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72) 돌을 읽다 / 민병도

흔들리는 행간 ⓒ김연미
흔들리는 행간 ⓒ김연미

저문 날 강에 나가 징검돌을 건너다보면
세상 어떤 문자도 범접 못한 경전이 있어
누군가 물속에 숨어 지줄지줄 읽어 주었다

꽃이 피고 새가 울고 달이 지고 날이 새고
바람에 흔들리느니 차라리 생살 깎아
시간의 지문에 갇힌 깊은 고요, 환하다

보지 않고 듣지 않고 알지 않고 말하지 않고
날마다 길을 버리면 스스로 길이 되나
밑줄 친 행간에 감춘 한숨마저 읽었다

-민병도, <돌을 읽다>- 전문

꽃이 핀다. 단단하게 다물었던 입술이 살짝 벌어지는가 싶었는데, 붉은 기를 머금은 이파리들이 몸을 일으킨다. 미심쩍은 듯 주춤거리던 행동이 어느 순간 자신감이 붙었는지 활짝활짝 몸을 뒤로 젖힌다. 화려한 자태, 카메라가 당겨 놓은 시간의 속도가 꽃의 생명을 더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영상은 꽃의 절정을 보여주고 나서 순간 거꾸로 돌아간다. 세상에 환호하듯 뒤로 젖혀졌던 이파리들이 허리를 일으키나 싶었는데 이어 날개를 착착 접는다. 화려함이 접히고 단단하게 뭉친 봉오리 하나가 남았다. 

‘저문 날 강에 나가 징검돌’을 보는데, 난 왜 이런 영상이 머릿속에 떠올랐을까. 겉으로 화려한 것들에게 시선이 끌린다. 말이 많아지고 미사여구가 횡행한다. 그러나 그 화려함을 품은 봉오리의 무거움을 우리는 종종 잊고 산다. 가슴에 품고 있는 것들이 많을수록 침묵하게 된다는 걸, 우리는 자꾸 잊어버리는 것이다. 

‘시간의 지문에’ 스스로를 가두고 평화처럼 ‘고요’속으로 빠져들면 거기가 바로 환한 세상. 그러나 머리와 가슴 사이에는 깊은 강물이 흐르고 있어  ‘누군가’ ‘읽어 주’기 전에는 스스로 ‘범접하지 못하는 경전’이 되고 마는데... ‘생살’을 깎지는 못할망정 아주 작은 미풍에도 흔들렸던 하루를 마무리 한다. 흔들리던 시간이 피로감으로 쌓이고, ‘스스로 길이 되’려면 아직은 먼 ‘행간’에 서서 만지작거리던 길 하나 살며시 놓아본다. ‘밑줄 친’ 하루가 밤 깊숙이 파고든다.

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  『오래된 것들은 골목이 되어갔다』, 산문집 <비오는 날의 오후>를 펴냈다.

젊은시조문학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오랫동안 하던 일을 그만두고 ‘글만 쓰면서 먹고 살수는 없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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