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예술칼럼, Peace Art Column] (53) 리춘펑

제주도는 평화의 섬입니다. 항쟁과 학살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주4.3이 그렇듯이 비극적 전쟁을 겪은 오키나와, 2.28 이래 40년간 독재체제를 겪어온 타이완도, 우산혁명으로 알려진 홍콩도 예술을 통해 평화를 갈구하는 ‘평화예술’이 역사와 함께 현실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들 네 지역 예술가들이 연대해 평화예술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들의 평화예술운동에 대한 창작과 비평, 이론과 실천의 공진화(共進化)도 매우 중요합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네 나라 예술가들의 활동을 ‘평화예술칼럼(Peace Art Column)’을 통해 매주 소개합니다. 필자 국적에 따른 언어가 제각각 달라 영어 일어 중국어 번역 원고도 함께 게재합니다. [편집자 글]
사진=리춘펑.
2019년 홍콩 시위 당시 바리케이드. 사진=리춘펑.

지난 번 글에서 필자는 홍콩의 ‘지역주의’를 언급하며 처음에는 진보적인 범좌파적 도시 운동 속에서 생겨난 그 언설이 이후 역설적으로 보수적인 우파적 이데올로기에 점차 지배되고 그것이 오늘날 운동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이 ‘트렌드’가 복잡한 요소를 수반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하지만, 그것이 정말 불가피한 것인가? 이는 중요한 질문이지만 간단히 대답할 수는 없다. 아마도 우리는 지역주의를 민족주의나 인종주의와 동일시해서는 안 되며, 그것을 저항의 유일한 가능성으로 보고 '거침없이'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그 변화의 궤적과 그것이 어떤 부주의한 결과를 초래했는지 이해하는 일이다.

여기서 소위 ‘지역주의’란 실제로는 ‘지역 정체성’을 대립 축으로 하는 일종의 정치적 주장으로, 정체성의 좌표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예를 들어 누가 동료이고 누가 적인가 등)와 관련된다. 문화이론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샹탈 무페(1985년)의 분석에 따르면, 정치적 대립은 사회의 다양한 요구와 불만의 ‘통합’을 통해 구성되고, 이 대립의 관계가 확립되어야 정치가 가능하다. 이러한 과정은 ‘다원성·다양성’을 ‘단일성’으로 바꿔 원래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던 불만을 균질화하고 ‘인민-국가’, ‘억압된 민족-침략 식민지’라는 이항 대립의 관계로 치환해 버린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구성에는 몇 가지 맹점이 있다. 예를 들어 현대 사회에서의 분쟁은 이러한 단순한 이항 대립에서 발생하는 경우는 적고, 오히려 국가, 자본, 사회라는 여러 요인의 연동으로 발생한다. 푸코가 거버넌스에 대해 분석했듯이 현대 사회에서 권력 분배는 종종 비선형적이고 분산적이다. 바꾸어 말하면, 분쟁이나 폭력은 반드시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사회 내부로부터도 발생하므로, 이항 대립으로 문제의 근본을 이해할 수 있다고는 할 수 없다.

한편, 이러한 정치적 제창은 ‘경계’를 만들어 내는 사실상의 정치, 예를 들어 사회를 ‘우리들-그들’로 분단시키는 것이며, 그것은 때로 불가피하게 복잡한 ‘타자’를 단순화하거나 주류 혹은 때로 차별적인 표상으로 딱지를 붙이고 그 결과 어떤(아마도 의도하지 않은) 폭력이 발생한다. 최근의 미국 사회에서의 반아시아 정서의 대두는 그 한 예다.

홍콩의 지역주의가 출현한 배경을 생각해 보면, 초기 일련의 도시 운동에서는, 풀뿌리의 민중의 생존 공간, 보다 공평한 도시 개발과 참가의 권리, 시장의 확대에 의해서 일어나는 모순 등이라고 하는 광범위한 문제가 채택되어, ‘로컬’의 투쟁이 실제로는 글로벌한 ‘국가-자본’ 시스템에 대항하려고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복잡한 사회 분석을 필요로 하여 대중에게는 문제를 홍콩과 중국의 경계 대립으로 돌리는 것이 ‘매력적’으로 비치기 쉽다. 그 결과 나중에 등장한 우파의 로컬리즘 언설은 이른바 ‘중국·홍콩 분단’을 강조하면서 중국 본토로부터의 신이민이나 관광객에게 점차 침략자나 식민자로 낙인찍어 비난의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사진=리춘펑.
선전을 맨 위에, 홍콩 북부 신계를 맨 아래에 두고 있는 중국 본토와 홍콩 사이의 경계. 2021년 구글지도의 스크린샷. 사진=리춘펑.

