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71주년-人터뷰] 제주 예비검속 생존 강순주 할아버지 “문형순 서장 덕분에 살아나”

“10대 시절 저는 총살 직전에 오직 그 분 때문에 목숨을 구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무고한 많은 사람들이 오직 그 분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제주4.3때 억울하게 잡혀가 총살 직전까지 간 것으로도 모자라 한국전쟁이 터진 뒤 예비검속으로 또다시 죽을뻔 했습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기억이지만 예비검속 당시 무고한 사람들을 살려준 문형순 서장님을 위해 이야기합니다. 저 같은 늙은이에 관심 갖지 말고, 오직 그분의 공적을 부디 많이 알려주세요.”

- 예비검속 생존자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강순주 어르신 인터뷰 中 -

한국전쟁 71주년이다. 한국전쟁에 국군용사로 전장에 나갔던 10대 소년은 아흔 노인이 되어 있었다. 그의 눈가에 금세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린다. 故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의 이름 석자가 나오자 노인은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목소리는 떨렸고 숨소리까지 흔들렸다. 

제주 중산간 마을에서 태어난 10대의 소년은 제주4.3 당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산폭도'가 되어 있었다. 4.3토벌 당시 우여곡절로 목숨을 지킨 소년은 곧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예비검속의 광풍 속에선 다시 '빨갱이'가 되어 있었다. 

평범한 시골 소년이 산폭도로, 산폭도에서 다시 빨갱이로, 그렇게 억울한 낙인이 찍혔던 소년은 결국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나라를 지키고 빨갱이 낙인도 씻어내겠다고 전장으로 뛰쳐 나갔다. 전쟁터에서 눈을 감으면 최소한 빨갱이 누명도 벗고 남은 가족들도 빨갱이 가족이란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산폭도와 빨갱이가 됐던 소년은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대로 국군용사가 됐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모질디 모진 목숨은 몇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겨 이제 고향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의 강순주(1932년생, 90세) 어르신의 이야기다. 

 혓바닥 깨물 통곡의 기억 보따리

1950년 6월 25일, 해방의 기쁨을 제대로 누리지도 못한 한겨레는 강대국 사이의 치닫는 이념 대립 끝에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게 되며 잔인한 탄흔을 역사에 남겼다.

한반도 최남단 제주는 지리적 환경으로 한국전쟁의 직접적인 피해지역은 아니었지만 못지않은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빨갱이라는 누명을 쓰고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예비검속’ 희생자들 이야기다. 

예비검속자들의 다수는 4.3 당시 불어닥친 잔인한 피의 광풍을 피해 산으로 도망쳤다거나, 초토화작전 중 살고 있던 중산간 마을을 버리고 해안가로 내려오지 않았다는 둥 셀 수 없는 억울한 이유로 잡혀간 뒤 대부분 학살된다. 이들 중 간신히 살아온 사람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잡혀갔다.

4.3을 좌익 활동으로 규정했던 당시 이승만 정부는 이들을 북한군에 협조할 우려가 있는 적으로 간주해 집단 학살했기 때문이다. 공무원과 교사, 보도연맹원, 농민, 학생, 부녀자 등 무고한 민간인들은 제주 앞바다에 수장되거나 제주비행장, 섯알오름 등에서 학살, 암매장됐다. 왜 잡혀갔는지, 왜 죽임을 당했는지 정작 자신들은 모른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빨갱이로 낙인 찍혀 있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한국전쟁 71주년을 맞아 이념 대립의 그늘 속에 가려진 억울한 이들의 목소리를 조명하기 위해 예비검속 생존자인 강순주(90) 할아버지를 지난 22일 만났다. 아프고 시린 기억, 혓바닥을 깨물만큼 통곡해야 할 기억의 보따리를 어르신은 마음을 진정시키며 조금씩 풀어냈다.  

ⓒ제주의소리
예비검속 당시 성산포경찰서에 끌려갔다가 극적으로 생존한 강순주(90) 할아버지. 그는 제주4.3때는 폭도로, 예비검속 때는 빨갱이로 몰려 두 차례나 죽을뻔 하다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해 빨갱이라는 누명을 벗고자 했다. 10대의 소년은 지금 아흔 노인이 되었다. ⓒ제주의소리

강 할아버지는 1932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의 한복판이던 세 살 무렵 그는 부모님과 함께 일본으로 넘어갔다. 그러다가 1945년 해방이 되자 다시 고향 제주로 돌아와 가시리 인근에 자리를 잡았다.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희망차게 살아가고자 했던 마음도 잠시, 귀향한 지 3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일어난 4.3의 광풍은 예외없이 강 할아버지에게도 불어닥쳤다.  

 빨갱이라는 낙인, 국군이 되기로 했다

가시리 마을 중심에서 벗어난 변두리에 살았던 탓에 4.3 당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던 강 할아버지다. 가시리 마을 자체가 중산간 마을이고 마을에서도 외곽에 살았던 강 할아버지는 마을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아예 모르는 철부지 소년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꿩을 잡으러 함께 다녔던 동네 주민이 ‘마을이 불에 타고 마을사람들이 군경의 총에 맞아 죽고 있다’는 소식을 알려줘 영문도 모른채 잔뜩 겁에 질려 우선 몸을 피했다.

