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226) 개라고 눈 쑤시랴

* 개랑 : 개라서, 개라고

지금까지 우리는 ‘개’라는 짐승을 푸대접해 왔다. 사람을 잘 따라 정겹기는 하지만 소나 말처럼 밭 갈고 짐을 질어 나르며 가업을 돕지도 않는다. 돼지처럼 새끼를 낳아 가용에 보태는 수익성도 없다. 새끼는 많이 낳지만 돈 주고 팔 만큼 알아주지 않는 게 개라는 가축이다. 

영물의 짐승이라 유난히 낯을 잘 분별해 익숙지 않은 사람이 들락거리면 짖어대는 게 고작이다. 마당 볕 바르고 바람 좋은 곳에 길게 모로 누워 잠이나 자기 일쑤다. 세상에 이렇게 편히 지내는 짐승이 없다. 개 팔자 상팔자란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그러니 제일 만만한 것이 개라, 자칫하며 발질을 하거나 막대로 때리려 박대해 온 것이 개에 대한 일반적인 대접이었다. 

더군다나 옛날엔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형편에 주는 먹이도 변변치 않았다. 사람을 삼시 세끼 먹으면서도 개에게 하루 2식이 관행이 된 것만 보아도 짐작이 가고도 남을 일이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변했다. 요즘 개에게 발길질하거나 먹이를 잘 안 주어 학대하면 중벌을 받는다. 개가 천국을 만났다. ‘반려견’이란 말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반려란 벗이란 말이다. 한마디로 ‘벗’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고양이도 한가지다. 반려묘(伴侶猫) 아닌가. 

‘개라고 눈 쑤실 수 있겠느냐’라 한 것은, 비록 개처럼 미천한 사람이라고 해서 그럴 수 있으랴는 것,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출처=픽사베이.
‘개라고 눈 쑤실 수 있겠느냐’라 한 것은, 비록 개처럼 미천한 사람이라고 해서 그럴 수 있으랴는 것,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출처=픽사베이.

‘부부는 인생의 반려’로 한평생을 같이 살다 해로동혈(偕老同穴)한다 할 때 쓰는 말이 ‘반려(伴侶)’ 다. 아이만 입양하지 않는다. 개도 사람과 똑같은 절차를 밟아 입양한다. 옷을 해 입히고 매일 목욕시키고 치장해 산책하고 아프면 동물병원에 입원하고 여행으로 며칠간 집을 비울 땐 전용 호텔에 맡겨 재우고 먹인다.

하긴 서양에서 개를 ‘견공(犬公)’이라 해 작위(爵位) 반열에 올린 지 오래된 옛날 일이다. 실존주의 작가 사르트르는 그와 계약 결혼한 보브와르(같은 작가)에게 막대한   유산(고료 수입으로 축적한)을 한 푼도 물려주지 못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계약 결혼이라 법적으로 정식 부부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신 집에 기르던 견공(개)은 유산의 일부를 상속받았다고 하잖은가. 딴 세상 얘기 같지 않은가.

한국도 이제 상당히 서구를 따라가는 추세가 된 지 오래다. 개 대우가 끔찍하다. 세상이 어찌나 달라졌는지 어리둥절할 지경으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요즘 세상에 개를 ‘잘 모시지’ 않았다가는 보통 낭패를 당하지 않는다.

여기서 ‘개’라 함은, 실은 사람을 뜻한다. ‘개라고 눈 쑤실 수 있겠느냐’라 한 것은, 비록 개처럼 미천한 사람이라고 해서 그럴 수 있으랴는 것,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다 같이 존엄시 돼야 마땅하다는 함의(含意)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행간을 읽어 내리면, 사람 아닌 개는 함부로 할 수 있으니, 설령 사람 대우를 그렇게 한다손 치더라도 눈을 쑤시겠느냐 함이다.

# 김길웅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 자리 ▲읍내 동산 집에 걸린 달락 외 7권, 시집 ▲텅 빈 부재 ▲둥글다 외 7권, 산문집 '평범한 일상 속의 특별한 아이콘-일일일'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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