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200) 루쉰, '루쉰 전집3 - 들풀', 그린비 출판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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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하고 참혹한 5월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고 먼 산을 바라보라. 어린애의 웃음같이 깨끗하고 명랑한 5월의 하늘, 나날이 푸르러 가는 이 산 저 산, 나날이 새로운 경이를 가져오는 이 언덕 저 언덕, 그리고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 오는 맑고 향기로운 바람.”

‘신록예찬’에서 이양하 선생이 말한 것처럼 5월은 경이로운 신록의 계절이다. 또한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성년의 날, 부부의 날이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이외에 근로자의 날, 스승의 날도 있고, 부처님 오신 날도 있다. 그러나 오월은 한국의 민주화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달이다. 5.18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설렘의 4월이 우리들에게 4.3과 4.16, 그리고 4.19로 영원히 각인된 것과 같다. 우리는 이렇게 잔인한 4월에 이어 참혹한 5월을 맞이했다. 

어디 5월만 그러하겠는가? 87년 6월 항쟁도 있다. 또한 2002년, 2004년, 2008년, 2011년, 2013년, 2014년, 2016년 촛불집회로 명명된 집회와 시위가 계속 이어졌다.  

바람이 불면 풀은 어쩔 수 없어 휘어져 발목까지 눕지만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하지만 또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김수영, ‘풀’)

애정은 왜 식는가? 

역사적 교훈은 끊임없이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잊히는 순간 역사적 사건은 박제화하고, 또 다시 반복과 재연으로 부활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일어난 사건의 의미를 부연하고 끊임없이 확인하며 현실에 적용해야 한다. 그래야 생명력이 유지된다. 하지만 현실은 그러하지 않다. 금세 잊혀지고, 심지어 잊으려 애쓰며, 급기야 눈감아 버린다. 그리고 다시 바람이 분다. 풀이 눕는다. 풀은 심지어 풀뿌리까지 끊임없이 눕는다. 바람이 불면 그러하다. 어찌 바람이 아니 불 수 있겠는가? 어찌 풀이 다시 일어서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록 꺾이고 뿌리조차 뽑히는 한이 있을지라도 풀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피로감이 몰려온다. 그것이 지나치면 절망과 좌절, 그리고 무관심이 똬리를 튼다. 일상에 매몰되어 살기 바쁘다. 애정도 식고 과거도 잊히며 넘어져 피가 흘러도 그저 그 때뿐이다. 

3.1과 5.4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문 낭독과 함께 시작된 3.1 만세 시위가 전국적인 반일反日, 독립운동으로 퍼져나갈 즈음인 5월 4일 중국 북경에서 파리 강화회의에서 도출된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중국 산동의 독일 조차지를 일본이 차지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전자는 당대 사회지도층의 선언으로 시작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후자는 청년들의 시위에서 시작하여 각계각층의 호응을 얻었다. 비록 양자 모두 실질적인 승리(독립과 반환)를 얻지는 못했지만 이로 인해 얻은 결과(역사적 성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조선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군을 갖게 되었고, 중국은 청년을 비롯한 일반 대중들의 역량을 확보하여 새로운 민주주의(신민주주의)의 발판을 마련하고 중국공산당 태동의 힘을 얻었다. 하지만 여전히 풀은 눕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들풀(野草)

신문화운동의 시발점이 된 “신청년 그룹은 뿔뿔이 흩어졌다. 높이 오른 이가 있는가 하면 물러난 이, 나아가는 이가 있었다. 같은 진영의 동료들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경험했다. 그 사이에 내게는 ‘작가’라는 두함頭銜이 생겼다. 여전히 사막 가운데서 배회했으나 이런저런 간행물에 글 쓰는 일을 면할 수 없었다. 내키는 대로 몇 마디 하는 식으로 자그마한 감촉이 있을 때마다 짤막한 글을 쓰기도 했는데, 거창하게 말하면 산문시라 할 것이다. 나중에 책자로 엮었고, 들풀(野草)이라 이름 지었다.” 

1932년 루쉰(魯迅, 1881~1936년)은 자신의 ‘남강북조집南腔北調集’에 실려 있는 ‘자선집自選集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5.4운동 이후에도 군벌은 여전히 정권을 좌지우지했고, 외세는 호시탐탐 이권을 찾아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며, 일반 대중들은 생업으로 바빴다. 1924년 군벌 펑위샹馮玉祥이 북경 정변을 일으킨 후 돤치루이段祺瑞가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임시집정을 맡았을 때부터 1926년 3월 18일 리다자오李大釗가 이끄는 군중들이 천안문에서 8국 정부의 무리한 요구에 반대하는 시위(3.18 참안慘案)를 벌이다가 수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을 때까지 루쉰은 베이징에 거주하고 있었다. 

“침묵하고 있을 때 나는 충실함을 느낀다. 입을 열려고 하면 공허함을 느낀다. 지난날의 생명은 벌써 죽었다. 나는 이 죽음을 크게 기뻐한다. 이로써 일찍이 살아 있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죽은 생명은 벌써 썩었다. 나는 이 썩음을 크게 기뻐한다. 이로써 공허하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이다. 생명의 흙이 땅 위에 버려졌으나 큰키나무는 나지 않고 들풀만 났다. 이것은 나의 허물이다.”

“나는 나의 들풀을 사랑한다. 그러나 나는 들풀을 장식으로 삼는 이 땅을 증오한다. 땅불이 땅속에서 운행하며 치달린다. 용암이 터져 나오면 들풀과 큰키나무를 깡그리 태워 없앨 것이다. 그리하여 썩을 것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평안하고, 기껍다. 나는 크게 웃고, 노래하리라.”