홍콩의 사회 문제가 중국의 영향력 증대와 사람과 자본의 이동과 관련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글로벌 자본의 확대가 야기하는 모순은 ‘경계’에 초점을 맞춘 대립과 동등하지 않더라도 더 중시되어야 한다. 후자는 경계를 넘어선 ‘국가-자본’ 시스템에 대항하지 않고 사람들 간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는 어렵다.

동아시아의 평화와 공생을 생각할 때 ‘경계’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고 분쟁을 단순화하여 도덕적으로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복잡하게 얽힌 여러 상황을 해체하여 사물을 본래의 복잡함으로 되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는 오늘의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데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아티스트나 액티비스트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향후, 기회를 찾아 논의해 나가고 싶다.

# 리춘펑

리춘펑(李俊峰, LEE Chun-Fung)은 홍콩에 거주하는 예술가이자 큐레이터이다. 그의 작품들은 공간적, 역사적, 정치적 맥락에서 공동의 관계를 탐구한다. 그는 <Can We Live Together?>(2014) 등과 같은 큐레이터 프로젝트를 비롯해 <Cycling to the Square>(2010~), <Pitt Street Riot>(2014) 등의 프로젝트에서 참여적인 예술 활동을 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홍콩의 풀뿌리 동네인 야우마테이(Yau Ma Tei)에 기반을 둔 커뮤니티-예술 공간인 우퍼텐(Woofer Ten, 2009-2015)을 포함한 여러 예술 이니셔티브의 공동 창립자였다. 한편, 그는 동아시아 멀티미팅(Multiple Meeting, 2012-2013)과 <Art/Activist-in-Residence>(2011-2015)와 같은 프로젝트와 함께 지역 간 예술/활동가 교류에 힘쓰고 있다.


「邊界」的構成

李俊峰

上回提到有關香港的本土主義,並指出其論述最初出現在進步的泛左翼城市運動,後來弔詭地愈來愈被保守主張的右翼意識形態所佔據,成了影響運動發展的重要力量。值得留意的是,此一「趨向」其實涉及相當複雜的因素,究竟為何會出現?是否無可避免?裡頭有很多值得思考的問題。不過,要回答以上問題其實並不容易,在此,我們或先不要將本土主義完全等同國族主義或種族主義,同時我們亦不必將之視為反抗的唯一可能,「義無反顧」地全盤接受它、推動它;關鍵是,我們需要先了解其演變軌跡,其主張如何引發了一些或不經意的後果?

首先,所謂的「本土主義」其實是指一種以「本土認同」作為對抗的政治主張,當中涉及認同的座標究竟應如何劃定?誰是同伴?誰是敵人?在文化理論家Ernesto Laclau和 Chantal Mouffe的分析裡 (1985),政治對抗透過社會上種種紛異的訴求與不滿的「統合」而構成,當此一對立的關係得到確立時,政治才成為可能。這裡要留意的是此一統合過程同時亦是一個將「多元紛異」轉化成「統一」的過程,原來出現在民眾之間的種種不滿會被同質化,取而代之的是二元對立的對抗關係,如人民/國家、被壓迫的民族/入侵的殖民者。

然而,這種政治操作具有一些頗為明顯的盲點,比如現代社會的眾多矛盾很多時候並不完全來自這簡單的對立,而是國家、資本、社會等多重因素的環環相扣;如傅柯對「治理性」的分析,當代社會的權力佈置往往是非線性和去中心化的;換言之,問題有時不一定來自外部,也由社會內部構成,兩極化的對抗並不一定讓我們更了解問題的根本。另一方面,這種政治操作本質上就是透過「邊界」來劃分出我們/他們,然而這類方式難免地將複雜的「他者」同質化,甚或冠上歧視的標籤,於是一些(或許不經意的)暴力便因而產生。近來在美國社會出現的反亞裔情緒便是一例。

