까지 다 돌았다는 이야기다. 얼마나 빡세게 걸었을까. 그리고 그 사이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무엇이 그 열아홉 젊은 청년에게 이런 힘든 도전을 가능하게 만들었을까.  

# 준수의 첫 대답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사진=서명숙 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

만나기로 한 날 약속 시간보다 한참 지난 뒤에 한 청년이 두리번거리면서 나타났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표정은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절뚝거리는 발걸음으로 보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듯 짧은 시간에 그 많은 거리를 주파했으니 어찌 발병이 안 나고 배기겠는가. 

자리에 앉은 청년은 약속 시간에 늦어진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했다. 물집이 생기고 무릎이 아파서 초반보다 걸음이 엄청 느려졌고, 마지막 21코스 종점에서 서귀포에 위치한 제주올레 여행자센터가 이렇게까지 멀리 떨어진 줄 몰랐는데다, 결정적으로 이십여분 만에 한 번 오는 시외버스조차 놓쳤노라고, 기다리는 이사장님께 차마 전화를 드릴 용기가 없었노라고. 그런데 이렇게 오래도록 기다려주실 줄은 몰랐노라고. 그냥 와봤는데 기다려주셔서 너무 감사하다고. 

사진=서명숙 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

그에게 물었다. 올레길 걸으면서 어땠는지를. 그는 조금도 머뭇거림 없이, 조근조근 대답했다. “참 좋았어요. 바닷길 걷다가 싫증이 날 만하면 숲길이나 오름이 나타나고, 숲길이 살짝 지루하다 싶으면 마을길이 나타나고, 마을을 다 지나면 다시 바닷길이 짠하고 펼쳐지고. 심심하거나 지루할 새가 없었어요. 모든 게 다 아름답더라고요.” 

그 대답은 딱 내가 원하는 최고의 대답이었고, 취향 저격이었다. 내가 딱 그런 스타일이었다. 아무리 좋은 산길도, 바닷길도, 마을길도 너무 비슷한 컨셉이 계속되면 지루함을 느끼는 변덕스러움이 내게는 늘 있었다. 스위스의 한 호수길을 갔을 때 대여섯 시간 호수만 끼고 걷는데, 시쳇말로 돌아버리는 줄 알았던 기억도, 맨 처음 장거리 도보 여행길이었던 산티아고 길을 걸을 때 36일 동안이나 바다 한번 못 보고 내륙 길만 걸었던 기억도 떠올랐다.

사진=서명숙 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

그래서였다. 산, 바다, 오름. 곶자왈, 바닷가마다 마을이 있는 고향 제주로 돌아가서 길을 내리라 생각한 것은. 그리고 길을 내면서 되도록 다양한 성격의 길을 조합시키려고 애를 쓴 것도. 다행스레 내 고향 제주는 한 시간 이상 엇비슷한 풍경이 계속되지 않을 만큼, 다양한 속성의 자연과 변화무쌍한 날씨와 구석기시대부터 층층이 켜켜이 쌓여온 생활과 역사 문화가 지층처럼 겹쳐 있는, 멋진 트레일을 내기에는 최적의 화산섬이었다. 한데 이 어린 친구가 딱 그 지점을 알아보고 그 지점에서 감동했다니, 신기하고 놀라웠다. 이 친구의 사연이 급 궁금해졌다. 고3 학생이 어떻게 이렇듯 숨돌릴 틈 없는 바쁜 시기에 한 달이나 시간을 낸 것인지. 

# 준수는 길 위에서 좋은 스승을 만났다

알고 보니 준수는 고3 재학생이 아니었다. 4년 전 중학교 3학년 때 자퇴를 했고, 자퇴한 그해에 온 가족(엄마, 아빠, 누나, 준수)이 세계 일주 여행을 떠났단다. 학교는 지겨웠지만, 여행은 아무리 고생을 해도 너무나 즐겁고 신났단다. (2018년 출국, 2019년 7월 25일 입국) 하지만 사춘기 절정을 달리고 있는 자녀와 갱년기에 접어든 부모가 1년 동안 울고 웃었던 여행을 아프리카에서 마무리하고 귀국했다. 

그 후 준수는 부모님에 대한 상처, 원망, 우울, 무기력, 이제는 더이상 평범한 학생이 아니라는 자괴감에 빠져 바깥출입을 도통하지 않고 준수 스스로가 만든 감옥 안에 틀어박혀 관심 있는 책이나 영상만 보며 남 탓하고 분노하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엄마의 끊임없는 사랑과 헌신 덕분에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어 검정고시 준비를 했더란다. 4월 말 드디어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대학 진학할 자격을 얻었지만, 그 뒤 또 회의가 찾아오더란다. “꿈이 아주 없는 건 아닌데 굉장히 막연하고. 검정고시 합격하고 나니 허탈하기도 하고 또 방구석에 틀어박히느니 엄마에게 언젠가 들었던 제주올레길을 걸으러 가자,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엄마에게 말씀드리고 허락을 구했어요.”

