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224) 가죽신 신고 싶으면 백정한테 시집가라

* 가죽 창 신 : 마소 가죽으로 바닥을 만든) 가죽신
* 신고프민 : 신고프면, 신고 싶으면
* 백정안티 : 백정한테

오랜 옛날에는 주로 짚신을 신었다. 그 짚신이라는 거친 신발도 누구나 신을 수 있는 신발이 아니었다. 1940~1950년대까지만 해도 짚신마저 삼아 신을 수 없어 맨발로 나다니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빗물 질척이는 비포장도로 혹은 겨울날 눈이 내려 얼어붙은 길 위를 맨발로 다니는 걸 상상해 보라. 얼마나 불편하고 고통스러웠을 것인가.

한참 뒤에야 고무신이 나왔고 다시 그 뒤로 많은 세월이 흐르기를 기다려 구두를 신게 됐다. 여기서 ‘가죽 창 신’이라 함은 아마 구두 형태의 신발을 일컬음일 것이다. (구 혼례에 신랑이 신던 발바닥에서부터 발을 온통 쌌던 신발이 있긴 했다.)

출처=고광민, 제주학아카이브.
고무신도 신기 어려운 시절에 가죽신이라니. 아무에게나 차례에 올 신발이 아니다. 사진은 1982년 12월 13일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에서 촬영한 사진. 발에는 ‘가죽버선’을 신고 그 위에 ‘태왈’을 덧신었다. 사진 속 인물은 글 내용과 무관하다. 출처=고광민, 제주학아카이브.

고무신도 신기 어려운 시절에 가죽신이라니. 아무에게나 차례에 올 신발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 귀한 ‘가죽 창 신’을 신고 싶다면 길을 하나, 백정에게 시집가면 된다 함이다. 언즉시야(言則是也)라, 지극히 옳은 말이다.

그도 그런 것이, 백정(白丁)은 소나 개, 말, 돼지 따위를 잡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니까 고려, 조선시대로부터 도살(屠殺)을 주로 하며 생활하던 천민층을 일컫는다. 사농공상(士農工商) 어느 계층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회의 밑바닥 하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가죽신이 신고 싶으면 이것저것 가릴 것이 무어냐. 천민 계층인 백정에게 시집가면 되는 것 아니냐 하는 것이다. 가죽신은 그야말로 일반 서민층에서는 그림의 떡으로 신고 싶어 탐내는 호사품이었기 때문이다. 백정을 가축을 잡는(도살하는) 것이 본업이므로 소가죽, 말가죽을 많이 가지고 있으니 실컷 가죽신을 만들어 신을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얘기다. 조금도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백정은 제주 지방에서는 ‘피쟁이’라는 속된 말로 전해 온다. 지금도 시골 서민층에서는 적지 않게 사용되는 말이다. 가축을 잡아 피를 보는 일을 한다고 자연스레 붙여졌을 것이다. 집에 잔치 같은 대사를 치를 때는 그 손을 빌리면서도 돌아서면 저속한 말로 불렀다. 앞뒤가 잘 맞지 않은 점이 없지 않으나, 그게 서민사회의 바닥을 흘러온 관습이거나 통념인지도 모른다.

‘가죽 창 신 신고프민 백정안티 씨집가라.’

한편 참 박정하다는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말 가운데 ‘백정’이라는 하층의 신분을 운위하고 있어서다. 좀 에둘러 표현하는 수는 없었을까. 누구에게나 원(願)하는 바는 있는 것인데, 그걸 무시하고 ‘백정안티 씨집가라’ 했으니 말이다. 더 말할 여백 없이 너무 팍팍하지 않은가.

제주 방언으로 다시 표현하면, “가죽 창 신이 기영 신고프민 개 도야지 잡는 피쟁이안티 씨집가민 될 거 아니라게(가죽 창 신이 그렇게 신고프면 개나 돼지 잡는 백정놈한테 시집가면 될 거 아니냐)” 하는 것이니 하는 말이다.

비바람 많고 흙은 박해 죽어라고 땀 흘려도 소출이 적어 먹고 살기 빠듯했던 우리 선민들, 특히 시골 농민들이 정서적으로 매우 투박했을 것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할 때, 지나치게 과욕을 품는 이에게 제 분수를 알라, 자신을 왜 깨닫지 못하느냐고 일깨우는 목소리로 들으면 좋을 것 같다.

# 김길웅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 자리 ▲읍내 동산 집에 걸린 달락 외 7권, 시집 ▲텅 빈 부재 ▲둥글다 외 7권, 산문집 '평범한 일상 속의 특별한 아이콘-일일일'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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