군경의 중산간마을 초토화작전에 앞서 해안가로 내려오도록 소개령이 내려졌지만 초토화작전을 몰랐던 강 할아버지는 산에 숨어 있다가 결국 토벌대에 붙잡혔다. 이후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다. 

할아버지는 좌익 세력과 함께 활동한 사실을 실토하라는 군의 거짓 자백 강요와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사실이 아니라고 의지를 꺾지 않았다. 결국 제주 산지천 주정공장으로 끌려가 눈이 가려진 채 총살 직전까지 갔지만, 끝까지 거짓을 말하지 않았고 다른 특별한 혐의가 나오지 않자 군경은 강 할아버지를 풀어줬다.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채 가시리로 돌아온 강 할아버지는 초토화작전으로 폐허로 변해 버린 마을에 다시 가슴이 무너졌다. 그렇다고 고향을 버리고 떠날 곳도 없었다. 고향을 버릴 수 없어 어떻게든 그곳에서 삶을 이어가기 위해 몸부림치던 와중에 또다시 군경에 끌려갔다. 이번엔 북한군에 협조할 우려가 있다는게 이유였다. 겨우 열 일곱 소년은 이미 빨갱이로 낙인 찍혀 있었다. 

당시 성산포경찰서로 잡혀가 ‘이제는 죽었구나’라고 삶을 포기하려던 찰나였다. 그러나 강 할아버지는 영문도 모른 채 석방됐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살아서 풀려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성산포경찰서장이던 문형순 서장 덕분이었다. 

문 서장은 당시 김두찬 해군중령이 보낸 예비검속자 총살 명령에 ‘부당(不當)하므로 불이행(不履行)’이라고 맞서 대량학살을 막았다. 이에 당시 제주도내 읍면별로 수백 명씩 집단으로 목숨을 잃고 있는 상황에서 성산포경찰서 관할의 희생자는 단 6명에 불과했다. 

강 할아버지는 당시를 떠올리며 “억지로 죄를 뒤집어씌운 뒤 죽이려는 사람도 있는데 억울한 사람들을 살려주기 위해 부당한 명령에 항거한 문 서장님은 어떤 말로도 은혜를 갚을 수 없는 생명의 은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명령을 거부하면 본인도 총살당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나를 살려준 문 서장님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한 것이 한”이라며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문 서장님과 관련된 일이라면 제가 눈 감기 전까지 두 팔 걷고 나서기로 마음 먹은 것”이라고 눈물을 글썽였다. 노인의 눈물은 한동안 멈출줄 몰랐다. 

▲ 1950년 8월30일 해병대 정보참모 해군중령 김두찬이 서귀포경찰서장에게 보낸 예비 구속자 총살 집행 의뢰의 건. 당시 문형순 서장은 '부당함으로 불이행'이라고 썼다.
1950년 8월30일 해병대 정보참모 해군중령 김두찬이 서귀포경찰서장에게 보낸 예비 구속자 총살 집행 의뢰의 건. 당시 문형순 서장은 '부당함으로 불이행'이라고 썼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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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부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형무소 수감자와 예비검속자들을 집단 촐상해 암매장하거나 바다에 수장시키기도 했다. 당시 제주에서는 서귀포시 대정읍 섯알오름 탄약고와 제주비행장에서 많은 학살이 이뤄졌다. ⓒ제주의소리

“나한테 고맙게 생각하지 말아라. 이건 모두 하느님의 뜻이다. 오늘 이후 네가 석방돼 경찰서를 나가거든 사회에 착실하게 적응하면서 나라를 위해 살아줬으면 한다.”(강 할아버지가 풀려날 당시 문 서장에게 들었던 말 中)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돌아온 강 할아버지는 수없이 경찰서 문턱을 오갔다. 그런 탓에 빨갱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억울했다. 나는 빨갱이가 아니라고 항변해도 이미 그는 빨갱이로 낙인 찍혀 있었다. 결국 군 입대를 택했다. 남아있는 가족들의 명예를 위해 빨갱이가 아니란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결국 1952년 입대해 전쟁의 포화 속으로 뛰어들어 약 7년간 군 생활을 하기도 했다. 