사진=서명숙 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

그렇게 떠나온 길에서 그는 정말 좋은 선생님, 길 위의 스승을 여럿 만났단다. 9코스 박수기정 입구에서 만난 한 나이 든 올레꾼 아저씨는 아빠와 오랫동안 갈등을 빚어왔고 아직도 그 갈등에서 허우적거리는 준수에게 자신도 그랬노라고, 일주일 전 아버지 장례를 마치고 올레길로 걸으러 왔다면서 조언과 위로를 건네주었단다. 그런가 하면 같은 게스트하우스에 묵었던 형은 손등이 너무 벌겋게 부풀어 오르고 탔다면서 햇살 뜨거운 날에는 꼭 끼고 걸어야 한다면서 마트에서 장갑을 사와 선물로 꼭 쥐어주었단다. 추자도에서 만난 한 올레꾼 아저씨는 그에게 ‘돈필승총(기록이 총기(聰氣)보다 훨씬 낫다)’이라는 말씀을 간곡하게 당부하더란다.

더불어 표선에서 머물었던 숙소의 원장님 부부는 밥이라도 한 끼 먹고 가라며 맛있는 김치찌개를 차려 주고 살이 많이 타면 아플 수 있으니 모자, 팔토시, 목수건까지 챙겨주며 여행 다니면서 밥 굶고 다니지 말라고 적지 않은 용돈과 함께 직접 손편지까지 써주셨단다. 1코스부터 4코스까지 걸어오면서 ’왜, 내가 사서 고생을 하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순간도 있었지만 숙소에서 받은 사랑 덕분에 다시 힘을 내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더란다. 준수의 발걸음마다 귀하고 좋은 스승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길 위에서 나타났다. 하루 만에 16, 17코스를 걷는라 도저히 힘이 빠져 지쳐있을 때쯤 17코스 해안가 옆에 귤 파시는 아저씨를 보고 다가가 한 봉지가 얼마냐고 혹시 맛 좀 볼 수 있냐고 물어만 봤을 뿐인데 아저씨께서 맛이나 보라며 2개 귤을 선뜻 내어주시고 한 봉지를 사려고 하자 길 걷느라 고생 많으니 귤 먹고 비타민 보충하고 힘내라며 공짜로 귤 한 봉지를 모두 주셨단다. 

그래서 그는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대로 그 모든 기억을 늦었지만 기록으로 남길 생각이란다. 

 # 준수가 새로이 찾은 꿈은 ’남에게 도움을 주는 의사‘

  사진=서명숙 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

그렇다면 준수는 이 길에서 과연 더 공부를 해야 할 이유를,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답을 찾은 것일까. 그는 찾은 것 같단다.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것을 의대에 진학해서 의사가 되는 것으로 실천에 옮기고 싶단다. 출세하고 돈 버는 의사가 아니라, 자기처럼 청소년기에 몸과 마음이 아팠던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의사가 되고 싶단다. 준수의 엄마가 간호사라니, 아마 그런 데서 받은 간접적인 영향도 있으리라 짐작이 되었다. 
 
준수와 긴 이야기를 마치고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준수는 제도권 학교를 중퇴한 대신에, 세계 여행과 제주올레 길을 통해 ‘길 위의 학교’를 너무나 훌륭한 성적으로 잘 졸업했구나. ‘길 위의 학교’ 관계자의 한 사람으로서 준수의 꿈을 격하게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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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윤희 2021-05-21 18:57:40
준수는 걸으면서 천연계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귀한 경험을 했네요~~
이런 경험으로 또한 훌륭한 꿈을 찾은 준수~~
몸과 마음을 치료하며 남에게 도움을 주는 의사의 꿈이 꼭 이루어지기를 응원합니다.^^
223.***.***.234

눈물이 2021-05-15 10:41:25
일고있는 내내 눈물이 차오릅니다.
비단 이 친구만이 아닌 길위에서 만나는 어른들도 저마다의 고민과 아픔을 가지고 걸어가며 위로받고 치유하고 또 용기를 얻어가는 이런 이야기들. 제 마음에도 큰 위로가 됩니다. 좋은 길 만들어주신 서명숙 이사장님 감사합니다. 저도 아이들과 함께 조금씩 걸어보렵니다.
117.***.***.253

이유근 2021-05-14 09:53:25
인생을 살면서 좋은 부모와 훌륭한 배우자를 만나는 것 이상으로 좋은 스승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다. 더구나 한참 방황하는 시기인 청춘기에는 더욱 그렇다. 이런 깨달음을 가질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올레의 긍정적 효과야 말로 아무리 칭찬해도 모자랄 것이다. 아무쪼록 준수의 꿈이 이뤄지길 빈다.
220.***.***.179

이문호 2021-05-14 09:28:11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젊음,용기,도전,
저나이에도, 갈 길을 가야겠지요.
1.***.***.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