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228) 지렁이 사는 땅은 비옥하다

1971년 8월에서 10월 사이 촬영한 제주도 사진. 밭 너머 보이는 오름은 민오름과 남짓은오름. 사진=이토 아비토, 제주학연구센터
농사지을 때 쟁기로 밭을 가는 행위를 지렁이는 평생을 두고 하는 셈이다. 1971년 8월에서 10월 사이 촬영한 제주도 사진. 밭 너머 보이는 오름은 민오름과 남짓은오름. 사진=이토 아비토, 제주학연구센터

* 게우리 : 지렁이. 회충(기생충의 하나)
* 건다 : (땅이) 기름지다, 비옥(肥沃)하다

과학적 경험이나 발견, 또는 그 분석에 근거한 말임을 알고 나면 깜짝 놀랄 것이다. 지렁이에 대한 기초적 지식이 필요하다.

여름이 지나고 찬바람이 불어올 무렵이면 입술이 트기 일쑤다. 이때 튼 입술을 촉촉하게 해주는 립스틱에 무슨 성분이 들어 있는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평소 눈에 띄기만 하면 징그럽다고 소리 지르는 지렁이 성분이 상당한 분량 함유돼 있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다. 지렁이 피부는 건조를 막아주는 특수한 기름 성분을 가지고 있다.

요즘은 도시뿐 아니라 농어촌까지도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가 많아 지렁이를 쉽게 볼 수 없지만, 예전에는 땅 위를 소리 없이 기어 다니는 지렁이를 어디서든 볼 수 있었다. 다만, 생긴 모양이 징그러워 자칫 혐오의 대상으로 여겨져 온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 지렁이에 대해 알고 나면 싹 달라질 것이다. 쓸모라고는 낚시밥이 고작이라고 무시할는지 모르나 그렇지 않다. 

지렁이는 ‘지구 토양의 건강을 지키는 파수꾼’이다. 무게로 땅속 생물체의 8할을 차지하는 지렁이들은 썩은 나뭇잎이나 동물의 똥 같은 유기물을 즐겨 먹는다. 말할 것도 없이 지렁이의 배설물은 토양을 건강하게 하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유기물들이 많이 함유돼 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다. 농사지을 때 쟁기로 밭을 가는 행위를 지렁이는 평생을 두고 하는 셈이다. 지렁이가 많이 사는 땅에는 미세한 굴이 수없이 생겨 빗물을 땅속 깊이 빠르게 흡수해 흙에 수분이 충분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비옥한 땅(밭)에는 지렁이가 많다. 농경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생물이다.

얼마나 징그러웠으면 이름마저 지렁이일까. 하지만 지렁이라는 이름은 ‘지룡(地龍)’, 즉 땅속의 용에서 왔다는 학설도 있다.

아직도 농촌 우영팟(텃밭)에는 지렁이가 많다. 흙이 기름지다는 징표다. 당연히 배추, 무, 토마토, 수박, 지실(감자)을 갈면 잘 자라고 그 열매도 여물다. 

‘게우리 사는 땅 건다’는 단순한 경험에서 터득한 사실을 훨씬 넘어서는 데서 얻은 지식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렁이의 생태와 흙의 관계를 과학적 분석에 의해 나온 실험의 결과라는 게 아니다. 실제 농토를 관리하고 농사짓는 과정에서 직접 관찰하면서 경험을 톻해 체득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화학비료에다 농약을 살포하는 시절이라 밭에서 지렁이를 만나기가 점점 힘들어 간다. 토질이 급격히 산성화되면서 황폐를 거듭하고 있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예전처럼 경작지가 지렁이가 살 수 없는 환경이 되고 있어 더욱 그렇다.

‘게우리 사는 땅 건다.’ 이제는 메아리 없는 헛구호가 돼 버린 것만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 김길웅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 자리 ▲읍내 동산 집에 걸린 달락 외 7권, 시집 ▲텅 빈 부재 ▲둥글다 외 7권, 산문집 '평범한 일상 속의 특별한 아이콘-일일일'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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