- 들풀, 제목에 붙여(題辭) 

중국문학사에서 ‘들풀’은 중국 산문시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자 만개한 꽃 봉우리이다. ‘광인일기’나 ‘아큐정전’ 등의 소설, 비수匕首이자 창과 같은 잡감문雜感文으로 널리 알려진 루쉰의 작품 세계에 ‘들풀’은 기화奇花이다. 더군다나 보들레르의 상징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정도로 상징적인 의미가 다분하다. 하여 그리 쉽게 읽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지금의 우리들에게 여전히 유의미한 것은 그것이 ‘운동’의 역전과 좌절로 인한 피로감에 빠져 있을 때, 또 다시 풀이 누워 아직 일어서지 못했을 때, 무료함을 느낀 행인들이 서로 마주 보다 서서히 흩어지고 메마른 나머지 흥미마저 잃었을 때, 그리하여 광막한 광야만 남았다고 느껴질 때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때문이다. 또한 절망을 야기하는 사건이란 것도 사실은 유한한 것이니, 마치 풀이 누었다가 다시 일어서는 것처럼 한 때의 ‘눕힘’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쉰은 이렇게 말했다. 

“절망이 허망한 것은 희망과 마찬가지이다.”

- 들풀, 희망

힘들고 어려울 때는 헛된 희망에 사로잡히지 말고 오히려 그 절망의 끝까지 내려가 볼 일이다. “내가 암흑 속에 가라앉을 때 세계가 온전히 나 자신에 속할 것이다.”(같은 책 ‘그림자의 고별(影的告別)’) 그래야만 절망이 사실은 허망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루쉰은 같은 글에서 헝가리 시인이자 혁명가인 페퇴피 샨도르의 ‘희망’이란 시에 나오는 한 구절은 인용했다.

“희망이란 무엇인가? 창녀. 그는 누구에게나 웃음 짓고, 모든 것을 준다. 그대가 가장 큰 보물, 그대의 청춘을 바쳤을 때, 그는 그대를 버린다.”

희망은 덧없다. 하지만 절망 또한 유한하니, 허망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자각으로 인해 루쉰은 결코 허무주의자가 될 수 없었다. 루쉰 스스로 말하고 있다시피 그가 ‘희망’을 쓴 까닭은 당시 젊은이들이 의기소침한 데 놀랐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허무와 적막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면서 한편으로 절망을 자각하도록 하고 헛된 희망에 빠지지 않도록 하면서 정신적 각오를 되살리도록 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광명의 미래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 역정을 거쳐야 하는지 루쉰은 어쩌면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여담의 진담

중국에서 올해는 5.4운동 102주년, 노신이 세상에 나온 지 14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연히 중국 관련 sns에서 5.4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10대 인물에 관한 글을 읽었다. 우선 5.4 이전 신문화운동의 주역인 천두슈陳獨秀, 후스胡適, 루쉰魯迅, 첸쉬안퉁錢玄同과 당시 북대 총장이자 미학자인 차이위안페이蔡元培, 학자이자 공산주의운동의 기수였던 리다자오李大釗, 5.4운동의 학생 대표이자 이후 학자가 된 푸쓰녠傅斯年, 뤄자룬羅家倫은 당연한데, 천인커陳寅恪와 량치차오梁啓超는 의외였다. 알고 보니 박학한 학식으로 ‘교수 중의 교수’라고 칭해지는 천인커는 그가 왕궈웨이王國維의 비문碑文에 쓴 ‘독립의 정신, 자유의 사상’이 ‘오사정신’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고, 캉유웨이康有爲의 제자로 무술변법을 시행했다가 실패한 개혁가이자 계몽가인 량치차오는 ‘신사상’의 계몽자로서 신문화운동에 참여한 신지식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하나의 사건, 하나의 사상, 하나의 변혁이 생겨나려면 적어도 수십 년의 시간이 걸리는구나! 실제로 5.4운동에 앞장 선 학생 지도자들 가운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원이둬聞一多, 정전둬鄭振鐸, 장궈타오張國燾. 누구는 정치가가 되었고, 누구는 학자, 시인이 되었지만 그들은 모두 5.4의 세례를 받은 이들이다. 희망과 절망 사이에 세월이 있다. 그 시간은 짧을 수도 있고 길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세월 속에 헛된 희망이나 절망에 매몰되지 않아야만 비로소 광명의 사회로 좀 더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들풀’은 물론이고 루쉰의 책을 읽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하지만 그의 모든 저작을 읽을 수 있는 멋진 번역본이 있다. 전체 20권 ‘루쉰전집’(그린비 출판사)이다. ‘루쉰전집번역위원회’의 십 수 명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번역했다. 루쉰의 소설 ‘광인일기’가 한국에 번역된 것이 1927년이니 거의 100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난 후에 비로소 전집이 나온 셈이다. 우리나라에도 이른바 번역서의 정본正本이 등장한 것이 꽤나 되었다. 믿고 읽을 수 있으며, 원본 대신 주석본註釋에 활용할 수 있는 정본이 나오기까지 끊임없이 눕고 일어서기를 반복했을 터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 사회가 그런 과정을 거쳐 좀 더 나아지는 것과 같지 않을까?

# 심규호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 졸업, 동대학원 중문학 박사. 제주국제대 교수, 중국학연구회, 중국문학이론학회 회장 역임. 현 제주중국학회 회장, 제주문화포럼 이사장. 저서로 ▲육조삼가 창작론 연구 ▲도표와 사진으로 보는 중국사 ▲한자로 세상읽기 ▲부운재(수필집) 등이 있다. 역서는 ▲중국사상사 ▲중국문학비평소사 ▲마오쩌둥 평전 ▲덩샤오핑과 그의 시대 ▲개구리 ▲중국문화답사기 ▲중국사강요 ▲완적집 ▲낙타샹즈 등 7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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