若以香港本土主義的出現背景為例,當初連串城市運動所召喚的問題其實相當廣泛,諸如草根民眾的生存空間、更公平的城市發展與參與權利、因金融資本擴張而造成的種種矛盾等,「本土」要對抗的是全球性的「國家-資本」體制;然而,這些問題涉及複雜的社會分析,往往不如將問題歸咎在中港邊界這麼具體及容易讓群眾接受。於是,在往後出現的右翼本土主義便相當強調所謂中港區隔,而從中國大陸來港的新移民、內地遊客等便漸漸被標籤為入侵者、殖民者,成了被歸咎問題的代罪羊。雖然,香港的社會問題確實與中國逐漸加強的影響力與人民、資本的流動有關,但對比城市運動中指出的跨邊界問題,後者影響其實亦應受到同樣的重視(若非更加);如只將問題焦點聚焦在「邊界」,對立不過發生在人民與人民之間,而非針對全球性的「國家-資本」這體制的對抗上。

當思考東亞的和平、共存的議題時,我們如何避免掉進由「邊界」所設下的陷阱,重新將事情帶回它的複雜性,拆解種種複雜糾結的處境?而非將矛盾置於簡化、道德化的對立關係?這便成了突破今天困局的一項重要任務。在這層面上,你認為藝術家/行動者的工作又應該是什麼?我們日後有機會再談。

圖1: 2019運動期間由磚頭砌成的路陣,攝影:李俊峰

圖2:中國大陸和香港之間的邊界,上方為深圳市,下方為香港新界北部,截圖自Google地圖, 2021


<境界>を作り出す

リー・チュンフォン

前回、私は香港の<ローカリズム>に言及し、最初は進歩的な汎左派的都市運動の中で生まれたその言説が、その後は逆説的に保守的な右派的イデオロギーに次第に支配され、それが今日の運動に影響を与える要因となっていることを指摘した。この<トレンド>が複雑な要素を含むことは注記すべきだけれど、それはほんとうに不可避なことなのか?これは重要な問いだが、簡単に答えることはできない。おそらくまず私たちは、ローカリズムをナショナリズムやレイシズムと同一視してはならないし、それを抵抗の唯一の可能性と考えて<律儀に>推進したりしてはならないだろう。重要なのは、その変化の軌跡とそれがどのような不注意な結果を招いたのか理解することだ。

ここで、いわゆる<ローカリズム>とは、実際には<ローカル・アイデンティティ>を対立軸とする一種の政治的主張のことで、アイデンティティの座標をどう定めるべきか(例えば誰が仲間で誰が敵かなど)ということが関わってくる。文化理論家のエルネスト・ラクラウとシャンタル・ムフ(1985年)の分析によれば、政治的対立は、社会の様々な要求と不満の<統合>を通じて構成され、この対立の関系が確立されてこそ政治が可能となる。このようなプロセスは<多元性・多様性>を<単一性>に変え、もともと人々の間に存在していた不満を均質化し、<人民/国家><抑圧された民族/侵略する植民者>といった二項対立の関係に置き換えてしまう。

しかし、このような政治的構成にはいくつかの盲点がある。例えば現代社会における紛争は、このような単純な二項対立から生じることは少なく、むしろ国家、資本、社会といった様々な要因の連動で生じる。フーコーが「ガバナンス」について分析したように、現代社会における権力の分配は、しばしば非線形で分散的だ。言い換えれば、紛争や暴力は必ずしも外部からやってくるものでなく、社会の内部からも生じるので、二項対立で問題の根本を理解できるとは限らない。一方このような政治的提唱は、<境界>を作り出す事実上の政治、たとえば社会を<我々/彼ら>に分断するようなことであり、それは時として不可避的に、複雑な<他者>を単純化し、または主流あるいは時に差別的な表象でレッテルを貼り、その結果何らかの(おそらく意図せざる)暴力が発生する。最近のアメリカ社会での反アジア感情の台頭はその一例だ。

香港のローカリズムが出現した背景を考えてみると、初期の一連の都市運動では、草の根の民衆の生存空間、より公平な都市開発と参加の権利、市場の拡大によって引き起こされる矛盾などといった広範な問題が採り上げられ、<ローカル>な闘争が実際にはグローバルな<国家-資本>システムに対抗しようとしていることがわかる。しかし、これらの問題は複雑な社会分析を必要とし、大衆にとっては問題を香港と中国の境界対立に帰す方が<魅力的>にうつりがちだ。その結果、後に登場した右派のローカリズム言説は、いわゆる<中国・香港分断>を強調し、中国本土からの新移民や観光客に次第に侵略者や植民者というレッテルを貼り、非難のスケープゴートにしていった。香港の社会問題が中国の影響力の増大と人や資本の移動に関連しているのは事実だが、グローバル資本の拡大が引き起こす矛盾は、<境界>に焦点を当てた対立と同等とまではいかなくても、もっと重視されるべきだ。後者は、境界を越えた<国家-資本>システムに対抗せず人々の間の対立に焦点を当てているため、問題を根本的に解決することは難しい。

