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223) 호박은 늙을수록 달다

* 단다 : 달달하다(甘, 달 감)

예로부터 호박은 채소류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친숙하다. 우영팟(텃밭) 둘레를 돌아가며 구덩이를 파 걸름(거름)을 넣고 씨앗을 심어 두면 싹이 터 잘 자라던 게 호박이다. 넝쿨이 어찌나 길고 곁으로 가지를 치며 무성하게 자라는지 우영팟 전체를 덮어 버린다. 넝쿨에 감아 오르는 손이 있어 울타리까지 기어오르는 왕성한 녀석이다. 

해에 따라 적게 열려도 식구들 배 불려주던 게 호박이었다.(누가 씨앗을 심느냐에 따라 많이 열리기도 하고 적게 열리기도 한다고 했다. 그만큼 공들여 심었다는 소리일 것이다.) 

먹을 것이 귀하던 어려운 시절에는 호박을 쪄 먹거나 작게 도막을 내어 무쳐 먹었다. 제사상에 올리는 콩나물·숙주나물과 함께 없어서는 안될 채소이기도 하다.

호박이 늙었다 함은 단맛이 날 만큼 난다는 의미다. 푸른빛을 띤 호박은 싱싱해 보이지만 미숙한 것이라 제 맛을 내지 못한다. 청춘과 노년을 그대로 닮았다. 출처=픽사베이.
호박이 늙었다 함은 단맛이 날 만큼 난다는 의미다. 푸른빛을 띤 호박은 싱싱해 보이지만 미숙한 것이라 제 맛을 내지 못한다. 청춘과 노년을 그대로 닮았다. 출처=픽사베이.

종에 따라 달지 않은 것도 있었으나 대부분 엿처럼 달았다 호박을 꼭지에서 도려내어 그 속의 씨를 모두 파낸 뒤 누런 설탕을 재여 넣어 푹 쪄 먹기도 했다. 아마 몸에 좋다고 어머니가 만들어 주던 보양식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오래 끓여도 고스란히 남아 있던 호박 거죽이 신통했다. 한여름 볕에 노랗게 잘 익은 호박으로 찐 것은 별미 중의 별미였다. 

지금은 호박으로 찜을 만들어 먹는 경우는 드물지만, 특별히 약용으로 쓰인다. 아기를 낳은 출산부가 늙은 호박을 고아 그 물을 마시면 좋다고 한다. 호박 물은 산후 부기를 제거하는 탁월한 효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호박은 늙을수록 단다.’

이 말은 단순히 호박의 생태만을 얘기하지 않고, 호박이 노랗게 잘 익어야 제 맛을 내는 것을 사람에 비유했다. 아무리 지식과 능력을 갖춰 유능한 젊은이라 해도 산전수전 다 겪으며 인생을 살아온 노인의 경륜(經綸)을 따르겠는가. 인생에 대한 열정과 패기는 놀랍겠지만, 사람을 관대히 포용하고 세상을 허물없이 다스리는 지혜는 아무래도 노인 쪽일 것이다.

호박이 늙었다 함은 단맛이 날 만큼 난다는 의미다. 푸른빛을 띤 호박은 싱싱해 보이지만 미숙한 것이라 제 맛을 내지 못한다. 청춘과 노년을 그대로 닮았다. 푸른 호박은 젊어 아직 인생을 내다보는 안목이 어느 정도를 넘어서지 못하나, 누렇게 익은 늙은 호박은 인품이 성숙한 경지에 이름을 에둘러 빗댄 것이다. 

노인에게서 드러나는 완숙한 인간미를 잘 익은 호박에다 비유해 실감이 넘친다. 호박의 맛이 그러하듯 사람의 경우도, 노인에게서 풍겨 나오는 인격과 품위가 다르다 함이다. 모진 세파 속에서 온갖 시련과 고통을 견뎌낸 인생의 무게는 곧 철학임을 새삼 느끼게 한다. 

두어 번 곱씹게 된다. 직설적인 것 같은데 실은 암시적이라 이 또한 음미할수록 맛깔스럽다. 깊은 뜻을 한마디 말로 함축한 게 놀랍다.

# 김길웅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 자리 ▲읍내 동산 집에 걸린 달락 외 7권, 시집 ▲텅 빈 부재 ▲둥글다 외 7권, 산문집 '평범한 일상 속의 특별한 아이콘-일일일'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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