  아흔 노인, 故 문형순 묘에 절 올리다

강 할아버지는 “당시 4.3과 연관 있다고 하면 무조건 빨갱이라고 손가락질해서 어느 곳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분위기였다. 이대로 살면 인정도 못 받고 사람대접을 못 받겠다 생각해서 군에 입대했다”라며 “나를 살려준 문 서장님 말대로 나라를 위한 길이기도 하고, 전쟁에서 죽으면 우리 가족들은 명예롭게 살 수 있겠다는 생각도 있었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어 “문 서장님이 풀어줄 때 했던 말을 잊지 않고 전역한 뒤 정말 부지런히 살았다. 그러다보니 조금씩 안정을 찾았고 생활에도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제가 받았던 은혜를 조금이나마 사회에 베풀기 위해 라이온스클럽에 가입해 봉사활동도 꾸준히 해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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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취재기자가 찾아간 제주시 오등동 소재 故 문형순(文亨淳. 1897~1966) 전 성산포경찰서장의 묘.  산소 앞의 국화꽃은 지난 6월20일 문 서장의 기일에 강순주 할아버지가 묘소를 찾아 헌화한 것이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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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순주 할아버지는 생전에 문형순 서장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못 전한 것이 한스럽다며 대신 그의 공적을 널리 알리는데 일조하고 싶다고 말했다. 취재기자에게는 문 서장의 공적을 도민들이 알 수 있도록 자신보다 문 서장 이야기를 많이 전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기도 했다. ⓒ제주의소리

강 할아버지는 제주시 아라동 산천단 인근 평안도민공동묘지에 있는 문 서장 묘소를 처음 찾아갔던 2018년 6월20일의 일화도 소개했다. 1966년 6월20일 별세한 문서장은 평안도 출신이다. 후손이 없어 평안도민공동묘지에 안장돼 있다. 강 할아버지는 문 서장의 묘가 이 곳에 있다는 소식을 듣게 돼 찾아갔으나 길이 험난하고 어느 묘인지 몰라 몇 시간을 헤맸다는 것. 

산소마다 풀이 무성하게 자라 뒤덮인 상태여서 누구의 묘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았단다. 그러다 포기하고 발걸음을 돌리려는 순간 운명처럼 눈 앞에 문 서장이 잠들어있는 비석이 서 있었다. 그렇게 몇시간 만에 문 서장의 묘를 찾아 간단하게라도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그는 “문 서장이 내 마음을 시험해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살려준 은혜를 잊지 않고 온 것인지, 단순히 불쌍하다는 마음만 안고 온 것인지 나에게 농담을 건네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회고했다. 

이후 매해 문 서장의 기일인 양력 6월 20일과 명절 때마다 묘를 찾아 정성스레 정리하고 제물을 바치고 있다.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감사한 마음 하나로 험한 길을 헤쳐 찾은 뒤 빠지지 않고 챙기고 있다.

2018년에는 문 서장이 올해의 경찰 영웅으로 선정될 수 있도록 그 존재를 세상에 알린 김종민 전 4.3전문위원과 함께 증언하는 등 공적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이에 문 서장은 경찰 영웅으로 선정됐으며, 제주경찰청 앞에 흉상이 세워졌다.

더불어 서귀포시 대정읍 동일리에는 공덕비가 세워져 있으며, 4.3평화기념관 ‘의로운 사람들’ 코너에는 문 서장이 당시 불이행했던 명령서와 함께 그의 공적이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김종민 전 4·3중앙위원회 전문위원은 의로운 사람들 코너에 대해 “4.3-예비검속 당시 학살을 저지른 군경과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본연의 역할을 다한 군경을 비교해 관람객들이 ‘나라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생각해볼 수 있는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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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평화기념관 '의로운 사람들' 전시실에 마련된 문형순 서장 공적 안내. ⓒ제주의소리
▲ 11월1일 오전 11시 제주지방경찰청에서 故문형순(1897~1966.경감) 전 모슬포경찰서장에 대한 추모흉상 제막식이 열리고 있다.
2018년 11월 1일 당시 제주지방경찰청에선 故 문형순 서장에 대한 추모흉상 제막식이 열렸다.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강 할아버지는 “이렇게 훌륭하신 분을 외롭게 공동묘지에 모시면 되나. 수많은 사람을 살린 서장님의 묘소를 좋은 곳으로 옮겨 모시고 공적을 세상에 더 알려야 한다”며 “나이가 들고 건강도 좋지 않아 더 알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문 서장님이 살려준 사람들이 나와 같이 가족을 만들었다면 그 수는 불어나 6000여 명이 됐을 것”이라며 “서장님은 200여 명의 목숨을 살린 게 아니라 6000여 명, 나아가 앞으로 살아갈 모든 이들의 목숨을 살린 셈이다”라고 강조했다. 

문 서장은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만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다 광복 이후 1947년 5월 경찰에 투신한 뒤 서울을 거쳐 제주에 내려왔다. 1947년 7월 제주경찰서 기동대장을 거쳐 한림지서장과 모슬포경찰서장, 성산포경찰서장을 지냈다.

1949년 모슬포경찰서장 당시엔 좌익 혐의를 받던 주민 100여 명이 처형될 위기에 처하자 자수시킨 뒤 훈방해 목숨을 살린 바 있다. 이후 1953년 9월 경찰에서 퇴직하고 1966년 6월 후손 없이 생을 마감했다. 

예비검속 학살사건은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과 더불어 정면으로 마주해야 할 우리의 아픈 역사다. 지난날의 과오는 반성하고 문 서장과 같은 의로운 용기는 더욱 조명 받아야 한다. 무엇보다 이 땅에 다시는 강순주 할아버지와 같은 역사의 희생자가 기록되지 말아야 한다. 한국전쟁이 남긴 시린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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