東アジアの平和と共生を考える時、<境界>という罠に陥ることなく、紛争を単純化して道徳的に対立させるのでなく、複雑に絡み合ったさまざまな状況を解体して物事を本来の複雑さに立ち返らせるにはどうしたらいいのか。これは今日のジレンマから脱却するために重要な作業となるだろう。この点において、アーティストやアクティビストは何をすべきだろうか?今後、機会を見つけて議論していきたい。

図1 2019年のHKプロテストでは、レンガで作ったバリケードを設置した。 写真:リー・チュンフォン

図2:中国本土と香港の境界、上が深圳市、下が香港北部の新界(2021年、Google Mapsのスクリーンショット


The Construction of 'Borders'

Lee Chun Fung

In the previous article, I have discussed ‘localism’ in Hong Kong and how it first emerged in the progressive urban movement, but was paradoxically dominated by conservative right-wing ideologies, which has became an influential factors in the movement today. It is worth noting that this 'trend' involves complex factors, Is it really inevitable?This question is worth thinking. However, it is also not easy to answer it in short, so perhaps, firstly we should not equate localism with nationalism or racism, nor should we see it as the only possibility of resistance and accept it ‘without reluctance’.

Here, the so-called 'localism' actually refers to a kind of political ideology that takes 'local identity' as a counterpoint, which involves how should identity be ordinated? e.g Who are our companions and who are the enemies? In the analysis of cultural theorists Ernesto Laclau and Chantal Mouffe (1985), political confrontation is constituted by the 'articulation' of the various demands and grievances of the society. Such process transform ‘diversity’ into ‘unity’ , where the grievances that originally existed among the masses are homogenised and replaced by a dichotomy of oppositional relationships, such as ‘the people vs the state’, ‘the oppressed nation vs invading coloniser’ etc.

However, this kind of political construction has some blind spots, for example, conflicts in our modern societies do not often come from a simple dichotomy, but the interlocking between various factors; as in Foucault analyzes on ‘governance’, power in societies is often in a non-linear, decentralized setting; in other words, conflicts and violence sometimes do not necessarily come from outside, but also from within, dichotomy may not lead us to understand the underlying problems. On the other hand, such political advocate is in fact politics of creating 'border', such as the division of society into We and They, which sometimes inevitably simplifies the complicities of  'the other', or even labels it with mainstream, or sometime discriminatory symbols, as a result some (perhaps inadvertent) violence is generated. The recent anti-Asian sentiment in US is a case in point.

If we look at the case of localism in Hong Kong, we can see that the urban movements called for a wide range of issues, such as the living conditions of the grassroots, more equitable urban development and rights for participation, and the contradictions caused by the expansion of market, the ‘local’ struggle in fact try to against the global ‘state-capital’ system. However, these issues involve complex social analysis and are often less ‘attractive’ to the mass than attributing them to the Hong Kong-China conflicts. As a result, the right-wing localist discourse that emerged later on placed a lot of emphasis on the so-called ‘China-Hong Kong division’, new immigrants and tourists from mainland China were gradually labelled as invaders, the scapegoat for the blame. While it is true that social problems in Hong Kong are somehow linked to China's increasing influence, the contradictions caused by the expansion of global capital should be given equal (if not greater) importance than the conflicts focusing on 'border', as the later focus on the confrontation between people, not against the 'state-capital' system across national borders, it is difficult to solve the problem at its root. 

When thinking about peace and coexistence in East Asia, how do we avoid falling into the trap of 'border'? and bring things back to their complexities, dismantling the various complex and tangled situations, rather than placing the conflict in a simplified, moralised opposition? It would be an important task to break out of today's dilemma. On this level, what do you think artists and activists should do? Let's find an opportunity to discuss this in the future. 

image 1 : Barricades during the 2019 HK Protest, courtesy of Lee Chun Fung

Image 2: The border between mainland China and Hong Kong, with Shenzhen at the top and the northern parts of Hong Kong at the bottom. Screenshot from Google maps,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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